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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06 기생, 그거 걸레 아니예요? 81
  2. 2011.10.30 여선생님이 싫어요 23
2011. 11. 6. 08:30




지금은 모든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국정 교과서로 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국어 교과서 (하)권에는 관동별곡이라는 공포의 단원이 있습니다. 강호에 병이 깊거나 말거나, 천산만낙에 아니 비친 곳이 있거나 말거나, 제 아무리 성실한 학생도 졸지 않고는 못 지나치는 곳입니다. 그래도 저는 고등학교 때 이 단원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가 느꼈던 즐거움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실력도 경험도 모자란 초보교사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잡설도 섞어주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6시간 만에 관동별곡을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단 한 순간 아이들의 눈이 빛나는 순간이 있었으니, 정철이 경포대에 들러 홍장 고사를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이겠다 싶어 강릉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홍장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려 하니, 아이들이 킥킥 거리면서 웃습니다.

 

 


"기생? 그거 걸레 아닌가요?"

 









저는 정색을 하며 두 가지 부분에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첫째, 기생은 오늘날의 성노동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 둘째, 걸레라는 말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기생은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계층이었다는 점, 상대하는 이들의 격에 맞게 가무, 시, 서, 화, 재능과 지조, 의협 등의 덕목을 모두 지녀야 했다는 점, 어릴 때부터 수 년 간 교육을 받아야만 기생이 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해서 퇴출되었다는 점 등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좋아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몇 개 써주고, 그녀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과 방대한 지식, 예술적 감각에 대해 얘기해주었더니 아이들은 기생이 당시의 식자층이었다는 데에는 일정 부분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에이 그래도 아무나 하고 막 하면 걸레잖아요."

 




저는 그 아이에게 반문했습니다.






"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은 또다시 킥킥대기 시작합니다.

 

 


"이성에 관심이 많고, 성욕을 느끼는 건 누구나 당연한 거야. 그건 어른이나 너희 같은 청소년이나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인류 사회가 이어져 내려오고, 종족이 보존되어온 원인이기도 해. 식욕이나 수면욕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성욕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거 아냐? 너희들 집에서 야동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니? 청소년의 성욕이 억압되는 것처럼 여성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여자들 보고 걸레라고 하는데, 그럼 하는 건 여자 혼자 해? 누구랑 하는데?"

 

 

 

"...남자요.. "

 

 


"그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남자한테도 걸레라고 불러? 대단한 정력가라 생각하고, 매력 있고 능력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때는 영웅처럼 치켜세우고, 우상처럼 모시지 않아? 다른 게 뭔데? 남자는 그래도 되고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있어?"

 




"......"

 






 

 

가장 맑고, 가장 순수하고, 때가 덜 타야 하는 17세의 아이들조차 걸레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대단히 폭력적인 기호입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어에는 수많은 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예의를 갖출 때엔 '신사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하면서 욕할 때는 '년놈'이라 합니다.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는 '성수여자고등학교'이지만 우리 학교는 '성수남자고등학교'가 아닌 '성수고등학교'입니다. '미혼모'라는 말은 있지만 '미혼부'라는 말은 없으며, 흔히 쓰는 '미망인'이라는 말은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습니다. 남성이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는데도, 외화 번역 자막에 남성은 반말로, 여성은 존댓말로 표현하는 것도 성차별입니다.

 


여성의 짧은 치마가 성범죄를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우습습니다. 요즘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데 여성들에게 그런 조언을 해야 할까요. 왜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할까요. 누가 여성들을 그렇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나요. 무엇이 조두순을, 강호순을 낳았나요.







 

여성들이 밤길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성으로부터의 위협'을 배제하면 말입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신체의 자유가 있고, 당연히 밤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가 있는데, 그들은 왜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성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남성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법은 어떤 형사사건에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주의할 것을 당부하지는 않는데, 유독 성범죄에만은 다른 잣대를 적용합니다.

 

밤길이 위험하니까 다니지 말라든지, 혹은 성범죄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라든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밤에 다니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든 아예 발가벗고 다니든(비록 경범죄에 속하더라도)가도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누가 건들지 않으면 얼어 죽지 않는 한 피해를 당할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행동은 항상 정갈해야 하며, 웃음을 함부로 흘리면 안 되고,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 심지어 남편에게 맞더라도 애들을 생각해서 이혼하면 안 되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을 따르며, 심지어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고까지 합니다. 칠거지악과 같은 반인륜적인 테제가 오랜 시간 사회의 지배적 질서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 가끔은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괜히 헛바람이나 겉멋이 든 것이 아니라, 먹물이 가득 차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리 높여 외치거나 앞장서서 구호를 선창할 만큼의 용기와 배짱은 없지만,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불합리에 고통 받지 않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세상이 오기를 원합니다. 여성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공간적 범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이너리티였던 인간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마초 집단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는 남자들만 있는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비난의 눈초리와 동정의 시선뿐이었습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남자가 되어서 여자 편만 드느냐고 난리법석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열린 사람들은 남자는 페미니스트로서 한계가 있다는 염려를 보냅니다.






 

남자편 여자편 니편 내편을 가르는 일차원적 사고에는 굳이 응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남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한 발 물러설 것을 충고하는 이들과는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난 남자야. 그래서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외면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가해자, 공모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생겨난 자기방어기제가 아닐까요. 혹은 남성이라는 사회적 수혜자로서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껴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제게 여성문제는 타자의 문제, 외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의 문제며 제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바둑알을 뺏고 뺏기는 싸움입니다. 다섯 개의 바둑알 중에 내가 세 개를 가지면 상대는 두 개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하나를 양보한다면, 상대는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양성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남성)는 사회적으로, 또 사적으로 분명 여성에 비해 상대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리다 낙심하지만,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남성의 그것보다 조금 더 좁습니다. 오죽하면 남자인 것도 스펙이라고 할까요.

 







남성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기회와 유리한 조건을 누리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사적으로 어머니, 누이, 아내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가면서도,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게 여성문제는 당신들의 문제라며 밀어내는 것은 정당할까요. 적어도 사회정의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성 일반은 여성 일반에 대해 사회적 강자임이 분명합니다. 노동자로 일하는 남성 최씨가 사장인 여성 김씨보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해도 그것은 성의 차이가 아닌 계급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표방하는 남성들은 이러한 착각 때문에 부르주아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여성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하고는 합니다.

 

남성도 때로는 피해자라고, 왜 남자를 적으로 만드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일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성 역시 여성과 똑같이 손해를 보고 똑같이 피해를 입는다는 식의 뉘앙스라면 곤란합니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피해자라면 꼬랑꼬랑한 유교문화원의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가부장제 사수에 열심일까요? 문제는 한국의 여성들이 모든 남자를 적으로 보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억압에 반대해 싸우는 여성주의자들이 다른 운동가들에 비해 너무 평화적이고 온건한 것에 있습니다. 가부장제를 온몸 바쳐 사수하려 하는 남성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라고 여성에게 말하는 이는 정치학에 문외한이거나 고도의 사기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성억압체제가 남성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남성도 궁극적으로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남성성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 행복, 감격의 순간들을 박탈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요된 남성성 안에서 남성들은 과연 행복한가요.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무슨 사내자식이 이렇게 약해 빠졌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야. 이런 말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질적으로 여성스러운 남성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남성들을 억압하는 말입니다. 여자끼리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풍경은 자연스럽지만, 남자끼리라면 어떨까요. 한 집 건너 커피전문점이 있는 번화가에서도 남자 둘이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하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보통의 '어른' 남자들은 폭탄주를 몇 잔 들이키고 뇌가 마비되어야만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솔한 대화란 철저히 형님-동생, 선배-후배의 위계가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남성에게 요구되는 '남성적' 사회성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권위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즐거움, 육아의 기쁨, 수평적 대화에서 오는 정신적 교감을 빼앗아갑니다. 남성이 누리는 가부장적 특혜는 사실 이러한 손실의 이면입니다.

 







저는 남자로서 여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가 근본적으로 양성에게 정의롭기 때문에 여성주의를 지지합니다.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남성인 저는 여성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성적 이해와 그것을 토대로 한 의사소통 및 연대는 어떤 인간 사이에든 충분히 가능합니다.

 

잘나가는 기업의 사장님이 노동자들의 문화를 내면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론을 읽고 감명 받은 상무님이 노동자 편에 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28세의 남성인 저는 주저 없이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30. 09:30

 



제게 파란만장한 2학기를 선사했던 자기소개서 홍역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제 봐준 춘천교대 자기소개서를 끝으로 올해는 정말 빠이빠이입니다.


이제부터는 면접의 시즌입니다. 3학년 문과 면접지도 수업을 맡은 덕에 아이들은 제게 삼삼오오 몰려와 면접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알려줍니다. 정작 전 정시모집으로 대학에 입학했는데 말입니다.

 

안정을 원하는 시대 탓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의 적성이 그런 것인지,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교사를 지망하는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사범대를 지망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일반 대학에 가서 교직이수를 하고 싶다는 아이만 해도 3학년 전체에 30명 정도는 될 듯 싶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장난 반 떠보기 반으로 물어봅니다. 군필자 가산점에 찬성하냐고요. 백이면 백 모두가 찬성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에게 유리하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버리는 2년을 국가가 반드시 보상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남교사 할당제에 대해 물어봅니다. 처음에는 그게 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개념과 취지를 알려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신규 교원 임용을 할 때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었습니다. 결국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보수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로부터 엄청난 찬사와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남교사 할당제, 재미있습니다. 이 제도에 찬성하는 이들은 교육현장에서 남성의 비율이 턱없이 적으니 할당제를 통해 일정 비율 이상을 남교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올바른 성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입니다. 학교에 여선생님이 대부분이다보니 남자 아이들이 롤 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웃깁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 나오는 남성들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나 봅니다.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도 웃기고, '남성다움'이라든가 '여성다움'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성별만의 특징이 있다고 믿는 것도 웃깁니다. 우리는 '백인답다'라든가 '흑인답다'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묶을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인간을 규정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자답다' '여성스럽다'와 같은 말은 왜 자연스럽게 쓰일까요. 저는 음모론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남교사 할당제에 찬성하는 이들은 왜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있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까요? 골프장 캐디는요? 유흥업소의 여성들은요? 3교대 근무에 시달리는 간호사들은요? 왜 그 분야들에 대해서는 남성 할당제를 시행하자고 하지 않죠?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는데도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일선 학교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 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 온’ 분야입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제도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이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합니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합니까?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입니다. 7차 교육 과정을 도입하며 우리는 양성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햤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를 세우고, 교육 과정에서 아버지가 부재하는 현상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폭력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남교사 할당제의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의 시대입니다.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합니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할 때 만나는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교직의 여성성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왜 문제인지를 따져봐야합니다. 한쪽의 성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더도말고 딱 20년 전으로만 돌아가면 됩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교단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직의 남성화를 지적한 이가 있었던가요? 저는 84년생이라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아니오,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저 주도권을 빼앗긴 남성의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내가 짱을 먹어왔는데 한 군데에서는 열라 뺏기고 있으니 심통이 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을 키워내고 사회화하는 과정인데 이런 식으로 여성들에게 자리를 자꾸 내주다가는 남성 중심의 질서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신문사들이 여당 편이기에 대통령이 삽질을 해도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사회의 주요한 자리는 남성이 모두 차지하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직의 여성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여성이 교직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 좋은 직업입니다. 일도 별로 힘들지 않고 방학도 있고 야근은 드물고 칼퇴근 할 수도 있고 월급도 체불 없이 꼬박 나옵니다. 그렇지만 교직이 훌륭한 직업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몰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은 그만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몰리는 것입니다. 기업에서는 여성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자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관둘지 모른다고. 혹시라도 임신이라도 하고 출산이라도 하면 우리는 인력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환원하는 아주 부려먹기 편한 사고방식이 등장합니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해서 일을 관두는 여성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사회 여건을 탓해야 합니다. 여자라고 뭐가 좋아서 열달동안 배부르게 다니고 싶고 아이한테 매달려서 자아실현도 못하고 싶겠나요. 그렇게 말하는 회사 치고 사내에 놀이방 설치해주는 회사 본 적 없고, 여성한테 출산휴가랑 육아휴가 유급으로 팍팍 주는 곳 못봤습니다. 외국계 기업과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나마 교직은 이러한 차별이 적은 곳이기에 여성들이 교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교직의 여성화가 여성의 책임이고 개인의 책임인가요?

 

제가 노량진 임용 학원에 다닐 때 우리 강의실에 있던 120명의 수강생 중 남성은 고작 17명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시험을 보는 숫자가 이렇게나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열 번 양보해 응시인원의 문제를 따지지 않더라도, 정치학에서 말하는 양적소수자와 질적소수자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공은 인구 비율로만 따지면 흑인이 90%이고 백인이 10% 가량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부와 명예있는 직위는 백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당선이 전 세계 빅뉴스가 됐을 정도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세력들은 대부분 백인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양적소수자는 백인이지만, 질적소수자는 흑인이라고 말합니다. 교직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학교 현장을 찾아가보면 여성 교사가 훨씬 많다지만 교장과 교감 중 여성의 비율은 10%가 채 안 됩니다.

 

교직의 여성화를 지적하기에 앞서,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구조를 먼저 지적해야 합니다. 누구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생물학적인 성인데, 그것이 차별의 기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 실상 진상인가요. 단지 남성과 다른 염색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이너가 되어야만 하는 그들에게 교직의 여성화니 뭐니 하고 우려를 보내는 것은 배부른 투정이요, 헛된 기만입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학벌 없는'사람들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며 흥분합니다. 하지만 그 다른 목소리는 협상을 유도해내고, 공존을 지향합니다.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는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다른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밥그릇 투정 이상의 문제입니다. 그 밥그릇은 본래부터 온전히 남성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성들은 밥그릇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사리에 맞게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것이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라면 기꺼이 밥그릇을 공유하겠습니다. 전 훌륭한 교사이기 이전에 민주적이고 평등한 국가의 시민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