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9. 07:01

1. 사격에서 진종오가 금메달을 땄고, 수영에서 박태환이 은메달을 땄고, 남자 양궁 단체는 동메달을 땄다. 그래서 메달이 세 개다. 종합 순위 4위란다. 종합 순위 4위? 재밌는 말이다. 그 순위라는 걸 어떻게 매기는가 보면 더 재밌다. 은메달이 100개가 있어도, 금메달 1개보다 못한 것이 지금의 순위 산정 방법이다. 정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순위를 매기는가 싶어 국제 올림픽 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는데, 위와 같은 방식으로 순위를 매기기는커녕 홈페이지 어디에서도 국가별 메달 갯수를 가지고 순위를 매기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2. 올림픽 정신이라는 게 무엇인가. 스포츠를 통해 지구촌의 대화합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본래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꼭 메달의 갯수를 가지고 1등부터 꼴등까지 국가별로 서열화를 시켜야 하는 걸까. 그냥 있는 그대로 승부를 즐기고, 승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패자에게는 위로의 박수를 보내주면 안 되는 걸까. <은메달에 그쳤습니다>라는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 전 세계를 통틀어 두 번째로 짱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다. 꼭 1등을 해야만 하는가. 금메달만이 최고인가.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삼성 그룹의 광고카피와, 그들의 불법 재산 승계가 함께 스쳐지나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3. 남자 축구 어떻게 됐어? 라는 물음에 상대방은 우리가 졌어, 라고 답한다. 왜 <우리>가 졌다고 말하는가. 한국 축구 대표팀이 진 것이고, 박태환이 우승한 것이다. 우리가 이기거나 우리가 진 것이 아니다. 집단과 개인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국가와 시민 간의 관계는 특히나 더 그러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우리>는 누구를 일컫는 말일까? 한국경제를 손에 쥐고 있는 소수의 재벌? 아니면 그 재벌이 소유한 기업으로부터 해고되어 거리를 전전하는 실업자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의 절반밖에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인가? 아니면 학벌주의의 제물이 되어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학원에서 다시 학교로 내몰리는 청소년들을 지칭하는 것인가? <우리>라는 말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하나의 공동 운명체속에 뒤섞어 놓음으로써 양자간의 갈등을 희석시키고 은폐하는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인 기호다.

 

4. 올림픽 열기에 편승해 한 몫을 챙기려는 대기업들의 얄팍한 상술은 이젠 신물이 난다. KB는 매번 올림픽 때마다 스포츠 스타를 내세워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꾀하는 기업인데, 하계 올림픽에는 박태환, 동계 올림픽에는 김연아라는 카드를 칼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그 KB는 몇 년 전 프로축구의 2부리그 격인 내셔널리그에서 국민은행 축구단이 우승해 K리그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자 구단 운영자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변명으로 K리그 승격을 거부했던 기업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은행이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프로스포츠팀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번에는 스포츠 스타를 앞세워 돈벌이를 하려고 하다니. 재밌지 않은가? 과거 요미우리의 이승엽과 주니치의 이병규를 중계하느라 국내 프로야구를 외면했던 SBS 스포츠는,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 야구대표팀이 쿠바와 평가전을 갖게 되자 SBS 공중파 채널을 할애하면서까지 그 경기를 중계했다. 그놈의 애국심이 뭐길래, 국가대표팀이 뭐길래, 민족주의가 뭐길래 말이다.

 

5.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 자체로 즐기는 데서 끝나야 한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인 <건전한 여가선용>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딱 좋다. 스포츠에 어떤 목적의식이 가미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축구 국가대표를 칭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태극전사라는 말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슬이 퍼렇다. 꼭 국가대항전이 아니더라도 스포츠에서 흔히 쓰이는 평정, 원정, 개선, 출격, 용병 등 수많은 용어는 전쟁에서나 쓰이던 것들이었다. 스포츠 캐스터는 후지산을 무너뜨리고, 만리장성을 넘고, 유럽을 평정하고, 한국으로 개선한다고 한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에서 일그러진 군사주의가 떠오른다.

 

6. 박태환에게 실격 판정을 내린 심판이 중국인이라는 말에, 누리꾼들은 짱깨니, 떼놈이니, 중국놈이니, 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국인 심판이 아니라 미국인 심판이었단다.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간의 대항전은 민족감정으로 번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맹목적인 애국심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그것은 곧 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가당치도 않은 순위 집계 시스템 하에 대한민국이 종합 순위 2등을 했다고 해서, 내가 200여국이 넘는 세계의 나라 중에 2등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7. 오늘은 축구 대표팀의 경기가 있다고 한다. 또다시 거리에 붉은 물결이 펼쳐질듯 싶다. 혹자는 이 붉은 물결에서 화합된 대한민국의 단결력을 보고, 혹자는 국가주의적 광기를 보고, 혹자는 축구를 빙자한 축제의 마당을 본다. 몇십만명의 거대한 인파가 경찰의 저지선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통해 혹자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경배하고, 혹자는 일탈의 욕구가 권력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길들여질 위험성을 지적한다. 월드컵에서 발견되는 우리 사회의 잠재적 에너지를 사회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자는 주장과 신명나는 놀이판에서 겪었던 해방과 긍정의 경험을 그 자체로 인정하자는 반론도 있다. 월드컵도 그렇고, 재미있는 것은 거리로 나오는 응원인파 중 여성과 청소년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흔히 축구팬 하면 청장년층의 남성들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거리에 나온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거리 응원에서 분출되는 열정과 환희가 억눌리고 곤고한 일상에서의 해방의 뜻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여성과 청소년의 함성은 억눌린 그들의 꿈과 욕구가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는 아닐까.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과 청소년의 꿈과 욕구를 억누르고 있으며, 또 이를 분출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을 제약하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런 뜻에서 사실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일상을 떨치고 날아올라 공동체적인 환희를 경험할 수 있는 계기라면, 여성과 청소년에게 그것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아닌 무엇이라도 좋았다. 이미 관광버스 아줌마와 오빠부대에서 그 단초를 보았다. 축제가 끝난 후, 꿈에서 깨어보니 다시 삭막한 무한경쟁의 장에 외로이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수험생들이 겪을 후유증이 사실 난 제일 두렵다.

 

8. 올림픽과 같은 단기적이고 폭발적인 이벤트에서 얻는 쾌락 말고,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여유, 문화활동을 우리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생겼으면 좋겠다.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데서 삶의 기쁨과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콩나물 시루 같은 좁은 교실에 아이들을 가두고 병든 닭처럼 길러내는 대신에, 자유롭게 뛰놀 수 있도록, 자신의 꿈과 미래를 능동적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교육헌장에 나와있는 그런 전인교육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