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5. 12:24

 

 

수능이 4일 남았다. 이쯤 되면 공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멘탈과의 싸움이다. 4층 3학년 교실의 분위기는 자칫 비장하기까지 하다. 전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목요일 이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즐거워진다. 족쇄가 풀린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이 기대된다. 체육관은 얼마나 시끌벅적할지, 주변 PC방은 또 얼마나 북적거릴지...


수능이 끝난 고3은 말년병장, 방학한 초딩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잉여로운 존재에 속한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몇 달간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이 잉여족들은 하루 24시간을 놀고먹는 데 투자한다. 수능 보기 전에는 불안해하면서 놀았지만 이제는 그 최소한의 불안마저도 털어버리고 펑펑 논다. 수능을 잘 본 학생이든 못 본 학생이든 맘놓고 놀아제끼는 점에서는 마치 요플레를 먹을 때는 누구든지 뚜껑부터 핥는다는 만인평등사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어찌 보면 그들은 수능에만 올인하고 그 외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개탄스러운 한국 교육 현실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들이다. 수능이 끝나도 고등학교 교육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끝이 아니지만, 수능 끝난 고3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다수의 학교가 단축수업을 실시하며 그마저도 수업을 안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무단 결석생이나 무단 조퇴생이 대거 발생하기도 한다.


이 고3들의 잉여스러움에 대한 지적이 여러 분야에서 터져나오면서 학교 차원에서 문화탐방을 하거나 영화관람을 하는 등의 다양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뻘짓이나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수능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 게 아니다. 수능 이후에도 원서 제출, 논술, 면접, 적성검사 등 각종 '시험'들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수험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거센 바람을 등지고 인생의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서게 될 고3들에게 묻고 싶다. 수능 시험지를 손에 쥐고 울고 있는가? 나 몰라라 뒤로하고 잠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가? 그대들에게 고하고 싶다. 훌훌 털고 당장 떠나라고.


이 시기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을 탈출할 기회는 남은 일생 동안 그리 많지 않다. 곧 있을 점수발표와 대학접수에 연연해 반 답답함과 반 홀가분함으로 어영부영 날짜를 세고 있기엔, 피시방이나 당구장, 노래방에 갇혀 소비적인 문화에 집착하며 또 다른 쳇바퀴를 돌고 있기엔, 고3의 피 끓는 청춘과 두 달 남짓 남은 학창시절의 추억거리가 아깝지 않은가.


물론 일상을 탈출한 뒤에 즐기는 시간들이 일상에서의 그것과 똑같다면 곤란하다. 그동안 묶여있고, 매여 있었던 도시를 떠나 넓은 대자연을 앞에 두고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한다. 그리고 골똘히,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삶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여러분은 이제 곧 어른이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받던 보호는 끝났다. 앞으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할 결정들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부모님, 선생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은 듣되, 자신의 생각과 그분들의 생각이 다르거든 자신의 생각대로 할 것을 권하고 싶다. 어른들 말씀 들어 나쁠 건 없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어른들의 말씀대로만 행동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여러분들은 20년 가까이 말 잘 듣고 허튼 짓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기대에 맞춰드렸으니 이제부터는 기성세대의 기대를 조금씩 거부해보길 권한다. 그런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곧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권한다.


독립은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독립하기를 권한다. 20년 동안 부모님 아래에서 먹고 자고 싸고 다 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그 돈을 전부 벌 수는 없지만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를 바란다. 기숙사비든, 하숙비든, 자기만의 공간은 자기 돈으로 시작해 채워나갈 것을 권한다. 과외도 좋고 알바도 좋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게 되면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꿈을 가질 것을 권한다. 어떤 직업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그런 거 말고. 그래서 토익점수 높이고 어학연수 가고 스펙을 쌓는다는 그런 거 말고. 그런 건 꿈이 아니라 그냥 목표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표란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개미 무리의 병정개미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내가 말하는 꿈은, 정말 대책 없어 보일 만큼 낭만적인 그런 꿈이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 행복의 총량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차별 없고 부조리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이런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아주 조금 움직일 수도 있는 그런 초대형의 것을 권하고 싶다.


오노 요코가 말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슴에 간직하고 끊임없이 꿈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그게 꿈이다. 나는 우리 소중한 고3 학생들이 꿈꾸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