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4. 08:30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됩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을 할 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들이 학교를 떠날 것이며, 그 빈자리는 새로운 1학년들이 채우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방학식, 졸업식, 입학식 행사도 이어지겠지요. 


저는 이런 의식들이 싫습니다. 이런 행사는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을 합니다. 행사가 시작하면 저는 슬그머니 대열의 맨 뒤로 빠집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제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저는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합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는 강의석 씨처럼 국군의 날에 알몸 시위를 할 배짱도, 총 대신 감옥을 택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습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 하는 의식이 사무치게 싫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 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조회는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왜 아직도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을까요.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변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와 같은 이슈에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일까요.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았습니다.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립니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의 앞에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안락한 삶’을 향해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짓무르도록 답습합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은 그 나이에서만 겪을 수 있는 ‘구체적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진정한 교섭을 이룰 수 없었고, 부모 세대가 욕망하는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과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 됩니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존재감 확인,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불쌍합니다. 엎드려 자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느껴집니다.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온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이 느껴집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합니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조회는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독도를 제 땅이라 우기는 ‘쪽발이’들과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청산에 살고 싶다 말하며, 홍진에 묻힌 분네들을 조롱했으니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7. 08:30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에 따라 학부 법학과가 무너진 현재, 문과 계열에서 가장 상위(대입성적 기준)에 있는 학과는 경영학과입니다.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만 해도 문과계열에서는 고려대학교의 ‘경영학과’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제외한 연고대의 모든 학과에 합격할 수 있는 학생들이 온다고 하니 이른바 경영불패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영학과는 비즈니스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또 그 인재들이 다시 모교에 투자하면서 점점 그 성장세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영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자본’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들의 천박함도 커지는 듯합니다. 그저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높고 화려한 건물들을 지은다고, 대기업에 많이 입사시킨다고 해서 ‘Greatness’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대학에서 철학을 복수전공 했습니다. 간혹 복수전공으로 뭘 하고 있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철학이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의 90%가 이렇게 반응하고는 했습니다.




대체 왜?




1학년 2학기에는 철학과의 필수이수과목인 ‘형이상학’을 들었었습니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들을까 싶은 이 과목의 수강정원은 무려 2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의 첫 날에는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싸인을 받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A폭격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강생 좌석표를 보니 학번대가 1700~1800대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습니다. 경영학과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학기 내내 음악을 듣고, 떠들고, 스포츠 신문을 봤습니다. 대학교 1학년의 어린 마음에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안면이 있었던 경영학과 1학년 친구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네 학과 사람들은 왜 A 주는 수업에 몰려다녀?



친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응, 우리는 복수전공할 필요가 없잖아.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이 경영학이지만, 다른 나라에는 학부 과정에 경영학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학에 관심이 있는 경우 학부에서 다른 전공을 공부한 후에 MBA같은 경영관련 대학원을 통해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러한 과정을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경영학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영학은 역사가 오래 된 학문이 아니기에 다른 사회과학에 많은 부분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경영학’이라는 학문만의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현상을 분석하여 요약한 성격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뒤적이게 되는 사전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하게 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가치를 제공하기는 어려운 학문입니다. 회계나 재무와 같이 기술적인 분야는 좀 낫습니다만 전략을 세우고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경영학의 나머지 분야들은 그야말로 표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일견 미래지향적으로 보이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으로는 지금까지 성공한 회사들의 리스크 대처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있지만, 앞으로 회사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경영학이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기업에 적용하게 되면 새로운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세가 된 전략을 답습하는 것이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낡은 것’이라 볼 수 있는 경영 이론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통찰력입니다. 현재 사회의 현상들을 통해 중요한 가치와 트렌드를 뽑아 낼 수 있는 귀납적 통찰이나 새로운 가치나 트렌드,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창의력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경영학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영학 전공 평점 4.0에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해외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공모전까지 여러 번 휩쓴 인재들을 독시하는 대기업이, 왜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창의력 있는 인재가 없다고 툴툴거리는지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경영학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리더십’입니다. 저희 학교의 많은 학생들도 ‘리더’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더 구체적으로는 ‘CEO'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경영학과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CEO도 좋고 리더도 다 좋지만 리더십은 그 성격상 기본적으로 허영을 깔고 시작한다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리더라는 자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일 뿐 아니라, 그 욕망 자체가 위계의 끝단을 소실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경영서적은 온통 거대기업 총수의 관점에서 경영을 논합니다. 트랜디하게는 스티브 잡스를, 격조 있게는 잭 웰치를, 가깝게는 이건희가 되어보면서 독자들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판타지를 소비합니다. 왜 세계 최고의 구멍가게를 경영하는 책은 나오지 않을까요? 왜 세계 최고의 중간관리자를 지향하는 지침서는 나오지 않는 걸까요?



경영학과가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취업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업에서는 경영학과 학생을 선호할까요. 저는 기업 인사담당자도 아니고, 인사관리와 같은 과목을 들어본 적도 없어서 왜 기업에서 경영학과 학생들을 선호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영학과에서 배우는 많은 과목들은 일개 사원이 아닌 CEO나 쓸 법한 이야기가 많고 4년의 시간이나 들여서 배워야 할 만큼 깊이가 깊지도 않습니다.




혹시 경영학과 학생들이 기업에 더 필요한 지식을 갖춘 인재라서가 아니라, 기업에 더욱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호되는 것은 아닐까요? 경영학과 학생들은 기업 중심의 인적자원관리와 노사관계론을 들으며 노동의 기업적 측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가를 배워놓고 통제 당하는 꼴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교과서에 써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영학과 출신들은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경영학과 과목으로는 창의력이나 통찰력을 기르기 힘들다지만, 오히려 창의력 없는 사람이 기업입장에서는 명령에 잘 따르고 맡은 일만을 묵묵히 해내는, 이상적인 인재상일지도 모릅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사회학, 심리학, 인문학 등의 과목을 복수전공 해야 합니다. 그들의 학문에는 휴머니즘과 인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생각해봅니다. 미국의 블룸버그와 같은 경제뉴스 방송에서는 '생각보다 위기가 심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태로 수십만의 시민들이 자신의 집을 잃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경영학에서는 사랑도, 희망도, 낭만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돈을 버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냉혈한 조직 속에서 발전이 가능한가요. 무능한 사람을 아무런 대책 없이 낙오시키는 시스템이 우리 모두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요. 유능한 사람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현실 자본주의는 과연 정상적인가요.



기술은 좋지만, 인간다움을 상실한 수만 명의 경영학 전공 대학생들이 매년 사회로 쏟아집니다. 그들은 기업의 관리자가 되고, 언젠가는 CEO가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가변비용'에 속하는 직원들의 월급을 삭감함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실업자가, 그렇게 비정규직이 늘어났던 지난 10년 아니었던가요.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지만,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노동인구의 4%에 불과합니다. 일본도 6%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체 노동인구의 58%가 비정규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잘못 배워왔습니다. 못된 폐습만 배워 와서, '구조조정'을 마치 선진기법인 양 신주 단지 모시듯 했습니다.



쩌면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국민의 비율이 70%인 나라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은 60%, 유럽은 30-50% 정도의 국민이 자본주의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어설프게 자본주의를 배웠고, 그런 과정에서 못된 관행만 수입되어 이젠 자본주의의 뿌리인 '노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살아가는 방식의 질서를 정하고, 시행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인데 경영학은 왜 사랑을, 희망을, 휴머니즘을 노래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 학교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 없이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로’ 경영학과를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경영학과야 말로 방향이 없다면 이도저도 되지 않을 학문입니다. 여러 경영학의 갈래들 중에 어떤 쪽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지,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지 미리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분야에 가장 도움이 되는 다른 전공을 선택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영학에 올인하고 싶다면 회계/세법/재무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아 두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제일 유용할 것입니다. 이 분야는 손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활용도도 높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적어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창업을 하기 위해 경영학과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많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경영학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경영학이라는 이름 앞에는 '대기업'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이나 새로운 창업인을 위한 지식은 경영학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경영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인기학과에 왔다는 자만심에 빠져, 경영학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따라가기 보다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여 자신과 경영학이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0. 08:30





학교라는 곳에 출퇴근을 하고, 교무실에 제 책상이 생기고, ‘선생님’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들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경험도 실력도 없는 초보 교사 주제에 나름대로 개똥철학은 어찌나 고루한지, 누가 옆에서 뭐라 하든 말든 아직까지는 마이 웨이를 걷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교사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니, 올해 제 나이를 감안하면 저는 반평생 동안 이 일을 희망한 셈입니다. 하지만 2년쯤 뒹굴어 보니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제가 그리던 이상과 학교 현장의 괴리 또한 생각보다 컸습니다. 수업을 잘 하고, 아이들과 공감대를 나누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 이상으로 찾아오는 업무 외적 스트레스도 많았고, 학교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선배 교사와의 갈등에, 학부모와의 관계에, 경직된 조직 사회에서 느끼는 답답함 등등. 아직 저는 사회화가 덜 되었음을, 아직 치기 어린 낭만에 젖어있는 철부지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2년이었습니다.

 

지난 두 해 동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때로는 따뜻한 부모처럼, 때로는 장난끼 많은 친구처럼, 때로는 엄한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자세를 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귀가 얇은 편이 아닌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조언 저 충고에 고민하다보니 정작 제가 꿈꿔오고, 제가 그려왔던 저만의 학급 경영 계획은 하나도 시도해 보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의 편에 설 것인가, 학생들을 제압하고 카리스마 있게 통제하길 원하는 학교 관리자들의 구미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2년이 지나갔고, 이제 2011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3월은 초임 교사였던 제게 수많은 선배 선생님들께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달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들이 많았지만, 일관되고 공통된 요지는 ‘애들을 잡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사가 카리스마가 있어야 애들한테 말이 먹히고, 수업도 듣는다는 것이 요지였고, 3월에 고생을 하면 일 년이 편하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월에 애들을 잡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많이 때리고, 많이 혼내고, 많이 벌 줘서, 무서운 이미지를 심어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네네, 하면서 예스맨처럼 굴었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사실 매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표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학생이 느끼기에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어디 사랑일 수가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성폭력 가해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귀여워서 그랬다.’

 

한국 교육, 특히 중등교육, 또 특히 남고, 다시 한 번 특히 지방 사립고에는 군사문화와 체벌과 같은 육체훈육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쥐20’씩이나 개최하고, 스마트폰 수출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사회 구성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몽둥이찜질을 널리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어느 계급사회든 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훈육의 장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만큼 간단명료하면서도 효과만점인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이런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일본, 대만, 중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매’라는 약까지 강제로 투여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삐딱거린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약간이라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고개를 15도 숙이는 대신 5도 정도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는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기억에 새기게 됩니다. 불복종은 당장 큰 통증을 몰고 온다는 등식을 몸으로 잘 기억할 수 있게 말입니다.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가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 것일까요. 곤장을 치게 하여 ‘문제 있는’ 이를 반주검으로 만들고 이 장면을 보는 이들을 다 겁에 떨게 만드는 전근대적 행위가 수업 때에 하도 재미없어 잡담하거나 딴 일을 하는 아이에게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것이 정말 교육적인 행위란 말인가요.

 

실컷 두들겨 맞은 뒤에는 따뜻한 것처럼 보이는 서슬 퍼런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수야, 너는 이러다가 좋은 대학 못가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단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너의 부모의 희망을 다 꺾고 말야. 정말 그러고 싶니? 정신 차려! 이렇게 이야기하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영수의 신분상승 심리를 자극시킵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철수가 아무리 국영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된다고 해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말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이제 길어야 10년~15년 사이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구꼴통 세력이 정권을 잡고 지금의 정책이 반복ㆍ심화된다면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빈민촌과 할렘가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엔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너는 그래도 너의 부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하고 싶지 않니? 마약밀수갱에 들어가서 총 맞아 죽을 마음 없지? 그러니 공부나 좀 해!

 






교실에서의 체벌 관행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을 꺾고 저항하려는 용기를 말살시키는 것이 1단계, 겁이 나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2단계, 그리고 이를 통해 말 잘 듣고 반항하지 않는 황국 신민을 길러내는 것이 3단계, 이와 같은 단계가 당시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친일파 출신의 교육 관료와 함께, 이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이 전부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례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유지’를 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 (따귀 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할,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할 것입니다. 학교-군대-직장으로 이어지는 조직 사회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체벌문화가 사회를 좀먹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메커니즘의 선봉장이 되어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모름지리 교사라면, 무엇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실력도 없고, 경험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풋내기 선생에 불과하지만,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저는 두 개의 별명으로 불립니다. 첫째는 ‘마구마구’이며, 둘째는 ‘호구’입니다. ‘마구마구’라는 별명은 제가 즐겨하는 야구 게임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호구’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호구입니다. 학생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벌도 주지 않고, 매도 들지 않으니, 호구는 분명 호구입니다.

 

물론 저는 저 별명이 싫습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학생들에게 저런 류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교사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제가 옳다고 믿는 교사상을 바꿀 생각은 그보다 더욱 없습니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교사, 무서워하는 교사, 말 잘 듣는 교사, 수업 열심히 듣는 교사, 그런 교사가 되는 법은 간단합니다. 학생을 괴롭히면 됩니다. 벌을 주고, 때리면 됩니다.

 

선배 선생님들은 호구인 제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한 놈만 잡아서 제대로 조져버리라고요. 그럼 소문이 나서 애들이 함부로 못 대한다고요.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적절한’ 체벌을 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화가 나서 때리는 감정적인 체벌은 허용할 수 없지만,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어린 시절 잘못된 길로 접어들거나 방황을 할 때 엄한 매로 정신을 차린 추억을 되새기면서 스승의 고마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체벌은 정당한 것일까요?


저는 체벌에 반대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화를 참기가 힘듭니다. 사람들 사이에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단은 들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비판을 할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도 체벌 찬성론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체벌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폭력사회로 만든 가장 큰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맞고 자랐습니다. 지금 성인이 된 사회의 구성원 중에 자라면서 선생님에게 한 대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전 국민이 맞으면서 자라는 사회가 폭력적이지 않은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유럽이나 일본, 미국의 학생들은 체벌 없는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 청소년들은 매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유럽 각국과 일본에서 체벌은 불법입니다. 미국 대다수의 주에서 체벌은 불법이며, 일부 허용되는 주에서도 체벌을 하려면 부모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도록 하는 곳이 많습니다. 심지어 학생이 체벌을 거부할 경우 정학 등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곳도 있습니다. 최근 많은 부모들이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면서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내지만 외국에서 맞으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우수하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뒤처진다고 볼 근거는 더욱 없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아이들보다 못하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지도 못하면서 매를 들어야 하나요. 일제강점기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조선 놈들은 맞아야 말을 들어” 하면서 매질을 했다는 아픈 기억을 꺼내지 않더라도, 체벌을 앞세우는 교육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때리면서 교육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교사가 체벌을 할 때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순전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를 든다고 가정해봅시다. 체벌의 수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적절한 정도라고 해봅시다. 선생님들은 개인적 편차 없이 일정한 경우에만 매를 때려서, 학생들도 어떤 짓을 하면 맞게 되는지 예상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세상에는 맞을 만한 짓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동료가 맞는 것을 보면서, ‘저 녀석은 그런 짓을 했으니까 맞는 게 당연해’라고 방관하게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나서게 되지 않을까요. 만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더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맞을 짓을 한 놈은 때려도 된다’는 생각만큼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생각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매에 내성이 생기는 만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요. ‘잘못했으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준 어른들의 잘못을 비판한다면 잘못 짚은 것일까요.






 

체벌의 큰 문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사가 몸소 남을 때려도 된다는 것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권위의 발현'입니다. 교사의 권위로서 학생을 때리는 이 '생생한' 행위는 학생들에게 몸소 '권위'와 '권력'에 대한 시범 장면이 됩니다. 즉, 권력이 있다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무려 12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빵셔틀'이라는 용어는 새롭지만, 과거에도 '시다바리' '꼬붕' 등의 명칭으로 강자에게 굴복당하는 약자는 체벌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이는 마치 교사-일진-평민-빵셔틀의 피라미드 구조와도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행위'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을 너무나 쉽게 무시하는 곳이 그 동안의 학교였습니다. 그런 선생들을 보고 애들이 '아 나도 힘이 있으면 나보다 약한 사람들 때려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리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요? 통계적으로도 가정폭력이 있는 집의 학생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학생들의 폭력성은 불안한 가정사 외에도 부모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남을 때리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큽니다.

 

체벌 찬성 측의 주요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벌 금지가 교권의 축소 혹은 침해를 야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체벌이 문제 학생을 계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학급 통제가 학생 인권에 우선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위의 논리를 소급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릅니다. 체벌에 의해 유지되는 교사의 권위는 정당한가요? 체벌에 의한 교화가 교육적이라 할 수 있나요?

 

분명 체벌은 학생을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신체적ㆍ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의 청소년에게 체벌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체벌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학생은 자신의 행동을 시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한 물리적 제재를 가할수록 학생이 받는 신체적, 정신적 상흔은 커지며, 체벌과 폭력의 구분 또한 모호해집니다.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어떤 사유를 가지든, 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체벌에 있어 보편타당한 규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폭력에 가까운 체벌을 상습적으로 동원하는 교사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은 소수의 범법자로부터 다수의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체벌 금지 법안 역시 체벌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학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체벌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성의 문제를 잠정적으로 드러냅니다. 진짜 핵심은 학생을 때려야 하는가, 때리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교사로 하여금 체벌을 가능하게 하는, 체벌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 사회에서 가해지는 폭력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학교에서의 체벌을 당연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고, 이 때 형성된 인식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폭력적 자극에 대한 사회 전반의 역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가해지는 체벌은 체벌의 대상이 되는 학생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그 외의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복합적인 파급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폭력적 순환 구조의 재생산 과정에서 학생은 집단 내에서 상급자를 상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때문에 체벌(권위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이 익숙한 문화에서 성장한 인간은 사회의 또 다른 억압기제를 수용하고 내면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그렇듯 현실이 당위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체벌에 의해서만 계도되는 학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는 무력합니다. 폭력이 당연한 사회에서 체벌 금지가 현실적이지 못한 조치라는 비난에 앞서, 학교 교육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금지는 공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됩니다.




체벌은 교사의 ‘폭력적 권위’를 내세울 뿐, 지금 교육현장에 절실한 ‘도덕적 권위’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는 일종의 허구입니다. 교사가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체벌을 행사할 때, 요즘 학생들은 더 이상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체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따른 응당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교사의 심기를 잘못 건드린 대가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체벌은 교육적 목표 외에도 '교권의 확립'이라는 추가적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체벌이 허용되어 왔던 것은 '교육적 선도' 와 '교권 확립'이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즉, 교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교사가 학생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무기가 없다면, 교육적 선도가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휘자(commander)로서의 교사가 아닌, 친구이자 동료(company)로서의 교사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월등하게 교육적 선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입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아동들에게 어느 쪽이 더 그들의 잠재성을 북돋워줄 지는 명백합니다.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말로 타일러 가르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만약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더 우월하다고 입증된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기관은 상당히 살벌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군대는 즉각 '가혹행위'를 부활시킬 것이고, 초중고 학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교육에 체벌을 도입할 것입니다. 하지만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그리도 우월한가요? 성장기 아이들에게, 체벌을 통한 효과가 그것으로 인한 역효과를 무시할 정도로 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둔갑한 폭력, 그것은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탄의 매입니다. 몸에 새겨진 폭력성은 절대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랑의 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께 깊이 감사하고 지금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라면서 맞은 매 중에서 한 번이라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매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모든 매는 예외 없이 감정이 섞인 매였습니다.

 

세상에 '맞을 짓'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한 폭력의 정당화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차라리 저는 평생을 호구로 남기를 자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7. 07:00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일류입니다. 학부모들이 날밤을 지새워가며 좋은 학군에 자식들을 보내려 노력하는 진풍경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내 자식은 벗어나게 하려고' 입니다. 현장의 교사나 정부를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열정은 부모님들 못지않게 대단합니다. 국민 모두가 '일류대학'을 목표로 시간과 돈,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를 향한 교육열'. 이 말만큼 한국 교육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열기 속에 우리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20년 가까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오는 동안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상과 관련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단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들어왔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공부 못하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좋은 대학 못 나오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는 말입니다.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가 요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들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어떤 세상과 마주치더라도 진정 살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주어진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 기능적인 사람이 되라며,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서열화 기준을 그대로 내면화하여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향하여 매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배울 기회를 놓칩니다. '자아 발견' 내지 '자아 재발견'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수가 높아 사회적으로 성과를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순간 우리는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역시 나는 위대해!'하고 자위하며 '가짜 자아'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내면은 공허해집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나 가족, 회사가 원하는 모습이지 결코 진정으로 내면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면이 말하는 대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율적이며 책임성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모두를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 명예나 권력이라는 외적 잣대는 그야말로 부차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기준을 잣대로 하는 차별은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개성과 소질들이 더불어 존재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 출발점은 '자아 발견'일 것입니다.




학교 현장의 교육 평가방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현재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의 평가를 도입하더라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고, 사교육 문제와 교육 양극화 현상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입시지옥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에서 언급한 '주체적인 삶을 사는 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교육평가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곧 학교 전체의 문제이고, 교육 현장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그 뿌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교육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선발의 기능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 평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려면,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선발의 기능만이 강조되어 온갖 교육문제의 폐단이 생긴 것이라면, 선발의 기능을 제거 혹은 감소시키면 됩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대학평준화'를 주장합니다.




초중
고를 막론하고 중등교육에서 대부분의 시험 문제는 점수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 점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점을 맞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몇 등을 했느냐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장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깨우칠 아이들의 미래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은 어두울 것입니다. 제대로 된 독서 한 번 하지 못한 채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것에서는 교육적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내신 등급과 수능 등급, 사교육 문제, 석차 서열화, 명문대 입학 등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너무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높은 성적, 높은 석차에 대한 강박이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습니다.하지만 현재의 대학서열체제 하에서 교육평가는 서열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 해결 방법은 대학서열체제를 엎어버리는 것뿐입니다.




학벌체제는 대학교육에서도 파행을 낳습니다.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기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이미 자신은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자괴감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최근 대학가에 뜨거운 학구열이 불고 있지만, 그것은 학문 탐구의 장이 아닌 취업 학원으로서의 대학의 모습입니다. 향학열은 찾아보기 힘들고, '공부'가 아닌 '학점 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학문 경쟁력이 없는 국가에서 국가 경쟁력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몇 년 전 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이후의 인생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가 난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평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너무 심해서 ‘평준화’ 하면 다들 하향평준화를 이야기하고 평준화가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양 이야기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는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류 대학과 삼류 대학이라는 구분이 겉으로는 교육에만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부조리와 경쟁력 저하의 원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분야에서 특화될 수 있도록 하려면 서열화를 없애야만 합니다.




대학서열화, 고교등급제, 본고사부활, 기여입학제 등을 주장하는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시장에서 나오는 결과란 다양성이 아닌 독점이었습니다. 교육기회의 독점이고, 사교육의 독점이고, 학벌의 독점이고, 그것이 곧 부의 독점이 되며 신분의 독점이 되어왔습니다. 경쟁이란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서열화되어 있지만,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쟁을 통해서 교육의 효율성을 창출한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쟁이 아닌, 획일적인 시험 경쟁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평준화는 현실성 없는 공허한 외침이 아닙니다. 고교 평준화 체제처럼 대학 평준화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유럽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최부국 중 하나인 핀란드도,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프랑스도 대학 평준화 체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고교등급제와 비평준화체제(정확한 표현은 고교서열화 체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신봉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일부 명문대를 제외하면 평준화 체제에 가까운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 재생산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교육 불평등이 곧 계급 불평등으로 심화되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학 평준화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줄세우기를 위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의 중등교육에서는 현행 국영수와 같은 도구교과 대신 문학, 역사, 철학을 가르치는 인문소양 교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는 것에 더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5. 07:50



대입 시험 전국 수석이 불문과와 물리학과에 진학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은 곧 법학과와 의예과로 바뀌었고, 현재에는 경영학과와 의예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 인사 담당자의 투덜거림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취업난이 시작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등록금은 연 천만원을 호가하고, 빚을 지는 대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인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경영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이제 사실상 취업전문 기술학교로 변했습니다. 새내기 때부터 '공부'가 아닌 '학점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공모전에 참가하고, 자비를 들여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스펙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 평가받고, 취업을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되지만, 대학이 취업학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모습을 띠는데 일조하게 된 개인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대신 밥벌이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화된 분야(의학, 법학, 공학 등)가 아닌 이상 인문계열과 사회과학계열의 학생들이 전공을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
다. 입사 원서 기준에 상경계열이 버젓이 적혀 있는 경영불패의 현실, 토익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영어광풍의 현실,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일어설 수 없는 무한경쟁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한 개인이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을 위해 바친다고 해서 그 개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개개인을 탓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없고 바람직하며 우리가 그것에 대해 눈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물질욕과 소비욕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은 대학 말고도 많습니다. 인생 선배로 살아온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들여다 봐도 몇십 년 후에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군집은 출신 대학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착하고 선량한 많은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양 알고 있습니다. 



론 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에 비해 대학에 가게 되면 유예기간이 연장되고, 학내 분위기에 맞춰가다 보면 고졸 취업자에 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합니다. 명문대에 들어간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혜택을 보기도 합니다. 적당히 놀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며, 선택할 수 있는 길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한정해 주기 때문에 안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학을 오긴 왔습니다. 이제 본인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대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난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기업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착각합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기업의 입맛에 맞추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업들은 창의적인 인재, 능동적인 인재,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인재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대학생 인재란 대부분 인력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찌보면 일회용품에 비견될 지 모르는 이 인력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학교들이 많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기업에 얼마나 취업했는가가 대학의 성적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공부하는 대표적인 학문인 경영학 전공에 토익 만점 받는 것 말고는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대학은 학문의 장입니다. 그것도 넓디 넓은 광장입니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학은 끊임없이 심연을 채우고, 그 위에 튼튼한 토대를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만큼이나, 인간의 관심은 전방위적이고 그 깊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안정적인 토대는 사실 대학이라는 곳이 유일합니다.



런데 이런 곳을 단지 실용이란 명목 하에 기업 군대의 이병 양성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학문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용적 자세가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학문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참고서, 똑같은 선생들한테 12년을 썩었습니다. 그렇게 12년을 썩다가 대학에 오면 갑자기 탄성한계를 넘어버린 용수철 마냥 맥이 탁 풀려버립니다. 대학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정한 학습형태를 강요하지도 않고, 일정한 학문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즉 선택의 다양함이라는 자유의 본질적인 특성이 구현됩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12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년 동안 선택과 판단, 그리고  책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일단 매우 난감하게 느껴지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처음으로 접하는 판타스틱한 상황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다시 시류에 휩
쓸려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서야 닥쳤는데, 해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그 거룩한 기업이 원하는 인력으로 만들어 버리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닐까요. 대학을 가는 이유가 좋은 직장,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너무 허무한 것 아닐까요.



대학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합대학 같은 경우에는 정말 수많은 교수들이 있고, 학과가 있고, 강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끌리는 수업을 찾아가서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학습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학에는 수학의 정석 같은 바이블이 없습니다. 배울 것도 전방위적이지만, 배우는 방법도 전방위적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은 언제나 책과 씨름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씨름을 하며, 끊임없이 교수들과 피드백을 갖고, 그것을 현실에 비추어 보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딩 때 참고서를 외우듯이 대학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점점 고도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학부생 수준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학 공부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 말이 학과공부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님은 다들 이해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굳이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본적인 문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즉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학에서 필히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확실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은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고하느냐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상황에서 판단을 하려면 사고가 깊어야 하고, 사고가 깊으려면 몸과 머리로 많이 섭취하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또한 주체적으로 판단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고를 어떻게 하면 깊게 하고, 자신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따위의 문제는 부단히 의심하고 생각하며,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보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으며, 기껏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업 군대의 이병이 되는 것이며, 피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기업 군대의 이병 되었더니 상병 꺾이기도 전에 강제 전역을 당해야 하며, 강제 전역을 당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기업의 이병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을까요.



이것은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으로 환원해서 생각한다고 해결책이 찾아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적 존재이고 이 문제 역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것을 당연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지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갚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한테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대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이야기 하고, 많이 듣는 것, 무엇보다 많이 생각하는 것이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린 자세로 세상을 대하되,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확고히 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다면, 감히 성공한 대학생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자,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1. 07:04






수능을 마친 고3은 말년병장, 방학한 초딩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잉여로운 존재에 속합니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몇 주, 혹은 몇 달간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이 족속들은 하루 24시간을 놀고먹는 데 투자합니다. 수능 보기 전에는 불안해하면서 놀았지만 이제는 그 최소한의 불안마저도 털어버리고 펑펑 놉니다. 수능을 잘 본 학생이든 못 본 학생이든 맘놓고 놀아제끼는 점에서는 요플레를 먹을 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뚜껑부터 핥는다는 만인평등사상이 떠오릅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수능에만 올인하고 그 외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개탄스러운 한국 교육 현실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들입니다. 수능이 끝나도 고등학교 교육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끝이 아니지만, 수능을 마친 고3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대다수의 학교가 단축수업을 실시하며 그마저도 수업을 안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무단 결석생이나 무단 조퇴생이 대거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고3들의 잉여스러움에 대한 지적이 여러 분야에서 터져나오면서 학교 차원에서 문화탐방을 하거나 영화관람을 하는 등의 다양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뻘짓이나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수능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수능 이후에도 적성검사, 논술, 면접 등 각종 '시험'들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수험생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의 수많은 아해들을 포함한 70만 수험생들은 그딴 건 나중에나 신경 쓸 문제라며 일단은 노는 것이 지상과제인 양 행동을 합니다.






거센 바람을 등지고 인생의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선 고3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수능 채점지를 손에 쥐고 울고 있나요? 앞으로의 일들은 나 몰라라 뒤로하고 잠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나요? 그대들에게 고합니다. 훌훌 털고 당장 떠날 것을요. 지금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을 탈출할 기회는 남은 일생 동안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곧 있을 점수발표에 연연해 반 답답함과 반 홀가분함으로 어영부영 날짜를 세고 있기엔, 피시방이나 당구장, 노래방에 갇혀 소비적인 문화에 집착하며 또 다른 쳇바퀴를 돌고 있기엔, 고3의 피 끓는 청춘과 두 달 남짓 남은 학창시절의 추억거리가 아깝지 않은가요.







 

물론 일상을 탈출한 뒤에 즐기는 시간들이 일상에서의 그것과 똑같다면 곤란합니다. 그동안 묶여있고 매여 있었던 이 도시를 떠나 넓은 대자연을 앞에 두고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골똘히,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삶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어른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받던 보호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할 결정들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부모님, 선생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은 듣되, 자신의 생각과 그분들의 생각이 다르거든 자신의 생각대로 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른들 말씀 들어 나쁠 건 없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어른들의 말씀대로만 행동할 것은 아니지 않나요. 이미 여러분들은 20년 가까이 말 잘 듣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기대에 맞춰드렸으니 이제부터는 그들의 기대를 조금씩 거부해보길 권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자라는 것입니다.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진 자기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권합니다.




 






독립은 자신이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독립하길 권합니다. 20년 동안 부모님 아래에서 먹고 자고 다 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해나가야 합니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그 돈을 전부 벌 수는 없지만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를 바랍니다. 기숙사비든, 하숙비든, 자기만의 공간은 자기 돈으로 시작해 채워나갈 것을 권합니다. 과외도 좋고 알바도 좋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게 되면 정신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입니다.





 

꿈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토익점수를 높이고 어학연수를 가고 스펙을 쌓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꿈이 아니라 목표입니다. 여러분 말고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미 무리의 병정개미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말하는 꿈은, 정말 대책 없어 보일 만큼 낭만적인 그런 꿈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 행복의 총량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차별 없고 부조리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이런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아주 조금 움직일 수도 있는 그런 초대형의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노 요코가 말했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요.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슴에 간직하고 끊임없이 꿈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저는 우리 소중한 고3 학생들이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년 동안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세상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6. 08:30




지금은 모든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국정 교과서로 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국어 교과서 (하)권에는 관동별곡이라는 공포의 단원이 있습니다. 강호에 병이 깊거나 말거나, 천산만낙에 아니 비친 곳이 있거나 말거나, 제 아무리 성실한 학생도 졸지 않고는 못 지나치는 곳입니다. 그래도 저는 고등학교 때 이 단원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가 느꼈던 즐거움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실력도 경험도 모자란 초보교사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잡설도 섞어주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6시간 만에 관동별곡을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단 한 순간 아이들의 눈이 빛나는 순간이 있었으니, 정철이 경포대에 들러 홍장 고사를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이겠다 싶어 강릉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홍장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려 하니, 아이들이 킥킥 거리면서 웃습니다.

 

 


"기생? 그거 걸레 아닌가요?"

 









저는 정색을 하며 두 가지 부분에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첫째, 기생은 오늘날의 성노동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 둘째, 걸레라는 말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기생은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계층이었다는 점, 상대하는 이들의 격에 맞게 가무, 시, 서, 화, 재능과 지조, 의협 등의 덕목을 모두 지녀야 했다는 점, 어릴 때부터 수 년 간 교육을 받아야만 기생이 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해서 퇴출되었다는 점 등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좋아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몇 개 써주고, 그녀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과 방대한 지식, 예술적 감각에 대해 얘기해주었더니 아이들은 기생이 당시의 식자층이었다는 데에는 일정 부분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에이 그래도 아무나 하고 막 하면 걸레잖아요."

 




저는 그 아이에게 반문했습니다.






"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은 또다시 킥킥대기 시작합니다.

 

 


"이성에 관심이 많고, 성욕을 느끼는 건 누구나 당연한 거야. 그건 어른이나 너희 같은 청소년이나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인류 사회가 이어져 내려오고, 종족이 보존되어온 원인이기도 해. 식욕이나 수면욕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성욕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거 아냐? 너희들 집에서 야동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니? 청소년의 성욕이 억압되는 것처럼 여성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여자들 보고 걸레라고 하는데, 그럼 하는 건 여자 혼자 해? 누구랑 하는데?"

 

 

 

"...남자요.. "

 

 


"그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남자한테도 걸레라고 불러? 대단한 정력가라 생각하고, 매력 있고 능력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때는 영웅처럼 치켜세우고, 우상처럼 모시지 않아? 다른 게 뭔데? 남자는 그래도 되고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있어?"

 




"......"

 






 

 

가장 맑고, 가장 순수하고, 때가 덜 타야 하는 17세의 아이들조차 걸레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대단히 폭력적인 기호입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어에는 수많은 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예의를 갖출 때엔 '신사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하면서 욕할 때는 '년놈'이라 합니다.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는 '성수여자고등학교'이지만 우리 학교는 '성수남자고등학교'가 아닌 '성수고등학교'입니다. '미혼모'라는 말은 있지만 '미혼부'라는 말은 없으며, 흔히 쓰는 '미망인'이라는 말은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습니다. 남성이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는데도, 외화 번역 자막에 남성은 반말로, 여성은 존댓말로 표현하는 것도 성차별입니다.

 


여성의 짧은 치마가 성범죄를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우습습니다. 요즘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데 여성들에게 그런 조언을 해야 할까요. 왜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할까요. 누가 여성들을 그렇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나요. 무엇이 조두순을, 강호순을 낳았나요.







 

여성들이 밤길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성으로부터의 위협'을 배제하면 말입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신체의 자유가 있고, 당연히 밤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가 있는데, 그들은 왜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성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남성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법은 어떤 형사사건에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주의할 것을 당부하지는 않는데, 유독 성범죄에만은 다른 잣대를 적용합니다.

 

밤길이 위험하니까 다니지 말라든지, 혹은 성범죄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라든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밤에 다니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든 아예 발가벗고 다니든(비록 경범죄에 속하더라도)가도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누가 건들지 않으면 얼어 죽지 않는 한 피해를 당할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행동은 항상 정갈해야 하며, 웃음을 함부로 흘리면 안 되고,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 심지어 남편에게 맞더라도 애들을 생각해서 이혼하면 안 되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을 따르며, 심지어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고까지 합니다. 칠거지악과 같은 반인륜적인 테제가 오랜 시간 사회의 지배적 질서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 가끔은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괜히 헛바람이나 겉멋이 든 것이 아니라, 먹물이 가득 차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리 높여 외치거나 앞장서서 구호를 선창할 만큼의 용기와 배짱은 없지만,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불합리에 고통 받지 않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세상이 오기를 원합니다. 여성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공간적 범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이너리티였던 인간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마초 집단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는 남자들만 있는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비난의 눈초리와 동정의 시선뿐이었습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남자가 되어서 여자 편만 드느냐고 난리법석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열린 사람들은 남자는 페미니스트로서 한계가 있다는 염려를 보냅니다.






 

남자편 여자편 니편 내편을 가르는 일차원적 사고에는 굳이 응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남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한 발 물러설 것을 충고하는 이들과는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난 남자야. 그래서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외면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가해자, 공모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생겨난 자기방어기제가 아닐까요. 혹은 남성이라는 사회적 수혜자로서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껴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제게 여성문제는 타자의 문제, 외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의 문제며 제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바둑알을 뺏고 뺏기는 싸움입니다. 다섯 개의 바둑알 중에 내가 세 개를 가지면 상대는 두 개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하나를 양보한다면, 상대는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양성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남성)는 사회적으로, 또 사적으로 분명 여성에 비해 상대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리다 낙심하지만,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남성의 그것보다 조금 더 좁습니다. 오죽하면 남자인 것도 스펙이라고 할까요.

 







남성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기회와 유리한 조건을 누리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사적으로 어머니, 누이, 아내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가면서도,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게 여성문제는 당신들의 문제라며 밀어내는 것은 정당할까요. 적어도 사회정의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성 일반은 여성 일반에 대해 사회적 강자임이 분명합니다. 노동자로 일하는 남성 최씨가 사장인 여성 김씨보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해도 그것은 성의 차이가 아닌 계급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표방하는 남성들은 이러한 착각 때문에 부르주아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여성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하고는 합니다.

 

남성도 때로는 피해자라고, 왜 남자를 적으로 만드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일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성 역시 여성과 똑같이 손해를 보고 똑같이 피해를 입는다는 식의 뉘앙스라면 곤란합니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피해자라면 꼬랑꼬랑한 유교문화원의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가부장제 사수에 열심일까요? 문제는 한국의 여성들이 모든 남자를 적으로 보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억압에 반대해 싸우는 여성주의자들이 다른 운동가들에 비해 너무 평화적이고 온건한 것에 있습니다. 가부장제를 온몸 바쳐 사수하려 하는 남성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라고 여성에게 말하는 이는 정치학에 문외한이거나 고도의 사기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성억압체제가 남성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남성도 궁극적으로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남성성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 행복, 감격의 순간들을 박탈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요된 남성성 안에서 남성들은 과연 행복한가요.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무슨 사내자식이 이렇게 약해 빠졌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야. 이런 말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질적으로 여성스러운 남성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남성들을 억압하는 말입니다. 여자끼리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풍경은 자연스럽지만, 남자끼리라면 어떨까요. 한 집 건너 커피전문점이 있는 번화가에서도 남자 둘이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하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보통의 '어른' 남자들은 폭탄주를 몇 잔 들이키고 뇌가 마비되어야만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솔한 대화란 철저히 형님-동생, 선배-후배의 위계가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남성에게 요구되는 '남성적' 사회성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권위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즐거움, 육아의 기쁨, 수평적 대화에서 오는 정신적 교감을 빼앗아갑니다. 남성이 누리는 가부장적 특혜는 사실 이러한 손실의 이면입니다.

 







저는 남자로서 여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가 근본적으로 양성에게 정의롭기 때문에 여성주의를 지지합니다.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남성인 저는 여성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성적 이해와 그것을 토대로 한 의사소통 및 연대는 어떤 인간 사이에든 충분히 가능합니다.

 

잘나가는 기업의 사장님이 노동자들의 문화를 내면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론을 읽고 감명 받은 상무님이 노동자 편에 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28세의 남성인 저는 주저 없이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30. 09:30

 



제게 파란만장한 2학기를 선사했던 자기소개서 홍역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제 봐준 춘천교대 자기소개서를 끝으로 올해는 정말 빠이빠이입니다.


이제부터는 면접의 시즌입니다. 3학년 문과 면접지도 수업을 맡은 덕에 아이들은 제게 삼삼오오 몰려와 면접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알려줍니다. 정작 전 정시모집으로 대학에 입학했는데 말입니다.

 

안정을 원하는 시대 탓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의 적성이 그런 것인지,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교사를 지망하는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사범대를 지망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일반 대학에 가서 교직이수를 하고 싶다는 아이만 해도 3학년 전체에 30명 정도는 될 듯 싶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장난 반 떠보기 반으로 물어봅니다. 군필자 가산점에 찬성하냐고요. 백이면 백 모두가 찬성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에게 유리하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버리는 2년을 국가가 반드시 보상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남교사 할당제에 대해 물어봅니다. 처음에는 그게 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개념과 취지를 알려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신규 교원 임용을 할 때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었습니다. 결국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보수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로부터 엄청난 찬사와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남교사 할당제, 재미있습니다. 이 제도에 찬성하는 이들은 교육현장에서 남성의 비율이 턱없이 적으니 할당제를 통해 일정 비율 이상을 남교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올바른 성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입니다. 학교에 여선생님이 대부분이다보니 남자 아이들이 롤 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웃깁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 나오는 남성들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나 봅니다.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도 웃기고, '남성다움'이라든가 '여성다움'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성별만의 특징이 있다고 믿는 것도 웃깁니다. 우리는 '백인답다'라든가 '흑인답다'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묶을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인간을 규정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자답다' '여성스럽다'와 같은 말은 왜 자연스럽게 쓰일까요. 저는 음모론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남교사 할당제에 찬성하는 이들은 왜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있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까요? 골프장 캐디는요? 유흥업소의 여성들은요? 3교대 근무에 시달리는 간호사들은요? 왜 그 분야들에 대해서는 남성 할당제를 시행하자고 하지 않죠?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는데도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일선 학교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 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 온’ 분야입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제도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이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합니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합니까?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입니다. 7차 교육 과정을 도입하며 우리는 양성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햤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를 세우고, 교육 과정에서 아버지가 부재하는 현상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폭력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남교사 할당제의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의 시대입니다.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합니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할 때 만나는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교직의 여성성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왜 문제인지를 따져봐야합니다. 한쪽의 성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더도말고 딱 20년 전으로만 돌아가면 됩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교단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직의 남성화를 지적한 이가 있었던가요? 저는 84년생이라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아니오,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저 주도권을 빼앗긴 남성의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내가 짱을 먹어왔는데 한 군데에서는 열라 뺏기고 있으니 심통이 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을 키워내고 사회화하는 과정인데 이런 식으로 여성들에게 자리를 자꾸 내주다가는 남성 중심의 질서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신문사들이 여당 편이기에 대통령이 삽질을 해도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사회의 주요한 자리는 남성이 모두 차지하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직의 여성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여성이 교직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 좋은 직업입니다. 일도 별로 힘들지 않고 방학도 있고 야근은 드물고 칼퇴근 할 수도 있고 월급도 체불 없이 꼬박 나옵니다. 그렇지만 교직이 훌륭한 직업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몰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은 그만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몰리는 것입니다. 기업에서는 여성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자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관둘지 모른다고. 혹시라도 임신이라도 하고 출산이라도 하면 우리는 인력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환원하는 아주 부려먹기 편한 사고방식이 등장합니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해서 일을 관두는 여성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사회 여건을 탓해야 합니다. 여자라고 뭐가 좋아서 열달동안 배부르게 다니고 싶고 아이한테 매달려서 자아실현도 못하고 싶겠나요. 그렇게 말하는 회사 치고 사내에 놀이방 설치해주는 회사 본 적 없고, 여성한테 출산휴가랑 육아휴가 유급으로 팍팍 주는 곳 못봤습니다. 외국계 기업과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나마 교직은 이러한 차별이 적은 곳이기에 여성들이 교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교직의 여성화가 여성의 책임이고 개인의 책임인가요?

 

제가 노량진 임용 학원에 다닐 때 우리 강의실에 있던 120명의 수강생 중 남성은 고작 17명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시험을 보는 숫자가 이렇게나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열 번 양보해 응시인원의 문제를 따지지 않더라도, 정치학에서 말하는 양적소수자와 질적소수자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공은 인구 비율로만 따지면 흑인이 90%이고 백인이 10% 가량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부와 명예있는 직위는 백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당선이 전 세계 빅뉴스가 됐을 정도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세력들은 대부분 백인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양적소수자는 백인이지만, 질적소수자는 흑인이라고 말합니다. 교직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학교 현장을 찾아가보면 여성 교사가 훨씬 많다지만 교장과 교감 중 여성의 비율은 10%가 채 안 됩니다.

 

교직의 여성화를 지적하기에 앞서,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구조를 먼저 지적해야 합니다. 누구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생물학적인 성인데, 그것이 차별의 기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 실상 진상인가요. 단지 남성과 다른 염색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이너가 되어야만 하는 그들에게 교직의 여성화니 뭐니 하고 우려를 보내는 것은 배부른 투정이요, 헛된 기만입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학벌 없는'사람들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며 흥분합니다. 하지만 그 다른 목소리는 협상을 유도해내고, 공존을 지향합니다.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는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다른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밥그릇 투정 이상의 문제입니다. 그 밥그릇은 본래부터 온전히 남성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성들은 밥그릇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사리에 맞게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것이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라면 기꺼이 밥그릇을 공유하겠습니다. 전 훌륭한 교사이기 이전에 민주적이고 평등한 국가의 시민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23. 10:00




수능을 앞두고 학교가 자습 체제로 들어선 덕에 수업도 절반으로 줄었고, 학교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몸은 훨씬 더 피로합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있어서 그럴까요. 요즘 매일 생활기록부와 에듀팟을 보고 살았더니 이젠 글자만 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 인터넷 창을 띄우고 이것저것을 뒤적이다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성교제 하다가 걸리면 퇴학'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한 시민단체에서 전국 주요 지역에 있는 354개의 공학고등학교를 조사해보니, 81%에 달하는 286개 학교가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교칙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는 이성교제로 세 번 적발될 경우에는 퇴학을 당한다는 규정이 있어 최근 남학생은 전학을 하고 여학생은 자퇴를 한 데에서 발단된 기사였습니다.

 

사회가 워낙에 많은 19금을 강요해서 그럴까요. 청소년들의 연애를 금기시하는 문화는 어디에서부터 나온 지 궁금합니다.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이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는 것이라면, 16세에 잠자리를 같이 한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랑이라 부르는 그분들의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요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여소(여자소개)'를 통해 이성친구를 만나고, 금세 쌍무적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같은 재단 산하에 있는 운동장 건너편 **여고에 가장 많은 여친님들이 계신 것 같고, **실고에도 꽤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여고과 **여고에도 상당수의 형수님과 제수씨들이 있는 듯합니다. 아, 공학인 **사대부고는 자급자족이 가능한지 우리 학교 아이들과는 별다른 계약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하네요.

 

거리에서 종종 청소년 커플을 만납니다. 교복을 입고 손을 잡은 채 그들은 친구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을 마주쳐도 손을 놓지 않고, 더 밝게 방긋 웃으며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제 여자친구예요. 예쁘죠?

 

그래 안녕 ^^ (마..망할 것들)

 

 

저는 청소년 때 이성교제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커플들을 만나면 부러운 생각부터 듭니다. 중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찌질이’였던 탓에 연락하는 여학생이 딱히 없었고, 그 후에는 남고를 다녔기에 주위에 이성이 없었습니다. 물론 여고의 축제에 가본 적도 있고, 학원에서 여학생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청소년들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생소한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 커플들을 만나면서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제게 그런 경험이 없었고, 또 지금 솔로여서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순수하고, 맑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차서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갈수록 계산은 늘어가기 마련입니다. 고등학생 때는 교복 색깔이 이성친구를 만나는 데 큰 장애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학생만 되어도 학교를 따지고, 사회인이 되면 직장을 따지고, 연봉을 따지고, 집안을 따지게 됩니다. 사랑은 증발하고 온갖 계산만 남는 무미건조한 관계가 됩니다. 이 사람을 가장 사랑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기에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적령기에 이 사람이 내 옆에 있고 나랑 조건이 맞으니 상호 필요에 의해 결혼하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결혼을 하는 것이 2011년의 결혼문화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청소년들의 사랑은 얼마나 순수한가요. 그들은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온전히 빠져들어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보다 맑고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요. 오히려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근데 어른들은 왜 청소년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이것은 일선 학교에 만연한 엄격한 두발규제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저희 **고등학교는 학생인권에 있어서 굉장히 민주적인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두발이나 복장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허용하는 학교는 전국에도 몇 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학생부 선생님들과 학생회 지도부가 아침마다 교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학생회 지도부 네 명이 짜고 있는 박스 안을 통과해야 했으며, 복장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명찰이나 뱃지가 없거나,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어 손가락 위로 삐져나오는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삭발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에 학생부장이셨던 선생님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학생들은 머리가 길면 딴 생각을 해요.

 

근데 머리가 짧아도 딴 생각은 언제나 듭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청소년의 사랑이 학생의 본분을 벗어나는 행동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청소년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기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청소년기의 공부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인식, 즉 학력과 학벌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들어가면 세상은 전쟁터이고, 다른 모두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하나로 세상을 고착시키고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비루하고 단촐한 사고인가요.

 

대학 교직과정에서 배웠던 교육과정의 종류 중에는 잠재적 교육과정(latent curriculum)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육기관에서 교육 대상자에게 의도적이고 공식적으로 전달하려는 공식적 교육과정과는 달리, 잠재적 교육과정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상자들이 습득하게 되는 교육과정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선생님의 체벌을 통해 배우는 폭력 같은 것을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식적 교육과정 못지않게, 혹은 더욱 교육의 대상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이 잠재적 교육과정입니다. 지금의 제게 고등학교 때 분명히 배웠던 수열이나 극한에 대한 수학 문제를 가져온다면 전혀 풀 수가 없지만, 당시 선생님들의 모범적인, 혹은 실망스러운 행동들에 대해서는 줄줄이 읊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사랑은 그들에게 강하게 작용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할 때보다 삶의 동기가, 생의 에너지가 충만한 때가 있는 지를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하며,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떨리는 학생은 수업시간에 잠시 딴 생각은 할지언정 꾸벅꾸벅 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의 에너지가 공부에 이어진다면 꼰대들이 보기에도 그것보다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남녀 간의 거리' 등을 설정한 교칙을 만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칙을 만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청소년이 '학생'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 특유의 사회적 요소들을 이유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영달을 위한, 망할 성과주의도 빼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세상을 설명하려는 오류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랑은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 통제권한이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통제해야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통제권한 밖에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육자'라면 어떻게 청소년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를 통제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어른들보단 낫잖아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16. 10:00

 




바람조차 숨을 멈춘 고요한 밤

붉은 벽돌상자에서 쏟아지는 학생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그들의 어깨
무거운 책가방에 짓눌린다

지치고 가엾은 어린 영혼들
입시라는 벽에 부딪히고
푹 숙인 고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숨과 눈물 뿐이다


자유를 찾아 떠난 아이들
낙오자로 지탄받고
친구를 짓밟고 올라서는 자
모범생으로 칭찬받는다


오늘도 칠판 한 귀퉁이에서
자꾸만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대학이라는 포장지가
우릴 멋지게 싸주기만을 기다린다



詩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위의 글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야간자율학습을 하다 감정에 북받쳐 쓴 것입니다. 저렇게 공부를 싫어하고, 학교 교육을 불신했던 제가 지금은 강원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실의 풍경은 비슷합니다.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은 몇 되지 않고, 그 학생들조차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는 답을 들은 뒤에, 그럼 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지 질문을 던지면 멈칫합니다.
 


몇 년 전 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가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길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교육의 부조리와 경쟁력 저하의 원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서열화, 고교등급제, 본고사부활, 기여입학제 등을 주장하는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간 지나온 역사를 볼 때, 시장에서 나오는 결과란 다양성이 아닌 독점이었습니다. 교육기회의 독점이고, 사교육의 독점이고, 학벌의 독점이고, 그것이 곧 부의 독점이 되며 신분의 독점이 되어왔습니다. 경쟁이란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서열화되어 있지만,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교육의 효율성을 창출한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쟁이 아닌, 획일적인 시험 경쟁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은, 부모님들은, 어른들은, 주어진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 기능적인 사람,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하십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서열화 기준을 그대로 내면화하여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향하여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배울 기회를 놓칩니다. '자아 발견' 내지 '자아 재발견'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수가 높아 사회적으로 성과를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순간 우리는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역시 나는 위대해!'하고 자위하며 '가짜 자아'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내면은 공허해집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나 가족, 회사가 원하는 모습이지 결코 진정으로 내면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면이 말하는 대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율적이며 책임성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모두를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 명예나 권력이라는 외적 잣대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기준을 잣대로 하는 차별은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개성과 소질들이 더불어 존재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 출발점은 '자아 발견'일 것입니다.


학생, 학부모, 교사를 교육의 3주체라고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세 주체 중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다들 울상이고, 죽을 맛이라고 말합니다. 교실 안에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은, 교문을 나가는 순간 표정이 밝아집니다. 가끔은 제가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학교가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학교에 안 가도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생활 그 자체가 교육이 될 수 있는 마을 공동체 속의 삶을 소망합니다. 아이들의 생활공간이, 교육이, 학교 안으로 한정되지 않고, 살아가는 터전 전체로 이루어지는 날들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대로 살며 그때그때 행복한 삶을 희망합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더 나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