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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0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4
  2. 2011.11.15 예비 대학생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16
2011. 12. 1. 17:27
자기만의방(세계문학전집13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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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누고픈 이야기라 급 포스팅을 합니다.
당황스러우셨더라도 즐거이 반겨주세요.


바로 이 분의 목소리를 전해드리려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내 숙모님 메리 비턴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려고 말 타러 나갔다가 낙마하여 죽었습니다. 내가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당시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한 변호사의 편지가 우편함에 떨어졌으며 그것을 열어보고 내게 매년 500파운드가 지급되도록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둘 - 투표권과 돈 - 중에서 돈이 더 무한히 중요해 보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지요. 그전까지 나는 신문사에 잡다한 일자리를 구걸하고 여기에다 원숭이 쇼를 기고하고 저기에다 결혼식 취재 기사를 쓰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쳐줌으로써 몇 파운드를 벌었지요. 그러한 일이 1918년 이전의 여성들에게 개방된 주된 일거리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알 테니 그 일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돈을 벌어 그 돈에만 의존해서 사는 어려움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애를 써보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지금도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 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항상 부득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고 또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 - 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 - 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숙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10실링짜리 지폐를 바꿀 때마다 그 녹과 부식된 부분들은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두려움과 쓰라림도 사라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 자유와 평등, 해방 등의 패러다임을 가로지르는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있는 주장이었지요. 당시 여성들은 제한된 경험, 인습, 통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으니 말그대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백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간에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실 - 그것이 사실이므로 - 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칠 것입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선구자들이었던 무명 시인들의 삶에서 자기 생명을 이끌어내며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작업 없이, 우리 편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녀가 다시 태어날 때 그녀가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겠다는 결단 없이, 그녀가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위해 일한다면 그녀가 출현하리라는 것과, 비록 가난한 무명인의 처지에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자기만의 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참고로 본문 중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울프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로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으나 기회가 없었던 '여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난 스릉님의 포스팅에서도, 또 제가 얼마 전에 소개드렸던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비슷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단지 이름과 얼굴만 다를 뿐이죠.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들에게 울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의 감상도 궁금하네요.

제게 큰 가르침과 용기를 주었던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큰 울림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5. 07:50



대입 시험 전국 수석이 불문과와 물리학과에 진학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은 곧 법학과와 의예과로 바뀌었고, 현재에는 경영학과와 의예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 인사 담당자의 투덜거림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취업난이 시작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등록금은 연 천만원을 호가하고, 빚을 지는 대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인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경영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이제 사실상 취업전문 기술학교로 변했습니다. 새내기 때부터 '공부'가 아닌 '학점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공모전에 참가하고, 자비를 들여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스펙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 평가받고, 취업을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되지만, 대학이 취업학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모습을 띠는데 일조하게 된 개인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대신 밥벌이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화된 분야(의학, 법학, 공학 등)가 아닌 이상 인문계열과 사회과학계열의 학생들이 전공을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
다. 입사 원서 기준에 상경계열이 버젓이 적혀 있는 경영불패의 현실, 토익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영어광풍의 현실,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일어설 수 없는 무한경쟁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한 개인이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을 위해 바친다고 해서 그 개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개개인을 탓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없고 바람직하며 우리가 그것에 대해 눈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물질욕과 소비욕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은 대학 말고도 많습니다. 인생 선배로 살아온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들여다 봐도 몇십 년 후에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군집은 출신 대학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착하고 선량한 많은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양 알고 있습니다. 



론 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에 비해 대학에 가게 되면 유예기간이 연장되고, 학내 분위기에 맞춰가다 보면 고졸 취업자에 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합니다. 명문대에 들어간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혜택을 보기도 합니다. 적당히 놀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며, 선택할 수 있는 길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한정해 주기 때문에 안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학을 오긴 왔습니다. 이제 본인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대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난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기업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착각합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기업의 입맛에 맞추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업들은 창의적인 인재, 능동적인 인재,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인재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대학생 인재란 대부분 인력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찌보면 일회용품에 비견될 지 모르는 이 인력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학교들이 많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기업에 얼마나 취업했는가가 대학의 성적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공부하는 대표적인 학문인 경영학 전공에 토익 만점 받는 것 말고는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대학은 학문의 장입니다. 그것도 넓디 넓은 광장입니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학은 끊임없이 심연을 채우고, 그 위에 튼튼한 토대를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만큼이나, 인간의 관심은 전방위적이고 그 깊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안정적인 토대는 사실 대학이라는 곳이 유일합니다.



런데 이런 곳을 단지 실용이란 명목 하에 기업 군대의 이병 양성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학문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용적 자세가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학문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참고서, 똑같은 선생들한테 12년을 썩었습니다. 그렇게 12년을 썩다가 대학에 오면 갑자기 탄성한계를 넘어버린 용수철 마냥 맥이 탁 풀려버립니다. 대학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정한 학습형태를 강요하지도 않고, 일정한 학문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즉 선택의 다양함이라는 자유의 본질적인 특성이 구현됩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12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년 동안 선택과 판단, 그리고  책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일단 매우 난감하게 느껴지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처음으로 접하는 판타스틱한 상황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다시 시류에 휩
쓸려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서야 닥쳤는데, 해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그 거룩한 기업이 원하는 인력으로 만들어 버리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닐까요. 대학을 가는 이유가 좋은 직장,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너무 허무한 것 아닐까요.



대학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합대학 같은 경우에는 정말 수많은 교수들이 있고, 학과가 있고, 강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끌리는 수업을 찾아가서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학습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학에는 수학의 정석 같은 바이블이 없습니다. 배울 것도 전방위적이지만, 배우는 방법도 전방위적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은 언제나 책과 씨름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씨름을 하며, 끊임없이 교수들과 피드백을 갖고, 그것을 현실에 비추어 보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딩 때 참고서를 외우듯이 대학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점점 고도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학부생 수준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학 공부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 말이 학과공부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님은 다들 이해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굳이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본적인 문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즉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학에서 필히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확실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은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고하느냐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상황에서 판단을 하려면 사고가 깊어야 하고, 사고가 깊으려면 몸과 머리로 많이 섭취하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또한 주체적으로 판단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고를 어떻게 하면 깊게 하고, 자신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따위의 문제는 부단히 의심하고 생각하며,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보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으며, 기껏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업 군대의 이병이 되는 것이며, 피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기업 군대의 이병 되었더니 상병 꺾이기도 전에 강제 전역을 당해야 하며, 강제 전역을 당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기업의 이병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을까요.



이것은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으로 환원해서 생각한다고 해결책이 찾아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적 존재이고 이 문제 역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것을 당연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지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갚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한테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대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이야기 하고, 많이 듣는 것, 무엇보다 많이 생각하는 것이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린 자세로 세상을 대하되,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확고히 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다면, 감히 성공한 대학생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자,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