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9. 18:57

지난 주부터 수시모집 원서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요일에 접수가 마감된 학교도 있고, 아직 접수 중인 학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학교도 평소보다 분위기가 다소 뒤숭숭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 같고, 그동안 SNS 세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학생들도 지난 주만큼은 잠수를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살기 참 힘들지요. 고2 겨울방학도 힘들고, 3월부터는 더 힘들고, 6월 모평과 9월 모평을 거치며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다가 9월 모평마저 끝난 이 시기는 수험생들의 마음이 들뜨기도, 해이해지기도, 포기를 하기에도 좋은 시기입니다.



원서를 쓰고 나면 마음이 참 거시기합니다. 이미 절반쯤은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붙은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기고, 괜히 돈만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듭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던 일주일이었을 겁니다.



지난 몇 달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왔는데, 자기소개서를 쓰고 추천서를 받다보면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수험생활이 끝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감상에 젖기도 할 테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온 자신이 대견스러워 가슴이 뭉클하기도 할 겁니다.



근 일 년 가량을 정해진 계획에 딱딱 맞추어 공부해왔는데, 요 며칠 간은 자소서를 쓰느라 생활리듬도 바뀌었을테고, 그 때문에 공부패턴에도 변화가 왔을 겁니다. 어영부영하다보니 일주일이 슝 날아가버린 기분일 테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가 쉽지도 않을 겁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우리나라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가장 밀집하여 사는 곳이 서울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신림동 고시촌(서울특별시 관악구 대학동)입니다. 사시, 행시, 외시는 물론이고 공인회계사, 감정평가사, 변리사 등 다양한 전문직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PC방이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학동'이라는 단일 동에만 300개가 넘는 PC방이 있다고 하니, 더이상 할 말이 없지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시험날짜가 가까워올수록 PC방에는 점점 더 손님이 꽉꽉 찬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잊기 위해,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올해는 안 될 것 같으니 내년을 기약하자는 자기합리화를 거쳐, PC방 자리는 점점 부족해집니다.



고3 수험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9월, 10월, 11월이 될수록 다들 점점 더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지만, 아예 놓아버리는 친구들도 상당히 많이 생깁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안 오른다며, 이젠 정말 지친다며, 책과 연필을 놓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납니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수험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42.195km의 마라톤 중, 41km 지점을 달리고 있습니다. 1km만 더 가면 트랙이 놓인 운동장이 있고, 수많은 관중들이 환호를 보내는 운동장 안에서의 195미터는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가장 힘든 시기가 앞으로 남은 1km이며, 시간으로 따지면 한달 반 가량입니다.



고3 여러분.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막바지 힘을 다해주세요. 수시는 로또 긁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정시는 월급 타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동요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시모집을 대해주세요. 수시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입학사정관제가 생기고 논술을 보고 면접을 보고 다른 그 무엇이 더 생기더라도, 90% 이상의 전형에서 최종 관문은 수능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수시가 70%이고 정시가 30%라지만, 대부분의 수시모집에는 최저등급이 있습니다. 대학 정원의 70%를 차지하는 수시에서 다시 70%를 차지하는 것이 논술전형이며, 논술전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논술이 아니라 수능성적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논술전형에서도 또다시 70%가 우선선발이며, 우선선발에서 수능성적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내신성적이 페넌트레이스라면, 수능성적은 한국시리즈 7차전과도 같습니다. 차곡차곡 쌓아오고 준비해온 내신성적은 사라지지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생활기록부 보존 연한이 졸업 후 70년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세상을 떠날지, 생기부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는 대충 감이 올 겁니다.



하지만 수능은 다릅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그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모의고사 성적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도 없이 단 한 번의 한국시리즈 7차전으로 우승팀을 가리는 겁니다. 어찌 보면 잔인한 제도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아주 매력적인 제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곳곳에 불합리가 산재해있으며, 때로는 부조리가 정의와 원칙을 이기기도 합니다. 대학 입시 또한 평등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재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학생의 성적이 상당 부분 좌우됩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누구는 처음부터 출발하고, 누구는 20m 지점에서 출발하며, 어떤 누구는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불평등한 세계 안에 있는 여러 경쟁 중 가장 공정한 경쟁이 수능시험입니다. 전국의 모든 동년배들과 한날 한시에 같은 기준으로 동시에 경쟁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적이 앞으로의 인생 중 많은 부분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경쟁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꿈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여러분은 그 꿈과 이상에 어울리게 노력해왔으며, 그것을 꿈꿀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들뜨지 말고, 늘 하던 그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잘 마무리해주세요.



응원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6. 20. 11:09

K고등학교의 지난해 학생회장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습니다. 기호 1번과 기호2번의 지지율이 거의 똑같았거든요. 방송반에서 한 반을 골라 여론조사를 해봤는데, 표차이가 한 표밖에 차이가 안 났을 정도니까요.


그전까지 당연히 당선될 거라 믿었던 기호1번은 다급해졌어요. 게다가 후보토론회를 무지막지하게 망쳤거든요.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함에 기호1번은 절친한 사이인 현 학생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현 학생회장은 기호2번이 죽도록 싫었기에, 기호1번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놓고 조작하기엔 학생들이 예전만큼 멍청하지 않기에, 학교 홈페이지에 익명의 비난글을 올리기로 했어요.

악플놀이가 절정에 달했던 투표 3일전, 학교 앞 pc방에서 악플을 달던 현 학생회 임원은 기호2번의 친구에게 현장을 들키고 말았어요. 학생회 임원은 퇴학을 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pc방 문을 모두 걸어잠갔어요. 기호2번쪽 학생들이 pc방 문을 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어요.

pc방 문은 학생회 임원이 스스로 닫았는데, 기호1번 쪽에서는 기호2번이 학생회 임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설상가상으로 학교신문까지 기호1번의 주장을 대서 특필하며 기호2번측을 비판했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학생자치법정이 열렸어요. 자치법정 위원들은 학생회 임원의 악플 작성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컴퓨터를 확인하려 했죠. 근데 아뿔싸. 갑자기 선생님들이 나서서 조사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선생님들의 방해에 아무 것도 조사하지 못한 학생회장 선거 전날, 야자 2교시에 갑자기 전체조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강당에 모인 전교생에게 발표를 했습니다. 기호 1번측에서는 악플을 단 적이 없다고요.

그렇게 투표 당일이 되었고, 개표결과 기호1번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기호1번은 1년을 함께 살아갈 학생회 임원들을 여럿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게 웬걸. 임명된 학생들의 이력이 아주 화려하네요. 상습적인 지각이나 교내 흡연은 오히려 애교였어요. 금품갈취에 집단폭행에 성폭력 가해자까지 있었어요.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죠.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올해 6월,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양심고백을 한 것이죠. 기호1번이 악플을 달았지만, 사건을 덮기로 했다고요. 알고보니 기호1번은 19년 동안 학교를 쥐락펴락 했던 옛 교장선생님의 손자였고, 그분의 제자들과 친인척들이 학교 선생님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거였어요.

K고등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난리가 나고 뒤집어졌다고요? 천만에요.

1등급 맞는 애들은 그래도 생각이 있는 건지 운동장에 모여 데모를 했어요. 2등급 맞는 애들은 할까말까 눈치를 보는 중이예요.

나머지는 뭐하냐고요? 학교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애랑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애랑 사귄다는 소문에 들떠서 학생회장 부정선거에는 관심도 없어요. 우리가 데모한다고 뭐가 바뀌겠어? 라고 말하며 기말고사 공부나 열심히 하겠대요.

이 학교, 정상인가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5. 1. 16:01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다.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이런 날이 다가올 때면 괜히 마음이 찡하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싸우다 간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의 소중한 부모이고 자식이었을 테지만, 더 큰 가치를 위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사람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씩 발전해온 것이 아닐까. 나처럼 제 한 몸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 가장 큰 가치인 범인들만 있었다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절, 노동절에 면사무소가 쉬지 않냐고 직원에게 물어봤다가 보기 좋게 비웃음을 샀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근로자의 날에는 근로자가 쉬는 거 아니냐고. 공무원이 무슨 근로자의 날에 쉬겠냐고.

'근로자'는 매우 좋지 못한 어휘다. 일제 치하였던 1923년, 한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5월 1일에 조선노동총연맹에 의해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가 치러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강했기에 당시 위정자들의 입맛과는 맞지 않았고, 분단 이후에는 북한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게 되자 의식적으로 사용을 배제하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군사정권에서 '노동'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이 되었고, 이후 '노동자'를 대체하는 말로 '근로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말이지만, '근로자의 날'은 '노동절'과는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 19세기부터 5월 1일을 기념했던 노동절과는 달리, 애초 근로자의 날은 3월 10일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과 기념일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날짜를 바꾸었고, 자신이 총재를 지냈던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날짜를 5월 1일로 되돌리긴 했지만, 명칭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로 남아있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의미 또한 많이 퇴색되었다.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했던 본래의 의미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현재 '근로자의 날'은 사용자들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포상데이, 합법적인 휴무일(그조차도 비정규직은 출근하지만) 정도로 변해버렸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라는 말은 못 배운 자, 사회적 약자, 피착취자의 의미를 상당 부분 내포한다. 단어의 범주 또한 민간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그것도 블루칼라의 노동자에게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친절한 네이버 백과사전은 <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노동력을 판매하여 얻은 임금을 가지고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직업의 종류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라면 누구나 노동자다. 공무원도 노동자요, 교사도 노동자이며, 군인도 노동자다. 그러나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고귀한 '선생님'을 노동자 취급한다며, '공직사회'를 격하시키는 행동이라며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노동자'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다. 비인간적인 금력과 권력으로 타인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불로소득을 얻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성실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야 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가.





노동절의 역사가 12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무노조 경영'을 '일류경영'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노조 경영 원칙은 그 회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동종업체보다 월등히 좋을 경우에만 한시적으로 가능(불만 잠재우기의 가능)한 것이다. 삼성은 언제까지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노조 결성을 시도하는 직원에게 위치추적기를 붙이고 무노조 경영 외에는 별다른 경영철학이 없어보이는 회장님이지만, 그 회장님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이 비루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선지도 한참이 지난 2013년 현재, 127년 전의 외침인 줄 알았던 '8시간 노동 쟁취! 노조 인정!'과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구조적 실업이 만연하며 일자리를 얻고자 싸우는 사람들이 한 편에 있고, 일자리는 얻었으나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다른 편에 있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노동의 확산, 구조적 빈곤은 이제 국가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단기 이윤만을 쫓아 모든 삶터를 파괴하는 자본의 야만과 탐욕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귀결되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일방적으로 임금단체협상을 부정하는 부당노동행위를 일삼고 있으며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전근대적 노무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노사 자율로 충분히 합의 가능한 노조 전임자 임금을 정부가 직접 간섭해 노조 활동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절을 노사 화합의 장 정도로 생각하는 정부와 고매한 어르신들도 문제다. 당신네들께서 스스로 만들어주시고 쌓아두신 노동 관련 악법과 현안이 몇 개인데,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편히 쉬라며 어깨 토닥이는 꼴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근로자라는 이름보다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한 사람 한 사람이 흘리는 피와 땀이 자체의 의미로서 존중될 수 있는, 오늘만큼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일 수 있는 그러한 날이 되길. 잠시 고개를 숙이며. 묵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5. 13:38

스물여덟의 내가 들은영화, <청춘스케치-Reality Bites>

 

 

 

 

<청춘스케치>는 영문의 원제가 더 어울립니다. Reality Bites, 현실이 아직은 창창한 청춘인 나를 전부 삼켜 버리기 전에 한번쯤은 보아야 할 영화, 들어야 할 음악을 소개하고 싶네요. 청춘영화라 하면, 으레 손가락 끝의 작은 움직임을 담아내는 맑은 멜로디부터 고막을 최대한으로 자극하여 모든 일을 잊도록 만드는 강렬한 울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음악이 질펀하게 깔리기 마련이죠. <청춘스케치>OST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곡들 또한 젊은이들의 눈물, 웃음, 수다, 그리고 그 맑은 젊음과 닮아있습니다

 

 

 

 

 

#.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The Knack<My Sharona>

 

<청춘스케치> OST의 첫 번째 트랙은 팝 역사상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곡이라 할 수 있는 The Knack<My Sharona>입니다. 리레이나, 트로이, 비키, 새미는 리레이나 아빠가 건네 준 주유소 신용카드 한 장 달랑 들고 편의점으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두 손을 가득 채우도록 고른 콜라 캔과 프링글스를 계산대에 내려놓는 순간, 그들의 귀에는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오죠. “볼륨 좀 높여주실래요?” 비키를 필두로 리레이나, 새미의 흥겨운 막춤이 시작됩니다. 편의점 주인아저씨의 난감한 표정과 트로이의 뻘쭘한 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세 청춘의 발랄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면입니다. 한밤 중 주유소 옆 편의점은, 돈은 좀 없을지라도 Feel만큼은 충만한 청춘들과 <My Sharona>로 번쩍번쩍 빛이 나죠. 이 곡은 1979년 빌보드 차트 정상을 6주 동안이나 차지했던 인기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he Knack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리드보컬인 Doug Fieger는 이 곡을 통해 그가 실제로 좋아했던 Sharona와 맺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도 소중한 명곡임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겠죠?

 

 

 

 

#. 행복한 첫 데이트의 느낌, 피터 프램톤의 <Baby, I love your way>

 

마이클은 프램톤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이야기하고 리레이나는 비타민음료 예찬론을 늘어놓습니다. 첫 데이트치고는 조금 황당한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닮은 구석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커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거겠죠. 그러다 둘은 별을 보는 천문학을 좋아하지만 수학은 젬병인 공통점을 찾게 되고 깔깔대며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별빛처럼 빛나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요. 그 간질간질하면서도 달달한 장면을 메우는 사운드 트랙은 바로 피터 프램톤의 <Baby, I love your way>. 영화에는 느릿하게 귀 끝에 맴도는 프램톤의 원곡이 들어가 있으나 OST에는 조금 더 리드미컬한 빅 마운틴의 곡이 실려 있습니다. 오리지널 곡도 함께 실려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빅 마운틴의 <Baby, I love your way>도 레게 버전다운 펑키한 그루브에 큰 인기를 끌어 원곡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어요.

 

 

 

 

#.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Lisa Loeb<Stay (I missed you)>

 

사랑이란 것은 이미 그 자체로도 어렵습니다. 사랑과 우정의 위태로운 경계에 선 두 친구의 이야기, <청춘스케치>는 젊은 날 겪게 되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편린들을 소박하고 솔직하게 담아냅니다. 몇 번이나 엇갈리기만 했던 트로이와 리레이나가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때, 관객들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걸립니다. 그렇게 기쁘면서도 조금은 어설프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해피엔딩으로 대미를 장식한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곡은 Lisa Loeb<Stay>. 맑고 촉촉한 Lisa Loeb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이 곡은 그녀의 친구인 에단 호크의 추천으로 영화작업 후반부에 겨우 삽입되었지만 음반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럭키 트랙이라고 해요.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Stay>는 마치 리레이나가 트로이에게 속삭이듯이 사랑스럽습니다.

 

 

 

 

1994년 작인 <청춘스케치>는 어느덧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그 음악은, 2012년 우리의 얼굴, 우리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닮아있어요.

 

청춘스케치 OSTU2, 레니 크라비츠, 줄리아나 햇필드, 스퀴즈, 그리고 에단 호크까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목소리들이 뒤섞여 있지만, 영화 속 각자의 자리를 빛내며 함께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노래합니다. 이것저것 뒤섞여 정신없어도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젊음이기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 , 나 그리고 5달러라는 그들은 그저 아름답습니다, 반짝반짝 빛납니다.

 

 

 

 

프랑스 한 소설가는 만일 내가 신이었다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해요. <청춘스케치>를 두고두고 보고 싶고 그 OST를 두고두고 듣고 싶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겠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0. 08:27



복도를 다니다보면 장난치는 남자 아이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노는 행동이란 대략 뻔해서, A가 B의 뒤통수를 갈기고 도망가면 B가 A를 뒤쫓아가는 식이다.


어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학년 남자 아이 한 명이 다른 아이를 한 대 때리고 도망가는데, 맞은 아이가 때린 아이를 뒤쫓아가면서 외쳤다.

<야이 장애인아!>

비단 그 아이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이 '장애인'이라는 말을 욕처럼 쓰고 있다. 10대 남학생들에게서는 보편적인 언어생활로 자리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뒤쫓아가 잡아와서 다신 그런 말 못 쓰도록 혼내주려다 말았는데, 들을 때마다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 흑인, 장애인 등 사회 곳곳에는 차별 받는 약자들이 많다. 황인종 남성인 나는 여성이 될 수도, 흑인이 될 수도 없지만 오늘 당장 장애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럼 의미에서 <비장애인>을 <예비장애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꾸준한 노력으로 <불구자>라는 말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이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장애인>과 <정상인>이라는 폭력적인 대립어 대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정상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계는 느껴진다. 특히 꼬꼬마 녀석들을 중심으로. 다음에 또 그런 말을 쓰는 놈 발견하면 허리를 접어버려야겠다.

최근 <장애인>을 <장애우>라 칭하는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동안 격리되어 왔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리되었던 <장애인>을 친근하게 여기기 위한 노력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우>라는 말은 지극히 <비장애인>적 시각에서 만든 말이므로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회집단을 칭하는 개념어는 1인칭, 2인칭, 3인칭 모두가 가능하다. <노동자>나 <여성>을 예로 들 경우,

나는 노동자이다.
너는 노동자이다.
그는 노동자이다.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애우>라는 말은 어떤가.

나는 장애우이다.
너는 장애우이다.
그는 장애우이다.

나는 장애우이다? 우리는 장애우이다? 

'우(友)'라는 말은 타인이 나(장애인)를 지칭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 자신 스스로를 가리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가리킬 때만 쓸 수 있는 표현인 것이며,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장애인을 철저하게 타자화한 말이다. 때문에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장애인을 나타낼 수도 없다.

장애우라는 말은 그 용법에도 제약이 따른다. <우리 아버지는 장애우이시다> <우리 선생님은 장애우이시다>와 같은 표현들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친근함'을 부여하기 위해 <장애우>라는 말을 만들었다지만, 사실 잘못된 것은 <장애인>이라는 지칭어가 아니라 장애인을 친근하지 않게 여기는 비장애인들의 편견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앞으로는 친구라 부를 테니 친하게 지내자는 관념 또한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구성된 오만방자한 발상이 아닌가.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한다. 해마다 이날에는 각종 행사나 이벤트, 선물공세 등이 많이도 벌어진다. 주무 부처에서 행사의 의미와 시행방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농민의 날이나 임산부의 날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듯, 장애인 또한 배려나 시혜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동등한 개인, 평등한 주체로서의 인식이 확대되는 날이기를 바란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5. 15:05

 

 

 

로맨스 영화의 미덕은 '공감'에 있다.

 

'건축학개론'처럼 아련한 첫 사랑의 기억이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헷갈리는 관계든,
'세렌디피티'처럼 운명적인 만남이든
'연애의 온도'처럼 이별과 만남의 반복이든.

 

사내커플이 주인공인 익숙한 사랑 이야기든,
뱀파이어와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든


모든 로맨스는 결국 설레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상대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이 짓는 표정, 한 마디의 대사,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면 한 컷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쉽게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영화가 지닌 프레임을 지워버리고
그 안으로 내가 포섭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영화를 밝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로맨스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5. 11:10



나는 초보 교사다.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으며, 경력은 이제 갓 3년을 넘었다.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른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매순간이 시행착오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기에, 나의 ‘교직’은 매일이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 여기저기 참고서를 보고 자료를 모아 수업시간에 나누어주는 것, 그런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조리와 불합리는 도처에 있다. 잘못된 정책과 제도는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나를 곤란하게 한다. 이때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불의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자라게 키운다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으로 자랄까?


타 교과에 비해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딴 소리의 자율성’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다 노동을 이야기하고, 저항시인의 시를 다루다 친일잔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국어교사가 가진 특권이다. 일반적으로 이 특권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때로는 어깨를 무겁게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노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켄타우로스는 교실 곳곳에 엎드려 망상의 늪을 허우적댄다.


존재를 배반하는 현실에서 <고장난 거대기업(양철북)>은 의의를 지닌다. 12개의 장은 현대자동차, 나이키, 스타벅스, 코카콜라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상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이며, 늘 가까운 곳에서 선망했던 기업들이기에 책을 여는 손놀림은 가볍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무거워진 손놀림과 몸을 떠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거대기업이 저지른 과오와 횡포,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처는 분노를 가지기에 충분하다. 진실을 모른 채 속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격과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기존의 기대와 질서를 배반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자주적인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실이 실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때,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존재에 대해 회의할 것이며,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도 이 책이 지닌 커다란 장점이다. 현실이 척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거세당한 채 자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굴복한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훈계한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좀 더 현명한 어른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아이들을 설득한다. ‘현실이 잘못된 것은 맞지만, 지금 이렇게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높은 위치에 올라간 뒤 바꾸면 되는 거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하청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느 존귀한 어르신의 결단 덕분은 아니었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를 착취의 대명사로 만들어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낸 것도, 오만한 스타벅스로부터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높은 위치에 올라가 룰을 바꾼 개인의 역량은 아니었다.


나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지만, 힘을 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의미 있다는 것. 무한경쟁사회에서 연대가 왜 필요한지를 체득하게 하는 것. 그것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고픈 이들에게, 연대과 공존의 사유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장난 거대기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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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2. 21. 17:10

 

 

 

워커홀릭은 아니다.

나는 일에 파묻혀 사는 부류의 사람이 못 된다.

 

나는 놀고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은 사람,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것도 즐기는 사람.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있는 것도 해볼만 한 사람,

나는 가만히 있어도 좋은 사람

 

하지만 이게 잘못된 걸까?

 

난 워커홀릭이 아니어도 된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아아, 정말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2. 19. 11:12




제 나이는 만 28세입니다. 투표는 지금까지 네 번 해봤고, 오늘 생애 다섯 번째 투표를 했습니다. 경건하고 감사한 자세로 임해야 할 이 날에, 어디로 놀러갈지를 의논하는 주변의 또래들이 눈에 띄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6년 전, 공익요원이었던 저는 지방선거의 투표도우미를 했었습니다. 6시부터 12시까지 투표소를 지키는 것이 제 임무였는데, 5시도 되기 전부터 수많은 어르신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반면 6시간 동안 투표소를 찾은 20대는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뽑힌 국민의 대표를, 중장년층만이 지지한 국민의 대표를, 진정 국민의 대표라 할 수 있을까요.

정치에는 관심 없다며 그놈이 그놈이라며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에게 고합니다. 좌파든 우파든 되길 바란다고요.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무파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결코 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요.

최저임금을 보장해주지 않는 아르바이트 고용주. 높은 이율을 요구하는 학자금 대출. 좀처럼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들. 아마도 88만원 세대로,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우리 20대 청년들은 자신이 겪는 불합리에는 치를 떨면서, 왜 더 큰 부조리에는 분노하지 못할까요.

내가 던지는 한 표가 무슨 힘이 있겠냐며 자조하지 마세요.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이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고, 국민의 주권을 실현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거룩한 행위입니다. 온갖 비리와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정치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유권자의 표심뿐이니까요.

3.3cm의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종이 쪼가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왔는지를 아십니까. 그분들의 넋과 노고를 기린다면 감히 귀찮아. 놀러갈래. 따위의 말로 투표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불과 50년 전 남아공에서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투표권을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공권력이 발포를 하는 대학살이 일어났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팔십년 광주의 오월항쟁도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박탈당한 투표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60년의 4.19혁명도, 87년의 유월 항쟁도, 이 모든 것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투표권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진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사람은 1인 1투표권을 갖습니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평등하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투표권입니다.

미성년자는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주지 않듯, 성숙한 인간, 완전한 인간이라는 가정 하에 우리는 투표권을 받습니다. 2012년 12월 19일은 ‘나’라는 한 인간이 인격체로서 인정을 받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스스로가 미숙아라는 것을 증명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투표하는 젊은이가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정치인이 무슨 삽질을 하더라도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1. 9. 10:44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정말 고생하셨고, 당분간은 푹 쉬면서 여유도 만끽하길 바랍니다.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내진 마시고, 가치 있게 잘 쓰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시절 쯤 얘기일까요. 대입 시험 전국 수석이 불문과와 물리학과에 진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것은 곧 법학과와 의예과로 바뀌었고, 현재에는 경영학과와 의예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의 투덜거림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취업난이 시작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등록금은 연 천만원을 호가하고, 빚을 지는 대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인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경영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이제 사실상 취업전문기술학교로 변했습니다. 새내기 때부터 '공부'가 아닌 '학점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공모전에 참가하고, 자비를 들여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스펙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 평가받고, 취업을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되지만, 대학이 취업학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모습을 띠는데 일조하게 된 개인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대신 밥벌이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화된 분야(의학, 법학, 공학 등)가 아닌 이상 인문계열과 사회과학계열의 학생들이 전공을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입사 원서 기준에 상경계열이 버젓이 적혀 있는 경영불패의 현실, 토익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영어광풍의 현실,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일어설 수 없는 무한경쟁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한 개인이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을 위해 바친다고 해서 그 개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개개인을 탓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없고 바람직하며 우리가 그것에 대해 눈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물질욕과 소비욕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은 대학 말고도 많습니다. 인생 선배로 살아온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들여다 봐도 몇십 년 후에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군집은 출신 대학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착하고 선량한 많은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양 알고 있습니다.

 

물론 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에 비해 대학에 가게 되면 유예기간이 연장되고, 학내 분위기에 맞춰가다 보면 고졸 취업자에 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합니다. 명문대에 들어간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혜택을 보기도 합니다. 적당히 놀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며, 선택할 수 있는 길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한정해 주기 때문에 안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4개월 뒤면 여러분도 대학생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본인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대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난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요.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기업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곳,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전초과정을 밟는 곳으로 착각합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기업의 입맛에 맞추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업들은 창의적인 인재, 능동적인 인재,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인재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대학생 인재란 대부분 인력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찌보면 일회용품에 비견될 지 모르는 이 인력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학교들이 많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기업에 얼마나 취업했는가가 대학의 성적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공부하는 대표적인 학문인 경영학 전공에 토익 만점을 받는 것 말고는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대학은 학문의 장입니다. 그것도 넓디 넓은 광장입니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학은 끊임없이 심연을 채우고, 그 위에 튼튼한 토대를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만큼이나, 인간의 관심은 전방위적이고 그 깊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안정적인 토대는 사실 대학이라는 곳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런 곳을 단지 실용이란 명목 하에 기업 군대의 이병 양성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학문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용적 자세가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학문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닭장과도 같은 좁디 좁은 교실에서 12년간 갇혀 살았습니다. 욕망을 거세당한 채,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하며, 오로지 대학만을 바라보며 꼭두각시처럼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학에 오면 갑자기 탄성한계를 넘어버린 용수철 마냥 맥이 탁 풀려버립니다. 대학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정한 학습형태를 강요하지도 않고, 일정한 학문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선택의 다양함이라는 자유의 본질적인 특성이 구현됩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12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년 동안 선택과 판단, 그리고  책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일단 매우 난감하게 느껴지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처음으로 접하는 판타스틱한 상황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다시 시류에 휩쓸려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서야 닥쳤는데, 해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그 거룩한 기업이 원하는 인력으로 만들어 버리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닐까요. 대학을 가는 이유가 좋은 직장,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너무 허무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대학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합대학 같은 경우에는 정말 수많은 교수들이 있고, 학과가 있고, 강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끌리는 수업을 찾아가서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학습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학에는 수학의 정석 같은 바이블이 없습니다. 배울 것도 전방위적이지만, 배우는 방법도 전방위적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은 언제나 책과 씨름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씨름을 하며, 끊임없이 교수들과 피드백을 갖고, 그것을 현실에 비추어 보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딩 때 참고서를 외우듯이 대학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점점 고도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학부생 수준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학 공부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 말이 학과공부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님은 다들 이해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굳이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즉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학에서 필히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확실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은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고하느냐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상황에서 판단을 하려면 사고가 깊어야 하고, 사고가 깊으려면 몸과 머리로 많이 섭취하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또한 주체적으로 판단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고를 어떻게 하면 깊게 하고, 자신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따위의 문제는 부단히 의심하고 생각하며,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보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으며, 기껏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업 군대의 이병이 되는 것이며, 피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기업 군대의 이병 되었더니 상병 꺾이기도 전에 강제 전역을 당해야 하며, 강제 전역을 당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기업의 이병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을까요.

 

이것은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으로 환원해서 생각한다고 해결책이 찾아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것을 당연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지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갚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한테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대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이야기 하고, 많이 듣는 것, 무엇보다 많이 생각하는 것이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린 자세로 세상을 대하되,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확고히 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다면, 감히 성공한 대학생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자, 대학생이 될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