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8. 08:30

2011학년도가 끝나갑니다. 다음 주면 저희 학교도 겨울방학을 합니다. 파란만장했던 2011년, 저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1교무실의 교무부로 내려와 많은 업무를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담임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 지금 해내야 할 일이 명확한 것이 업무라면, 담임의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니까요. 몸은 작년보다 올해가 더 힘들고, 평균 퇴근시간도 훨씬 늦어졌지만, 신경을 쓰거나 골몰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는 훨씬 덜합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를 가득 채운 이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 제 아이들은 하나도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괜히 부담임을 맡은 3학년 4반에 기웃거리고는 했습니다. 제가 아무때나 들어가도 이상하게 여겨지 않았던 1학년 3반 아이들과 달리, 3학년 4반 아이들은 묻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생각해보면 작년 우리 반 부담임이셨던 전 선생님도 수업이나 행사가 아니면 우리 반에 들어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한 작년 우리 반 애들을 보면 뭔가 찌릿하고, 내것을 뺏겨버린 것만 같아서 아쉬운 기분이 종종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봅니다.

 

학교엔 꼭 담임이 필요한가요? 왜 담임은 있어야 하나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이라 일컫는 교육, 즉 제도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담임선생님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기억에 남는 담임선생님 한 분쯤은 있을테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그때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은 담임선생님 한 분쯤도 있을 것입니다. 담임이 없는 학교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벌이는 오류 중 하나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기준으로 학교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교들은 세상의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특징을 지닙니다. 그것을 일반화시켜 생각해 버리는 일은 언제나 몰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대학교에는 담임이 없습니다. 지도교수라는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 분은 담임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그분이 학생에게 영향을 끼칠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성인으로서의 대학생들은 스스로 모든 행동에 책임을 갖고 행동합니다. 조회나 종례가 없는 대신, 공지사항을 놓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며,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집니다. 공부를 잘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사회적 압박이지 결코 누군가의 으름장이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대학같이 될 수 있을까요?

 

‘담임결정론’이 있습니다. 한 해의 운세는 학기 초에 배정되는 담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담임은 대한민국 학생의 1년 행복을 좌우합니다. 1년이 저당 잡히기는 학생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 증후군’이 학교를 떠돕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특히 원로교사분들은 담임을 서로 안 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몇 년에 한 번은 꼭 담임을 맡는다는 것을 학교 내규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출퇴근 부담이 없고, 승진도 자유롭고, 방학이 있고, 퇴근 시간이 빠른 것과 같이 ‘좋은 직장’의 조건만을 따지는 선생님의 ‘자질’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담임을 맡으면 담임 수당이 더해집니다. 기피 원인은 담임이 되면 겪는 잡일과 행정 업무 때문입니다. 교과를 지도해야 하는 것은 다른 선생님과 마찬가지지만 더 일찍 출근해야 하고 공문 처리도 많이 해야 하며, 아이들에게 신경쓰면서 겪는 심적인 부담도 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하는 좋은 선생님일수록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학교를 경험한 수많은 학생 출신 국민들이 증명하듯, 담임에 따라 학교생활이 좌우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비민주적,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교육도 이제 점차 교육에 대한 학생의 주체적인 선택권이 보장되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어 교과목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쪽으로 교육과정이 수정되어가고 있습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과목을 배우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는 점점 더 민주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불평하는 '야간강제학습'이나 '체벌'은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말대꾸'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받는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다면 담임제도는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본질적으로 담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관리의 책임'에 있습니다. 관리대상으로서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관료제 체제하의 중간단계로서 담임이라는 위치를 설정해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식으로 하면 소대장이 될 것이고, 회사식으로 말하면 과장이나 부장이 될 것입니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학교당국의 지침을 전달하고, 감독하고, 통제합니다. 말썽은 부리지 않는지, 싸우진 않는지, 다친 이는 없는지 보살피는 것 역시 담임의 몫입니다. 이것은 학교를 하나의 관료체제로 보는 것입니다.

 

즉, 국가의 목적(근대 국민의 양성)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는 효율적인 통제와 작동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조직이 필요한 것이고 그 최일선에 담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수의 대상(학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필요한 존재가 바로 담임입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학생을 관리의 대상,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조직은 군대조직과도 같습니다. 시스템과 목적이 다를 뿐 작동원리는 비슷합니다. 효율적인 관리라는 미명 하에 담임의 전권행사, 횡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잘되면 신경써주는 일이 되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억압하는 일, 강제하는 일이 되기 일쑤입니다.

 

담임이 통제의 책임을 지는 한은, 학생과 교사간의 평등한 관계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교사가 무조건 옳고, 학생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권력과 폭력, 점수와 기록의 이름으로 가능할 뿐이지 그외의 능동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키기는 힘듭니다. 미성숙한 존재라고 하여 학생에게 주체적인 판단권을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중, 고등학생이라고 눈코입을 다 닫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만큼 책임있는 판단을 위해 학생 스스로가 좀 더 노력하게 해주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학생 육성의 목적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고분고분하며 순응적인 학생을 길러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말대꾸하는 학생을 반기지 않습니다. 무한경쟁에 적응할 수 있는 학생을 기르기보다는 패배를 용인할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시키는 일에 군소리 없이 따라주는 벙어리 국민을 키워내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치열한 대학입시와 자리잡기 싸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키워낸 학생들이 그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쟁을 없애야 한다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 행동이 없기에 어른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목적삼고 계획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여야 하는지 제도상으로 정한다는 것은 분명 이견이 있을 일이지만, 그 방향성 자체는 대한민국 자체가 동의해도 좋을 일입니다. 왜 교사는 노예를 키워내야 하나요?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체제순응적인 노예를 키워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국 담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 어떤 식의 교육이 미래 한국에 필요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담임이 학생의 권리를 대신하여 행사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학부모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실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태어날 리 없습니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이론적으로 합의를 끌어내봤자, 우리 앞에 서있는 거대한 괴물인 입시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돈만 잘 벌면 오케이, 앞에서는 모두 깨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잘가면 그까짓 인권 따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들이 있는 한 그 어떤 논의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를 바꾸자 라는 말을 대학을 좀 더 보내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같은 배를 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몇몇 어른들과, 미성숙한 존재를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남겨두려는 몇몇 집단들의 해묵은 사고방식에 대해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담임이 사리지게 되면서 겪게 될 교사권력의 공백과, 교사가 단지 점수만을 부여하는 점수기계로 전락할 가능성, 인성교육마저 학교에 떠맡기려는 고전적 교육관 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검되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한 관료제 중간기구로서의 학교가 일정한 국가통제를 벗어나게 되면서 얻게될 혼란 역시 예상되는 일입니다. 결국, 교육의 문제도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서 한발짝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애정결핍이 일상화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테두리를 걷어내는 일이, 즉 담임제를 없애는 것이 그들을 더욱 외로움으로 밀어넣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돈을 벌기 바빠서 가정일조차 경쟁적으로 하는 부모님 밑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담임은 어쩌면 가장 믿을만한 어른일지도 모릅니다. 그 관계는 다만 점수를 주고 말고의 관계를 떠나, 서로에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갖는 매우 기초적인 인간관계의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학생 스스로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목적의식 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그들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고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만 시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학교를 오지 않든, 수업을 땡땡이치든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학생 자신이 비바람 앞에 홀로 서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놔두는 것입이다. 패배의 책임도, 좌절의 책임도 모두 학생에게 일임하고 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