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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0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4
  2. 2011.08.06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 4
2011. 12. 1. 17:27
자기만의방(세계문학전집13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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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누고픈 이야기라 급 포스팅을 합니다.
당황스러우셨더라도 즐거이 반겨주세요.


바로 이 분의 목소리를 전해드리려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내 숙모님 메리 비턴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려고 말 타러 나갔다가 낙마하여 죽었습니다. 내가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당시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한 변호사의 편지가 우편함에 떨어졌으며 그것을 열어보고 내게 매년 500파운드가 지급되도록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둘 - 투표권과 돈 - 중에서 돈이 더 무한히 중요해 보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지요. 그전까지 나는 신문사에 잡다한 일자리를 구걸하고 여기에다 원숭이 쇼를 기고하고 저기에다 결혼식 취재 기사를 쓰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쳐줌으로써 몇 파운드를 벌었지요. 그러한 일이 1918년 이전의 여성들에게 개방된 주된 일거리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알 테니 그 일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돈을 벌어 그 돈에만 의존해서 사는 어려움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애를 써보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지금도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 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항상 부득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고 또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 - 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 - 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숙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10실링짜리 지폐를 바꿀 때마다 그 녹과 부식된 부분들은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두려움과 쓰라림도 사라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 자유와 평등, 해방 등의 패러다임을 가로지르는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있는 주장이었지요. 당시 여성들은 제한된 경험, 인습, 통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으니 말그대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백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간에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실 - 그것이 사실이므로 - 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칠 것입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선구자들이었던 무명 시인들의 삶에서 자기 생명을 이끌어내며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작업 없이, 우리 편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녀가 다시 태어날 때 그녀가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겠다는 결단 없이, 그녀가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위해 일한다면 그녀가 출현하리라는 것과, 비록 가난한 무명인의 처지에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자기만의 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참고로 본문 중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울프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로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으나 기회가 없었던 '여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난 스릉님의 포스팅에서도, 또 제가 얼마 전에 소개드렸던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비슷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단지 이름과 얼굴만 다를 뿐이죠.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들에게 울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의 감상도 궁금하네요.

제게 큰 가르침과 용기를 주었던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큰 울림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6. 08:30

안녕하세요~ 여러분!
목요일 코너를 맡은 '감귤양'입니다!!

저번 주에 이어서 이번 주까지 제 글은 제 시간을 지키지 못 한 채, 이렇게 뜬금없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사죄의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변명을 이어보자면, 그동안 1달 남짓된 회사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건지
몸이 크게 아팠습니다! 그래서 피치 못 하게 글을 올리지 못 한 것이니까요, 너그럽게 넘어 가 주세요 ㅠ_ㅠ


그리고 이어지는 제 영화 이야기는, 1999년 작품인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도 파격적이면서도 탄탄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많은 분들께 사랑받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영화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1999)>는 개봉 이후부터 지금까지 '레즈비언 영화'로써의 궤적을 그리면서 회자되어왔다. 그러한 시도는 레즈비언의 신화적 탄생, 숭고한 죽음과 초 감성적인 소통 수단 등 '타자'적 성을 스크린이라는 환상을 통하여 욕망의 대상과 원인으로 놓고자하는 데에서 그칠 수 있다. 영화가 동성애적 파급을 불러 일으킬만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에만 침착하는 일부 비평들은 파격을 겨냥했음에도 고루하다.


 극 중에서 '효신'은 정상성에서 벗어난 섹슈얼리티의 표상이다. '효신'은 철저하게 타자로 인식되고, 그녀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은 '시은'이다. <여고 괴담 2>는 현재 시점의 디제시스 안에 과거 회상의 디제시스 -'효신'과 '시은'이 쓰는 '교환 일기'-가 중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거의 그들이 구축한 관계 속에서 '효신'은 평범한 여고생인 듯 보이지만 '시은'에 대한 애정이 맹목적이고 과도해지는 지점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시은'에게마저 거부당한 그녀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대부분의 한국 공포 영화는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서의 몬스터를 내세운다. 더구나 영화 <여고 괴담 2>의 배경은 다름아닌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훈련시키는 사회화 과정이 이루어지는 '학교'다. 남자 교생 선생님의 첫사랑 에피소드로 대변되는 '이성애' 판타지에 대한 소녀들의 열광은 정상적이고, 심지어 풋풋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동료 학생에게 보이는 애정은 낮은 수위를 기준으로 호모 섹슈얼리티로 쉽사리 둔갑하고, 처벌 받는다. '효신'이 죽기 전, 자신을 그저 '한' 아이로 사람들이 기억 해 주기 바란다는 사소한 소망은 차라리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무차별적 억압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필연적으로 '학교'로 돌아와 공포의 대상이 된다.
 
'효신'에게 있어서 여자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자신의 '사랑'을 억압하고 해체시키는 장소다. 주목해야할 것은, 반면 '학교'라는 집단이 그녀를 억압하는 원인은 '시은에 대한 감정'에만 국한되지 않는 점이다. 그들의 관심은 '정상'의 잣대에 따라서 판가름된 모든 '비정상'을 처단하는데에 쏠려있다. 하지만 '비정상'이라는 것은 '정상'의 반댓말이자 상응어이다. 영적 존재로 귀환한 '효신'에 대한 두려움은 '정상'과 '비정상'이 애초에 한 사람의 두가지 면모라는 사실 때문이다.


실제로 '효신'이 보여주는 몬스터의 실체는 그다지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학생과 선생님들의 혼란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왔던 '비정상'의 분신인 '효신'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효신'의 영은 '시은'이 자신의 '배신'을 참회하자 학교를 떠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실질적인 억압의 주체였던 '학교'에 대한 심판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 어딘가 미해결된 사건의 느낌을 받는다. 다만 지금껏 실질적으로 금기시 되어 온 타자적 성을 풀어내어 한국 영화계에 소외된 것에의 표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으로 위안 삼아 본다.

역시나 '결'이 약한 제 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헤헷 :)
조금 진지하고 딱딱하게 공포 영화에 대해서 생각 해 본 글입니다!
모쪼록 이 영화를 보지 못 한 분이 계시다면, 한번쯤 봐야 겠다,고 생각이 들길 바라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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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귤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