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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8.31 마왕, 이사카 코타로 6
2011. 10. 30. 09:30

 



제게 파란만장한 2학기를 선사했던 자기소개서 홍역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제 봐준 춘천교대 자기소개서를 끝으로 올해는 정말 빠이빠이입니다.


이제부터는 면접의 시즌입니다. 3학년 문과 면접지도 수업을 맡은 덕에 아이들은 제게 삼삼오오 몰려와 면접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알려줍니다. 정작 전 정시모집으로 대학에 입학했는데 말입니다.

 

안정을 원하는 시대 탓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의 적성이 그런 것인지,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교사를 지망하는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사범대를 지망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일반 대학에 가서 교직이수를 하고 싶다는 아이만 해도 3학년 전체에 30명 정도는 될 듯 싶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장난 반 떠보기 반으로 물어봅니다. 군필자 가산점에 찬성하냐고요. 백이면 백 모두가 찬성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에게 유리하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버리는 2년을 국가가 반드시 보상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남교사 할당제에 대해 물어봅니다. 처음에는 그게 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개념과 취지를 알려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신규 교원 임용을 할 때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었습니다. 결국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보수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로부터 엄청난 찬사와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남교사 할당제, 재미있습니다. 이 제도에 찬성하는 이들은 교육현장에서 남성의 비율이 턱없이 적으니 할당제를 통해 일정 비율 이상을 남교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올바른 성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입니다. 학교에 여선생님이 대부분이다보니 남자 아이들이 롤 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웃깁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 나오는 남성들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나 봅니다.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도 웃기고, '남성다움'이라든가 '여성다움'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성별만의 특징이 있다고 믿는 것도 웃깁니다. 우리는 '백인답다'라든가 '흑인답다'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묶을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인간을 규정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자답다' '여성스럽다'와 같은 말은 왜 자연스럽게 쓰일까요. 저는 음모론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남교사 할당제에 찬성하는 이들은 왜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있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까요? 골프장 캐디는요? 유흥업소의 여성들은요? 3교대 근무에 시달리는 간호사들은요? 왜 그 분야들에 대해서는 남성 할당제를 시행하자고 하지 않죠?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는데도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일선 학교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 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 온’ 분야입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제도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이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합니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합니까?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입니다. 7차 교육 과정을 도입하며 우리는 양성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햤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를 세우고, 교육 과정에서 아버지가 부재하는 현상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폭력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남교사 할당제의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의 시대입니다.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합니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할 때 만나는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교직의 여성성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왜 문제인지를 따져봐야합니다. 한쪽의 성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더도말고 딱 20년 전으로만 돌아가면 됩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교단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직의 남성화를 지적한 이가 있었던가요? 저는 84년생이라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아니오,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저 주도권을 빼앗긴 남성의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내가 짱을 먹어왔는데 한 군데에서는 열라 뺏기고 있으니 심통이 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을 키워내고 사회화하는 과정인데 이런 식으로 여성들에게 자리를 자꾸 내주다가는 남성 중심의 질서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신문사들이 여당 편이기에 대통령이 삽질을 해도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사회의 주요한 자리는 남성이 모두 차지하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직의 여성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여성이 교직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 좋은 직업입니다. 일도 별로 힘들지 않고 방학도 있고 야근은 드물고 칼퇴근 할 수도 있고 월급도 체불 없이 꼬박 나옵니다. 그렇지만 교직이 훌륭한 직업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몰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은 그만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몰리는 것입니다. 기업에서는 여성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자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관둘지 모른다고. 혹시라도 임신이라도 하고 출산이라도 하면 우리는 인력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환원하는 아주 부려먹기 편한 사고방식이 등장합니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해서 일을 관두는 여성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사회 여건을 탓해야 합니다. 여자라고 뭐가 좋아서 열달동안 배부르게 다니고 싶고 아이한테 매달려서 자아실현도 못하고 싶겠나요. 그렇게 말하는 회사 치고 사내에 놀이방 설치해주는 회사 본 적 없고, 여성한테 출산휴가랑 육아휴가 유급으로 팍팍 주는 곳 못봤습니다. 외국계 기업과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나마 교직은 이러한 차별이 적은 곳이기에 여성들이 교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교직의 여성화가 여성의 책임이고 개인의 책임인가요?

 

제가 노량진 임용 학원에 다닐 때 우리 강의실에 있던 120명의 수강생 중 남성은 고작 17명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시험을 보는 숫자가 이렇게나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열 번 양보해 응시인원의 문제를 따지지 않더라도, 정치학에서 말하는 양적소수자와 질적소수자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공은 인구 비율로만 따지면 흑인이 90%이고 백인이 10% 가량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부와 명예있는 직위는 백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당선이 전 세계 빅뉴스가 됐을 정도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세력들은 대부분 백인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양적소수자는 백인이지만, 질적소수자는 흑인이라고 말합니다. 교직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학교 현장을 찾아가보면 여성 교사가 훨씬 많다지만 교장과 교감 중 여성의 비율은 10%가 채 안 됩니다.

 

교직의 여성화를 지적하기에 앞서,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구조를 먼저 지적해야 합니다. 누구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생물학적인 성인데, 그것이 차별의 기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 실상 진상인가요. 단지 남성과 다른 염색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이너가 되어야만 하는 그들에게 교직의 여성화니 뭐니 하고 우려를 보내는 것은 배부른 투정이요, 헛된 기만입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학벌 없는'사람들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며 흥분합니다. 하지만 그 다른 목소리는 협상을 유도해내고, 공존을 지향합니다.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는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다른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밥그릇 투정 이상의 문제입니다. 그 밥그릇은 본래부터 온전히 남성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성들은 밥그릇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사리에 맞게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것이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라면 기꺼이 밥그릇을 공유하겠습니다. 전 훌륭한 교사이기 이전에 민주적이고 평등한 국가의 시민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31. 08:30
마왕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이사카 고타로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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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생각, 생각을 하자!

마왕, 무척이나 친숙한 제목이다. 제법 유명한 드라마에, 영화까지 다들 '원작소설인가?'란 생각을 해봄직하다. 초능력자인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야기와 독자의 상상력, 그것은 시각을 뛰어넘는다.

작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작가다. '젊은 천재'라 불릴 정도인데 제법 끄덕여질 정도. 게다가 대중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의 작품은 드라마,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를, 귀염둥이 에이타군과 서정적 매력이 돋보이는 마츠다 류헤이가 주연한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또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 원작이다.
                                      



1971년 일본 치바 현에서 태어나 도호쿠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이사카 코타로는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넘어, 인간과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해부하고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구조화하는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에 다섯번이나 노미네이트 됐으며, 두터운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인기 최고의 작가로, '러시 라이프', '사신 치바' 등의 유명한 전작이 있고 이 '마왕'이란 소설로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이끌어냈다. 법학도답게 헌법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통찰력에는 깊이가 있고, 유능한 작가답게 어려운 아젠다를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여담이지만, 네이버 작가소개를 보면 센다이시에 거주하며 집필활동 중이라던데, 이번 지진으로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라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아! 쓰다보니 또 서론이 너무 길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 사족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진다.

이제 소설을 제대로 살펴보자. 우선 주인공! 주인공은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로 평범해질 수 없는 형제. 주인공이 둘인 만큼, 이야기도 형 안도의 이야기인 '마왕''호흡'이란 제목의 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나뉜다. 사실 말이 '초'능력이지 사실, 두 형제의 초능력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슈퍼맨 같은 영웅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형 안도는 30보 정도의 거리를 두면 복화술이 가능하고, 동생 준야는 10분의 1 확률이 넘지 않으면 1로 만들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날, 안도는 TV에서 이누카이란 정치인을 보게 된다. 이누카이는 "5년 안에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내 목을 날려도 좋소!"라고 하고 사람들은 그의 묘한 자신감,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안도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지한 안도는 이누카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몇 년 후, 이누카이는 파격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그의 힘도 점점 커져간다. 그야말로 '마왕'이 되가고 있는 것이다.그 즈음, 동생 준야는 자신이 가진 초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마왕'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점령하려는 야욕의 정치가? 초능력자? 아니면 생각을 잃어가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기운일까? 이데올로기, 파시즘, 군중심리 모든 것이 거대한 회오리 속에 엉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사카 코타로는 맺음글에서 "파시즘이나 헌법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들은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품이나 장식품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에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어있다는 착각 속에 여전히 잔존하는, 아니 어쩌면 기생적으로 발전했을지 모르는 파시즘이란 '생명체'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운, 명확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간다면 세상은 바뀐다"란 책 속의 한 마디가 큰 여운을, 익숙하고도 새로운 깨달음을 남긴다. 나서서 행동하지 않더라도, 실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지도 잊지도 말자. 그것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고 민주주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