2011. 11. 11. 07:04






수능을 마친 고3은 말년병장, 방학한 초딩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잉여로운 존재에 속합니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몇 주, 혹은 몇 달간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이 족속들은 하루 24시간을 놀고먹는 데 투자합니다. 수능 보기 전에는 불안해하면서 놀았지만 이제는 그 최소한의 불안마저도 털어버리고 펑펑 놉니다. 수능을 잘 본 학생이든 못 본 학생이든 맘놓고 놀아제끼는 점에서는 요플레를 먹을 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뚜껑부터 핥는다는 만인평등사상이 떠오릅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수능에만 올인하고 그 외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개탄스러운 한국 교육 현실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들입니다. 수능이 끝나도 고등학교 교육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끝이 아니지만, 수능을 마친 고3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대다수의 학교가 단축수업을 실시하며 그마저도 수업을 안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무단 결석생이나 무단 조퇴생이 대거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고3들의 잉여스러움에 대한 지적이 여러 분야에서 터져나오면서 학교 차원에서 문화탐방을 하거나 영화관람을 하는 등의 다양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뻘짓이나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수능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수능 이후에도 적성검사, 논술, 면접 등 각종 '시험'들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수험생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의 수많은 아해들을 포함한 70만 수험생들은 그딴 건 나중에나 신경 쓸 문제라며 일단은 노는 것이 지상과제인 양 행동을 합니다.






거센 바람을 등지고 인생의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선 고3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수능 채점지를 손에 쥐고 울고 있나요? 앞으로의 일들은 나 몰라라 뒤로하고 잠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나요? 그대들에게 고합니다. 훌훌 털고 당장 떠날 것을요. 지금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을 탈출할 기회는 남은 일생 동안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곧 있을 점수발표에 연연해 반 답답함과 반 홀가분함으로 어영부영 날짜를 세고 있기엔, 피시방이나 당구장, 노래방에 갇혀 소비적인 문화에 집착하며 또 다른 쳇바퀴를 돌고 있기엔, 고3의 피 끓는 청춘과 두 달 남짓 남은 학창시절의 추억거리가 아깝지 않은가요.







 

물론 일상을 탈출한 뒤에 즐기는 시간들이 일상에서의 그것과 똑같다면 곤란합니다. 그동안 묶여있고 매여 있었던 이 도시를 떠나 넓은 대자연을 앞에 두고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골똘히,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삶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어른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받던 보호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할 결정들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부모님, 선생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은 듣되, 자신의 생각과 그분들의 생각이 다르거든 자신의 생각대로 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른들 말씀 들어 나쁠 건 없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어른들의 말씀대로만 행동할 것은 아니지 않나요. 이미 여러분들은 20년 가까이 말 잘 듣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기대에 맞춰드렸으니 이제부터는 그들의 기대를 조금씩 거부해보길 권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자라는 것입니다.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진 자기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권합니다.




 






독립은 자신이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독립하길 권합니다. 20년 동안 부모님 아래에서 먹고 자고 다 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해나가야 합니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그 돈을 전부 벌 수는 없지만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를 바랍니다. 기숙사비든, 하숙비든, 자기만의 공간은 자기 돈으로 시작해 채워나갈 것을 권합니다. 과외도 좋고 알바도 좋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게 되면 정신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입니다.





 

꿈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토익점수를 높이고 어학연수를 가고 스펙을 쌓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꿈이 아니라 목표입니다. 여러분 말고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미 무리의 병정개미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말하는 꿈은, 정말 대책 없어 보일 만큼 낭만적인 그런 꿈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 행복의 총량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차별 없고 부조리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이런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아주 조금 움직일 수도 있는 그런 초대형의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노 요코가 말했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요.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슴에 간직하고 끊임없이 꿈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저는 우리 소중한 고3 학생들이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년 동안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세상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