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5. 13:38

스물여덟의 내가 들은영화, <청춘스케치-Reality Bites>

 

 

 

 

<청춘스케치>는 영문의 원제가 더 어울립니다. Reality Bites, 현실이 아직은 창창한 청춘인 나를 전부 삼켜 버리기 전에 한번쯤은 보아야 할 영화, 들어야 할 음악을 소개하고 싶네요. 청춘영화라 하면, 으레 손가락 끝의 작은 움직임을 담아내는 맑은 멜로디부터 고막을 최대한으로 자극하여 모든 일을 잊도록 만드는 강렬한 울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음악이 질펀하게 깔리기 마련이죠. <청춘스케치>OST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곡들 또한 젊은이들의 눈물, 웃음, 수다, 그리고 그 맑은 젊음과 닮아있습니다

 

 

 

 

 

#.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The Knack<My Sharona>

 

<청춘스케치> OST의 첫 번째 트랙은 팝 역사상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곡이라 할 수 있는 The Knack<My Sharona>입니다. 리레이나, 트로이, 비키, 새미는 리레이나 아빠가 건네 준 주유소 신용카드 한 장 달랑 들고 편의점으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두 손을 가득 채우도록 고른 콜라 캔과 프링글스를 계산대에 내려놓는 순간, 그들의 귀에는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오죠. “볼륨 좀 높여주실래요?” 비키를 필두로 리레이나, 새미의 흥겨운 막춤이 시작됩니다. 편의점 주인아저씨의 난감한 표정과 트로이의 뻘쭘한 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세 청춘의 발랄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면입니다. 한밤 중 주유소 옆 편의점은, 돈은 좀 없을지라도 Feel만큼은 충만한 청춘들과 <My Sharona>로 번쩍번쩍 빛이 나죠. 이 곡은 1979년 빌보드 차트 정상을 6주 동안이나 차지했던 인기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he Knack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리드보컬인 Doug Fieger는 이 곡을 통해 그가 실제로 좋아했던 Sharona와 맺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도 소중한 명곡임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겠죠?

 

 

 

 

#. 행복한 첫 데이트의 느낌, 피터 프램톤의 <Baby, I love your way>

 

마이클은 프램톤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이야기하고 리레이나는 비타민음료 예찬론을 늘어놓습니다. 첫 데이트치고는 조금 황당한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닮은 구석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커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거겠죠. 그러다 둘은 별을 보는 천문학을 좋아하지만 수학은 젬병인 공통점을 찾게 되고 깔깔대며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별빛처럼 빛나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요. 그 간질간질하면서도 달달한 장면을 메우는 사운드 트랙은 바로 피터 프램톤의 <Baby, I love your way>. 영화에는 느릿하게 귀 끝에 맴도는 프램톤의 원곡이 들어가 있으나 OST에는 조금 더 리드미컬한 빅 마운틴의 곡이 실려 있습니다. 오리지널 곡도 함께 실려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빅 마운틴의 <Baby, I love your way>도 레게 버전다운 펑키한 그루브에 큰 인기를 끌어 원곡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어요.

 

 

 

 

#.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Lisa Loeb<Stay (I missed you)>

 

사랑이란 것은 이미 그 자체로도 어렵습니다. 사랑과 우정의 위태로운 경계에 선 두 친구의 이야기, <청춘스케치>는 젊은 날 겪게 되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편린들을 소박하고 솔직하게 담아냅니다. 몇 번이나 엇갈리기만 했던 트로이와 리레이나가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때, 관객들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걸립니다. 그렇게 기쁘면서도 조금은 어설프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해피엔딩으로 대미를 장식한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곡은 Lisa Loeb<Stay>. 맑고 촉촉한 Lisa Loeb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이 곡은 그녀의 친구인 에단 호크의 추천으로 영화작업 후반부에 겨우 삽입되었지만 음반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럭키 트랙이라고 해요.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Stay>는 마치 리레이나가 트로이에게 속삭이듯이 사랑스럽습니다.

 

 

 

 

1994년 작인 <청춘스케치>는 어느덧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그 음악은, 2012년 우리의 얼굴, 우리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닮아있어요.

 

청춘스케치 OSTU2, 레니 크라비츠, 줄리아나 햇필드, 스퀴즈, 그리고 에단 호크까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목소리들이 뒤섞여 있지만, 영화 속 각자의 자리를 빛내며 함께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노래합니다. 이것저것 뒤섞여 정신없어도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젊음이기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 , 나 그리고 5달러라는 그들은 그저 아름답습니다, 반짝반짝 빛납니다.

 

 

 

 

프랑스 한 소설가는 만일 내가 신이었다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해요. <청춘스케치>를 두고두고 보고 싶고 그 OST를 두고두고 듣고 싶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겠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0. 08:27



복도를 다니다보면 장난치는 남자 아이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노는 행동이란 대략 뻔해서, A가 B의 뒤통수를 갈기고 도망가면 B가 A를 뒤쫓아가는 식이다.


어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학년 남자 아이 한 명이 다른 아이를 한 대 때리고 도망가는데, 맞은 아이가 때린 아이를 뒤쫓아가면서 외쳤다.

<야이 장애인아!>

비단 그 아이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이 '장애인'이라는 말을 욕처럼 쓰고 있다. 10대 남학생들에게서는 보편적인 언어생활로 자리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뒤쫓아가 잡아와서 다신 그런 말 못 쓰도록 혼내주려다 말았는데, 들을 때마다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 흑인, 장애인 등 사회 곳곳에는 차별 받는 약자들이 많다. 황인종 남성인 나는 여성이 될 수도, 흑인이 될 수도 없지만 오늘 당장 장애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럼 의미에서 <비장애인>을 <예비장애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꾸준한 노력으로 <불구자>라는 말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이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장애인>과 <정상인>이라는 폭력적인 대립어 대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정상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계는 느껴진다. 특히 꼬꼬마 녀석들을 중심으로. 다음에 또 그런 말을 쓰는 놈 발견하면 허리를 접어버려야겠다.

최근 <장애인>을 <장애우>라 칭하는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동안 격리되어 왔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리되었던 <장애인>을 친근하게 여기기 위한 노력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우>라는 말은 지극히 <비장애인>적 시각에서 만든 말이므로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회집단을 칭하는 개념어는 1인칭, 2인칭, 3인칭 모두가 가능하다. <노동자>나 <여성>을 예로 들 경우,

나는 노동자이다.
너는 노동자이다.
그는 노동자이다.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애우>라는 말은 어떤가.

나는 장애우이다.
너는 장애우이다.
그는 장애우이다.

나는 장애우이다? 우리는 장애우이다? 

'우(友)'라는 말은 타인이 나(장애인)를 지칭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 자신 스스로를 가리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가리킬 때만 쓸 수 있는 표현인 것이며,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장애인을 철저하게 타자화한 말이다. 때문에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장애인을 나타낼 수도 없다.

장애우라는 말은 그 용법에도 제약이 따른다. <우리 아버지는 장애우이시다> <우리 선생님은 장애우이시다>와 같은 표현들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친근함'을 부여하기 위해 <장애우>라는 말을 만들었다지만, 사실 잘못된 것은 <장애인>이라는 지칭어가 아니라 장애인을 친근하지 않게 여기는 비장애인들의 편견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앞으로는 친구라 부를 테니 친하게 지내자는 관념 또한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구성된 오만방자한 발상이 아닌가.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한다. 해마다 이날에는 각종 행사나 이벤트, 선물공세 등이 많이도 벌어진다. 주무 부처에서 행사의 의미와 시행방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농민의 날이나 임산부의 날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듯, 장애인 또한 배려나 시혜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동등한 개인, 평등한 주체로서의 인식이 확대되는 날이기를 바란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5. 15:05

 

 

 

로맨스 영화의 미덕은 '공감'에 있다.

 

'건축학개론'처럼 아련한 첫 사랑의 기억이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헷갈리는 관계든,
'세렌디피티'처럼 운명적인 만남이든
'연애의 온도'처럼 이별과 만남의 반복이든.

 

사내커플이 주인공인 익숙한 사랑 이야기든,
뱀파이어와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든


모든 로맨스는 결국 설레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상대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이 짓는 표정, 한 마디의 대사,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면 한 컷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쉽게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영화가 지닌 프레임을 지워버리고
그 안으로 내가 포섭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영화를 밝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로맨스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5. 11:10



나는 초보 교사다.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으며, 경력은 이제 갓 3년을 넘었다.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른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매순간이 시행착오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기에, 나의 ‘교직’은 매일이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 여기저기 참고서를 보고 자료를 모아 수업시간에 나누어주는 것, 그런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조리와 불합리는 도처에 있다. 잘못된 정책과 제도는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나를 곤란하게 한다. 이때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불의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자라게 키운다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으로 자랄까?


타 교과에 비해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딴 소리의 자율성’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다 노동을 이야기하고, 저항시인의 시를 다루다 친일잔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국어교사가 가진 특권이다. 일반적으로 이 특권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때로는 어깨를 무겁게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노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켄타우로스는 교실 곳곳에 엎드려 망상의 늪을 허우적댄다.


존재를 배반하는 현실에서 <고장난 거대기업(양철북)>은 의의를 지닌다. 12개의 장은 현대자동차, 나이키, 스타벅스, 코카콜라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상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이며, 늘 가까운 곳에서 선망했던 기업들이기에 책을 여는 손놀림은 가볍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무거워진 손놀림과 몸을 떠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거대기업이 저지른 과오와 횡포,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처는 분노를 가지기에 충분하다. 진실을 모른 채 속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격과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기존의 기대와 질서를 배반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자주적인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실이 실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때,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존재에 대해 회의할 것이며,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도 이 책이 지닌 커다란 장점이다. 현실이 척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거세당한 채 자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굴복한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훈계한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좀 더 현명한 어른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아이들을 설득한다. ‘현실이 잘못된 것은 맞지만, 지금 이렇게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높은 위치에 올라간 뒤 바꾸면 되는 거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하청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느 존귀한 어르신의 결단 덕분은 아니었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를 착취의 대명사로 만들어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낸 것도, 오만한 스타벅스로부터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높은 위치에 올라가 룰을 바꾼 개인의 역량은 아니었다.


나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지만, 힘을 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의미 있다는 것. 무한경쟁사회에서 연대가 왜 필요한지를 체득하게 하는 것. 그것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고픈 이들에게, 연대과 공존의 사유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장난 거대기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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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