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 08:30

안녕하세요. 글을 '배설'하기 좋아하는 스릉입니다. 어제 무지무지 일찍 잔 덕에 새벽부터 잠이 깼는데, 토끼고양이님의 휴재 공고(빨리 나으세요 ㅠㅠ)를 보고 히히 나도 한번 연애이야기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동이 트기 전부터 키보드를 두들기도 있습니다. (제가 스틸 전문입니다.) 연애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풋풋했던 시절의 짝사랑입니다만, 라디오 사연에 당첨된 적도 있는 재미난 이야기라 공유해보고 싶어요 :) 올해 봄쯤에 제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이라 시점도 약간 안 맞고, 반말로 쓴 것은 양해 부탁드려요!










3월도 어느덧 말경으로 치닫고 있고,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 지쳐가고 있다. 학기 초의 쌩쌩한 기운들은 야간자율학습과 놀토 및 일요일 자습으로 날아가버린 듯 하다. 교사도, 학생도 행복하지 않게 하는 야간자율학습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것 역시 고민해볼 문제다.

 

이맘때쯤 되니 몇 교시에 교실에 들어가더라도 조는 아이가 서너명씩은 꼭 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즐겁게 수업하는 그레이트티처이길 원하는데, 그렇다고 안쓰럽게 조는 아이들을 혼내고 싶지는 않고, 이럴 때마다 나름대로 갖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고는 한다.

 

지난 주 수요일인가. 애들이 하도 피곤해하고,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길래 첫사랑 보따리를 풀었다.

 

중학교 시절, 틱 장애를 심하게 앓았던 나는 대인기피증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나를 혼내는 선생님들, 나를 놀리는 친구들이 싫어서, 거의 모든 시간마다 양호실에 가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고는 했다.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영어 67점을 받았다. 당신네 아들이 총명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모님께는 큰 충격이셨을 것이다. 학원을 가는 게 어떻냐고 말씀하셨다. 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어머니는 당신 친구분의 남편이 부원장으로 있는 학원에 가라고 했다. 잘 말씀해주시겠다고. 니가 두려워하는 그런 일들은 없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나는 등불학원에 첫 발을 디뎠다. 반편성 고사를 봤고, 운 좋게도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반에 들어갔다. 시내의 모든 중학교에서 30위권 안에 있는 애들만 모아놓은 반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나는 그반에서 최고 열등생이었던 셈이다. 설렘은 커녕 긴장과 주눅으로 가득한 무거운 마음으로 교실의 문을 열었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나는 H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예쁜 아이였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런데도 성격이 아주 쾌활하고 좋았다. 나는 지금도 장난끼 가득하고, 잘 웃고, 농담도 잘하는 말괄량이가 좋다. 당시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김현주를 닮았지만, 김현주보다 더 예뻤던 그녀는, 등불학원에서 만난 H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용기도 없고, 당시 틱 때문에 엄청나게 위축되어 있었고, 내 기억으로도 아주 찌질했던 나와는 달리, 강릉이라는 좁은 도시에서 H는 하이틴 스타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 때 가정용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유행했던 얼짱 카페의 4대 천왕, 이런 것처럼 H는 강릉에서 그런 존재였다. 이름 붙이고 말 만들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입에서, H하면 동명중학교에서 가장 예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웃긴 말이지만, 난 그때 H와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반년동안 말 한 번 걸지 못했다. 그냥 교실 구석 맨 뒤에 앉아, 저 앞에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여리여리한 것도 있었지만, 그땐 다들 그랬던 것 같다. 순수하고 맑았던 시절, 누굴 좋아해서 고백한다, 사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개념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중3으로 진급했다. 강릉은 예나 지금이나 비평준화 지역이고, 우리 때는 고입선발고사 시험도 있었다. 좋은 점수를 받아야 고등학교를 골라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우등생들로 가득한 우리 반에서는 모두가 강릉고와 강릉여고에 진학하길 희망했고, 모두가 충분히 진학 가능한 성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3이 되면서부터 학원에서 저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시반에 하교하면, 5시부터 학원수업이 시작되고, 10시에 끝나는 시스템이었다. 다소 버겁긴 했지만, H를 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오히려 학원에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녀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는 찐따였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것 같다.

 

학원에서 야간수업을 하게 되니 저녁밥을 먹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원 옆에 있는 한솥도시락에 가서 도시락을 사다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야간수업을 받기 전까지 시간이 20분 정도 남곤 했는데, 이 시간 동안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를 하고 놀았다. 간혹 성격 좋고 쾌활한 남자아이들이 종종 끼고는 했는데, 나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공기놀이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H와 함께 놀고 싶다는 생각만은 가득했다. 결국 집 앞 문구사에서 공기 몇 알을 샀고, 그날부터 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나는 엄청나게 다양한 공기기술들을 가지고 있다. 아마 남자 치고는, 대한민국 상위 0.1%안에 드는 실력일 거라 자부한다.

 

덕분에 나는 H와 말도 해보게 되고, 당시 유행했던 메일 주고 받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행복했다. 공부도 잘 되었다. 사는 맛이 났다. 성적도 쑥쑥 올라 중3때는 정규고사든, 고입모의고사든 간에, 열 번이 넘는 시험 중에 단 한 번도 전교 10등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도 작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중3이 끝나가던 무렵, 학원에서는 반 편성을 새로 한다고 했다. 강릉고-강릉여고반, 명륜고-강일여고반, 경포고-문성고반, 등으로 반을 다시 짜겠다고 했다. 학원 담임선생님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반은 다 강릉고 강릉여고에 갈 애들이니 바뀔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강릉고에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당시 우리 아버지는 명륜고의 3학년 부장이셨고,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신입생 유치팀장이 되셨다. 각 중학교를 다니며 우수한 학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애쓰시고 계시는데, 아들이 되어서 강릉고에 가겠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전 강릉고 안 가요. 명륜고 갈거예요. 반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왜? 우리 아버지가 명고 선생님이시거든요. 근데 제가 강릉고 갈 수는 없잖아요. 모두가 이내 끄덕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슬펐다. 그때 H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어? 우리 아빠도 명고 선생님인데? 어????

 

나는 집에 오자마자 아빠를 붙잡고 물었다. 아빠, 우리 학원에 어떤 여자애가 있는데, 아빠가 명고 선생님이래. 이름이 H라는데.. 혹시 H씨 성을 가진 선생님 있어?

 

아빠는 껄껄 웃으셨다. 아니 H가 너랑 같은 학원에 다닌단 말야? 어? 아빠가 H를 어떻게 알아? 알다 뿐이냐. 너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H네 가족이랑 속초 콘도에 놀러간 적도 있는데.. 승범이엄마, 거기 그 앨범 좀 가져와봐. 그거 알지?

 

엄마가 가져온 앨범에는 신기한 사진이 있었다. 85년 2월에 훼미리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테이블 왼쪽에는 우리 부모님, 오른쪽에는 H부모님이 앉아 계셨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나와 H가 앉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와 H의 아버지는 같은 해에 학교에 부임했고, 나이도 동갑이었으며, 같은 해에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았다. 장난 반 재미 반으로 정혼을 했던 셈이었다. 우리 나중에 사돈 맺자, 하면서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다. 어쩌다 한 번 그녀를 복도에서 만날 수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매일 마주할 수는 없었다. 슬펐다. 우리 아버지가 명륜고에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점점 더 예뻐지고 있었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이런 게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는 입학성적 상위 20명을 따로 빼내 동문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에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등불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명륜고, H는 강릉여고. 나는 킴스학원, H는 등불학원. 우리는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메일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나는 다음소프트를 만든 이재웅 사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장님, 한메일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또 일 년이 지났다. 고2가 되었고, 이해찬 장관이 옷을 벗게 되면서 야자폭풍이 몰아쳤다. 전교생이 평일에는 밤 11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6시까지 자습을 했다. 학원에 갈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후 뿐이었다. 시내 학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킴스학원도 망했다. 나는 킴스학원이 망하자마자, 등불학원에 찾아갔다. 그녀는 없었다. 등불학원도 이젠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도 난 등불학원에 등록했다. 그녀가 없다고 해도, 그 건물에서, 그때의 선생님들에게 배우는 게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등불학원은 강릉여고와 200미터 거리에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학원을 가기 위해 오후 자습을 조퇴하고 친구 세명과 함께 등불학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2001년 여름이었다. 강릉에도 편의점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강릉여고 건너편이자, 등불학원 옆에, 강릉에서 제일 큰 패밀리마트가 생겼다. 입 짧고 다이어트하기 좋아하는 여고생들은 주로 그곳에서 점심을 때웠다. 편의점답지 않게 테이블도 열 개나 있었던, 대형 패밀리마트였다. 그날도 패밀리마트 안에는 강릉여고의 학생들이 가득했다. 18세 열혈 남고딩들은 장난끼가 발동했다.

 

한 아이가 제안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은, 저 안에 들어가서 생리대를 사오자고. 다들 미쳤다고 욕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뭘 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남자는 주먹, 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보를 냈다. 나머지 세 친구는 가위를 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패밀리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40여명의 여고생이 있었고, 단 한 명의 남고생이 있었다. 왜 그렇게 생리대는 깊숙한 곳에 진열해놨는지, 사장님이 원망스러웠다.

 

위스퍼를 집어들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곳곳의 아이들로부터 괴성이 들렸다. 계산대까지 가는 10미터가 10리처럼 느껴졌다. 마침 계산대 직원마저 여자였다. 일년동안 받을 눈총과 야유를 다 받고, 이놈의 친구놈들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계산이 끝나마자자 후다닥 뛰어나갔다. 누군가와 부딪쳤다. 그 아이는 넘어지고, 나는 생리대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아 아파.. 어? 승범아?

 

H였다. 그녀는 내 얼굴과 위스퍼를 번갈아보았다. 그녀에게서 오던 메일이 끊겼다.

 

고3이 되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져갔다. 당장 내 앞에 서있는 입시라는 괴물과 싸우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포트리스도 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서강대에 입학했고, 서울로 떠났다. 수능을 잘 보지 못한 H는, 강릉대 유아교육과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도 아버지로부터 내 소식을 들었겠지. 서울로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에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서울은 별천지였다. 하루하루 재밌고 신나는 일들로 가득했다. 나는 H를 까맣게 잊었다. 매일매일 즐겁게 사느라, 강릉을 떠올릴 일이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그녀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지만 문자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일년이 훌쩍 지났고, 나는 선배가 되었다. 04학번들은 귀엽고 착했다. 학교 생활은 더욱 재미 있었다. 5월 대동제가 되었다. 당시 총학에서는 엄청난 이벤트를 기획했다. 학교에서 출발해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를 순회한 뒤 서강대교를 건너서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서강 자전거 대행진을 한다고 했다. 강원도 촌놈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마포경찰서의 협조를 얻어 그 혼잡한 여의도의 교통을 통제하면서까지, 우리는 자전거를 타며 서울을 누볐다.

 

해방감도 찰나, 새내기 한 명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천안에서 올라온, 그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대학교 생활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 당시의 나는 그 그 후배의 이름을 보면서도 H를 떠올리지 못했다. 여튼 서울에 갓 올라온 새내기 한 명이, 여의도 한복판에서 사라진 셈이었다. 그 아이는 자전거가 익숙하지도 않았다. 급하게 핸드폰을 열었다. ㅎㅅㅎ를 검색하고 무작정 통화버튼을 눌렀다. 생각보다 금방 받았다.

 

어.. 안녕?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야! 어디야!

나? 강릉이지..

뭐? 강릉?

 

핸드폰을 다시 봤다. 그 후배가 아니라 H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배를 찾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 겨우 연락이 닿았고, 학교로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H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내 사과를 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시간은 날아가는듯 흘렀다. 나도 '연애'라는 걸 하게 되었다. 좋은 아이였다. H가 생각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군 휴학을 하고 강릉으로 내려가 26개월 동안 공익근무를 했지만, 그래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던 셈이지만, 그녀의 이름을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학을 했고, 얼떨결에 졸업을 했다. 야구기자와 국어교사 사이에서 헤매다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갔다. 힘들었다. 일년 간의 수험생활을 마치고, 춘천 성수고등학교에 오게 되었다. 출근하기 전날, 일년간의 수험생활을 회고하는 다이어리를 남겼다.

 

잊고 있었던 이름, H가 댓글을 달고 스티커를 붙였다.

 

자기도 졸업하고 3년이나 임용시험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 마음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힘들었을텐데 고생 많았을 거라고 했다. 다음에 강릉 오면 꼭 연락하라고,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다. 6월, 삼척에서 강원도 사립학교 체육대회가 열렸다. 체육대회를 마친 뒤, 선생님들은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떠나셨고, 나는 그곳에서 만난 아버지 차를 타고 강릉으로 왔다. 그녀를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다. H에게 연락했다. 일요일 낮에 만나기로 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이 15살 때,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8살 때, 그녀를 떠올리지 않게 된 것이 20살 때, 나는 5년간 그녀를 짝사랑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녀와 마주 앉아,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27살이라니.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쇼핑도 했다.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떨리고 설렜는데, 만나는 동안은 이상하게 무덤덤했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오랜 친구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그리워했던 그 친구가 맞나 싶었다.

 

오늘 재밌었어. 종종 연락할게. 강릉 오면 또 보자!

 

그렇게 10년 만의 만남은 끝이 났다. 나는 나대로, H는 H대로,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고 있다. 가끔 안부를 묻고,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그냥 딱 그 정도의 관계로 지내고 있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좋아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그 시간들을 통해 그녀에 대한 환상과 이미지를 점점 더 키워왔던 것 같다. 한 어린 소년의 짝사랑,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기억은 세월의 가공으로 추억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화된다.

 

지금 나는 괴롭고 힘이 든다. 잠도 잘 오지 않고, 식욕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오늘도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겠지.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