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 10:30

수능이 끝나니 3학년 전담 교사는 학교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며칠을 바보처럼 앉아 별로 할 것도 없는 교무부 일이나 깔짝거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학교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성수고에서 보낸 시간만 20개월이 넘는데, 천천히 도서관을 살펴본 적이 처음인 국어교사라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별관에 있는 학교 도서관은 장서가 몇 권 되지 않는 소소한 규모였지만, 생각보다 읽을 만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의 꼭대기에서 놀았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여덟 권이나 있었고, 최근 인기가 많다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여섯 권이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감하기엔 아직 이른 문제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청춘에 대한 담론이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통의 청춘 담론들도 이처럼 대개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짱돌을 들고 당신들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체제에 저항하라고 선동하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식입니다. 이 두 가지 담론이 팽창하는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간과했던 청춘들의 불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꿈꾸는 여당과 정권 교체를 희구하는 야당, 양측 모두에게 ‘청춘들의 불만’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등록금 투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들과 보수언론들은 이 문제를 선심성 복지논쟁과 장학금의 범위확대 문제로 국한시키며 정작 ‘청춘’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지 포퓰리즘 논쟁과 증세 논쟁, 부실사학 퇴출 논쟁, 장학금 확대 논쟁은 기성 세대의 이윤과 더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요.

 

등록금 투쟁이 야기한 정치권의 논쟁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라는 이들과 청춘은 원래 아프니까 힘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기성세대라는 사실과 등록금을 둘러싼 논쟁이 다른 범주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요. 바로 청춘의 담론에서 청춘들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춘의 범주를 20대, 혹은 후하게 쳐서 30대 초반까지로 설정하고 전개하는 세대론에는 일종의 ‘함정’이 존재합니다. 특정 시기를 ‘청춘’으로 명명하는 순간, 청춘의 현실과 고민은 철저하게 ‘시간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우석훈 식으로 짱돌을 드는 순간, 기성세대와 ‘특정 나이’의 청춘들은 적대적인 이분법 위에 놓여집니다. 짱돌을 들고 저항하라는 말은 일면 후련한 일갈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의 저항은 세대의 구분 없이 존재하는 문제들을 청춘들의 문제로 한정짓게 되는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현재 청춘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 이를테면 비정규직, 등록금, 학력 차별, 대학의 상업화, 다가올 초고령화 사회- 은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우석훈 식의 발언은 ‘88만원’이라는 기표 아래 청춘들의 현실을 분노로 휘발시켜 버립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다를 바 없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는 제자들과의 상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청춘들의 고민과 현실을 보여주는 표본집단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한 저항과 위로는 상당부분 적실하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체계는 그렇게 간단히 전복되거나 "화이팅!“ 이라는 구호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로 군림하며 청춘들에게 힘을 보태주려는 듯한 책들은 일시적인 위안에 머물며 청춘들이 처한 상황을 개인의 극복의지와 의식화라는 영역으로 축소시킵니다.

 

매년 대학 입시가 끝날 무렵 보수언론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입시영웅’들의 신화처럼 의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그 기사들은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입시제도라는 ‘구조’를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무책임하게 짱돌을 들고 맞서라는 언술이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옵니다.

 

현재의 청춘들은 과거의 세대들처럼 투쟁과 혁명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가혹한 세대 내 경쟁에 내몰린 세대들은 변화를 꿈꾸지 못한 채로 조로한 청춘이 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세대 내 경쟁은 청춘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생존에 대한 불안은 청춘들의 관심사를 축소시켰습니다. 지금 여기의 청춘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안을 주입하는 살벌한 세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고 청춘들 개개인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소중합니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면서 건네는 충고와 위로보다는 불안한 청춘들이 행하는 자기 고백이 고립된 청춘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경쟁의 일상화는 개인의 내면에 견고한 벽을 형성시키고, 그 안에 고립된 청춘들은 일방적으로 매도되거나 훈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고통을 강요하는 세계 안에 던져진 청춘들이 연대와 저항을 꿈꾸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요. 경쟁의 대상이 아닌, 외롭고 아픈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동료들을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당신도 삶이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면, 그래서 단자적인 고립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개인의 성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는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좀 더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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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