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존재/일요일, 학교에 안갔어'에 해당되는 글 30건

  1. 2012.02.04 착한 남자를 위한 변론 1
  2. 2012.01.30 공지영의 나꼼수 비판을 지지합니다.
  3. 2012.01.22 강릉 좌파 2
  4. 2012.01.15 유혹하는 여성, 처벌받으리라 1
  5. 2012.01.11 좋은 선배 3
  6. 2012.01.05 재벌 아이에게 점심을 사주고 싶습니다
  7. 2012.01.01 안 아파도 청춘이다
  8. 2011.12.25 전교조를 위한 변명
  9. 2011.12.18 담임이 없는 학교 3
  10. 2011.12.11 참된 선생질의 의미 8
2012. 2. 4. 16:00

수업이 없는 시간, 주차장에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재밌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성수고 최고의 그레이트 티처이신 B선생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롤 모델로 삼고 있는 B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은근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것 같애. 근데 실속이 없지? 너무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다 잘해주지마. 그리고 처음에는 좀 차갑게 굴어봐. 그러다 잘해줘야지. 하긴 이렇게 기술적으로 사람을 대하다보면 한계가 오지. 잘해봐.


나쁜 남자의 시대입니다. 내게 항상 웃어주고,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주고, 언제나 나만을 바라봐주는 착하지만 따분한 남자의 시대는 갔습니다. 요즘은 시니컬한 매력이 있는 나쁜 남자가 대세입니다.




훈훈한 외모,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 완벽주의적인 성향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그 남자. 물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데다, 까칠하기 그지없어 일견 싸가지까지 없어 보이는 그지만, 천천히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 순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다른 여자가 자기에게 다가와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차가운 그지만, 오직 '내 여자'에게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 겉으론 강한 척해도 속마음은 한없이 여린 남자,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내 여자를 지켜주려고 하는 든든한 그 남자. 그 어떤 여자가 그런 나쁜 남자의 치명적인 매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그 남자는 나쁜 남자입니다. 무조건 피하세요.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요즘에는 드라마에서도, 소설에서도, 심지어 연애 매뉴얼에서도, '나쁜 남자는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는 제법 솔깃한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 속의 나쁜 남자 길들이기, 참 쉽습니다. 




오늘 회사에 갓 출근한 키 크고 잘생기고 능력 있고 무려 회장 아들이기까지 한 나쁜 남자에게 다가가 따귀를 올려칩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부어오른 뺨을 움켜쥔 채 당신에게 다가와 치명적인 나쁜 매력을 뽐내며 이렇게 속삭입니다.

"날 이렇게 막 대한 건 니가 처음이야. 그런 니 마음을 빼앗고 싶어졌어"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고, 나쁜 남자인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한 나쁜 남자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내 여자에게만 길들여지는 나쁜 남자보다, 내 여자에게 역시 나쁘단 몹쓸 남자들 투성이요, 그런 남자들에게 속아서 우는 여자들 천지입니다. 뭐하러 눈보라 휘몰아치는 험준한 에베레스트에 어떻게 오를 수 있나를 고민하나요? 힘들지 않게, 그래서 즐겁게 올라갈 수 있는 가까운 산을 타는 즐거움을 느껴보면 안 되나요?




나쁜 남자도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할까요?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란, 능력있고, 차가운 매력을 가진 남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대체로 여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고, 오는 여자 안 붙잡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다지만, 어쩌다 마음을 준 '내 여자'에게만은 소년 같은 순수함을 보여주는 특성을 보입니다.

나쁜 남자의 마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쉽게 열 수 없는. 그래서 그런 그의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나에게만 열린 난공불락의 요새. 그 어찌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진입 장벽이 높은 만큼 자기가 한번 공략(?)하고 나면 남들은 절대 공략 못할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당신은 상대가 나쁜 남자란 걸 알면서도 그에게 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나쁜 남자? 결국 여자하기 나름이라구요!




하지만 그건 마치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먹고 싶은데 차갑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야식을 먹고 싶은데 살은 안 쪘으면 좋겠어요.’‘금연하고 싶은데 담배는 피웠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핑크빛 구름처럼 샤방샤방한 형상은 있지만 일단 논리라는 것으로 접근하면 한방에 훅 날아가 버리는 그런 환상입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처럼 나쁜 남자 중에서도 나만 바라봐주는 그런 남자도 있지 않을까요?

이래서 TV가 애들을 망친다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나쁜 남자는 없습니다. 당신만을 바라봐주면서도 매력적이고 능력 있고 남자라면, 그건 이미 나쁜 남자가 아니라 착한남자입니다. 나쁨과 한 여자만 바라보는 건 애초에 공존 불가능한 스토리입니다. 콜라의 톡 쏘는 맛은 원하면서도 이빨은 썩지 않길 바란다면? 콜라를 원한다면 이가 녹고 뼈가 상하는 걸 감수해야하고, 불량식품을 먹으면 배탈이 날 걸 감수해야 합니다.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짚었단 소리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제 경우만은 다를 거예요. 제 사랑만큼은 다를 거예요. 진심은 하늘에도 닿는다는데 그 사람 마음에 언젠가는 닿을 거예요."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당신 사랑만은 다르다고 칩시다. 죽을 만큼 노력하면 언젠가 될지도 모른다고 칩시다. 근데 하늘에 닿을랑말랑 죽을동살동 노력해야하는 나쁜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애초에 착한 남자를 만나는 게 훨씬 낫지 않나요? 왜 당신은 애초에 잘 닦인 8차선도로를 놔두고 왜 굳이 울퉁불퉁하고 물웅덩이까지 고여 있는 오프로드로 기어들어가려 하나요?

보이는 길밖에도 길은 있다지만 왜 몇 배의 노력과 몇 배의 시간과 몇 배의 마음고생을 해가면서 심지어 종착지가 없을지도 모르는 샛길로 빠져들어 가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당신의 정성에 감동하고 변하려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결코 쉽사리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착한 남자는 매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재미도 없어요. 그럼 안정적인 사랑을 원한다면 그런 치명적인 매력은 포기해야하나요?

잘못 짚었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잘못 짚었습니다. 착한 남자는 착한 남자고 재미없는 남자는 재미없는 남자일 뿐입니다. 나쁜 남자는 매력이 있고, 착한 남자는 지루하단 공식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건데 말입니다.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가 나쁜 남자입니까? 그렇다면 나쁜 남자를 길들이는데 들이는 노력보다, 차라리 착하면서도 멋있고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는 게 훨씬 쉬울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을 해보길 권합니다.




굳이 어려운 길을 찾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에겐 늘 미소를 보이는 그 남자, 바보 같게도 당신 부탁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는 시늉을 하는 남자, 당신이 잘못한 건데도 오히려 자신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남자. 너무 쉬워보여도,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조금 매력이 부족해 보여도, 결국 당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착한 남자입니다.

내 여자에게만 (그것도 가끔씩만) 따뜻한 나쁜 남자보다 내 여자에게는 언제까지나 따뜻한 착한 남자. 훨씬 매력 있지 않나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30. 18:12





양성평등 분야에서 한국은 아직 후진국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여자친구들의 얘기를 들을 때면, 남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 어떤 친구는, 부서 회식이 있을 때마다 부장님 옆에 앉을 것을 강요당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너는 부장님 옆에 앉아"라고 여자 선배가 지시한답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회사입니다.

 

맙소사. 지금은 2012년이고, 22세기가 100년도 남지 않았고, 스마트폰으로 열차좌석 예약도 되고 심지어 극장 좌석을 선택까지 해서 예매할 수 있는 시대인데. 술자리 좌석도 마음대로 못 정하다니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 때 예비역 남성들이 전투복을 입고 나올 때부터 불길했습니다. 전투복은 전투를 할 때 입는 옷인데,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국가의 심장부에 벌어진 평화시위에 왜 전투복을 입고 나와야 하는지 그때도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건 공익 출신인 제 전투복에 작대기 네 개가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퇴보가 명확합니다. 연약한 암컷들을 강인한 수컷들이 지키겠다는 말이었겠지요. 지금이 선사시대인가요. 석기시대인가요. 물론 가장 큰 책임은 폭력적 과잉진압으로 맞선 이명박 정권에 있습니다. 시위대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위권 행사에 나서는 수단으로 전투복을 동원하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더 발랄하고 아름다운 수단을 상상해야 합니다.

 

나꼼수의 마초주의가 구설에 올랐습니다. 정봉주 전 의원이 구치소에서 성욕감퇴제를 먹고 있다는 소식에 어느 여성 지지자가 비키니를 입고 응원하는 사진을 올렸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이에 대해 "가슴 인증샷을 옹호하는 마초들의 불쾌한 성희롱적 멘션들과 스스로 살신성인적 희생이라고 하는 여성들의 멘션까지 나오게 된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라고 개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꼼수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여전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공지영의 문제제기는 옳습니다.

 

공지영을 지지합니다.

 

정권교체를 향한 싸움이 너무 우악스러워졌습니다. 세밀하고 첨예한 맥락들이 생략되고 삭제되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가 이룩한 문명에 걸맞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싸울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세상의 투쟁은 아직도 테스토스테론만을 고집합니다. 정치적 마초들은 여성이나 소수자들을 희생시키고서라도 변화를 이끌어내려 합니다. 그 희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도 변화는 충분히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 중에 '벗을 권리'란 없으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많은 권리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보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진보성은 여성인권과 소수자인권에 대한 존중의 정도로 측정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 민주화, 정치적 민주화에 비해 인권 민주화는 아직 멀었습니다다. 마이너리티의 경우는 특히 더합니다. 한국은 아직 민주화 후진국입니다.

 

변화를 시작해야 할 사람들이 앞장서 과거 회귀를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변화를 부르짖는 사람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좌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앞으로는 나꼼수가 좀 더 세련된 감각과 문제의식을 갖추고 접근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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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22. 19:31

1.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베스트 셀러 코너에 있는 책 한 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남좌파'.

 

기존의 좌파들이 주로 서민과 노동자 계층에 속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했다면, 최근에 등장하는 좌파들 중 일부는 강남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며 8학군에서 공부했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합니다. 이들을 강준만 교수는 '강남좌파'라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경제개발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계층임에도 정치와 문화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권력을 비판합니다. 또한 노동자와 소수자들, 여성의 인권에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좌파들에 비해서 경제적인 결핍이나 소외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성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지닙니다.

 

 

 

 2.

 

저는 강남이 아닌 강릉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생각 없이,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거나 열심히 받아적다가 강릉을 떠난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여러 좋은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농활을 가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마르크스 계열의 사회학책과 문학이론서들을 접하면서, 문학과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당연하게 여겼던 지난 세월의 생각들과 심한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시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이십니다. 집이 부자인 것은 아니지만, 잘 나갈 때에는 억대 연봉을 받았던 슈퍼 우먼 어머니의 덕으로 저는 풍족한 대학생활을 누렸습니다. 전산실 근무, 입학처 알바처럼 용돈 벌이에나 신경을 썼을 뿐, 등록금 걱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고, 책 살 돈을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사고 싶은 물건들은 거의 다 살 수 있었습니다. 

 

 

 

3.

 

고3 시절, 저는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가야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카이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시기가 잠시나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강대학교에 와서 만난 선배들과 동기, 후배들, 그리고 책들은 제 시각에 상당한 드라이브 효과로 작동했습니다. 

 

돈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타인의 시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고 겪고 배운 것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저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해 속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대학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같은 강의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친구들 중에서도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교사 월급으로는 평생을 한푼도 안 쓰고 모아도 못 사는 아파트에는 사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저는 늘 흔들렸습니다. 

 

혼란스러웠던 1학년 시절에는 사람을 만나면 둘 중 하나를 경험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거나. 저는 누구를 만나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예스맨이 되었습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말에 절반쯤은 수긍했습니다.

 

 

 

5.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아온 친구들에게, 저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시골뜨기였습니다. 강릉에서 우리 집은 중산층 이상에 속했지만, 서울의 친구들이 보기에 저는 서민 중의 서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고 어머니가 보험을 하시면 살기가 힘들지 않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정말로 반대의 환경, 이를테면 시골에서 자라고 홀로 상경하여 낯선 서울에서 등록금과 용돈을 벌려고 아득바득하는 친구들에게는 제가 도리어 부르주아로 비춰지곤 했습니다.

 

내일의 걱정이 당면한 문제가 아닌 점, 먹고 싶은 음식은 다 먹고 사는 것, 일주일도 거르지 않고 당구를 치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거의 다 사는 것 등등, 그들의 눈에 저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였습니다.

 

 

 

6.

 

언젠가 술 취한 후배가 울면서 제게 했던 말은 한동안 큰 상처로 머물렀습니다.

 

"형은 먹고 살 걱정 안 하잖아요. 아르바이트도 안 하잖아요. 형이 야학을 하거나 농활을 가고 진보적인 잡지나 글을 읽는다고 뿌리가 바뀔 것 같나요? 배고파본 적 있어요? 저는 형처럼 야학을 하거나 책을 사서 보지 못해요. 야학할 시간에는 돈 벌어야 되고, 형이 밥먹듯이 사는 소설책 값은 내 한달 밥값이에요."

 

그 때, 저는 속으로 많은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 후배에게 제가 어떻게 보였는지에 관하여, 그리고 내 나름의 고민을 말하지 못하고 삭혀야 되는 것에서, '나보고 어쩌라고?'하는 당황함과, 좀 더 치열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기분은,

 

지금도 회상할수록 마음 한 쪽이 아려오기만 합니다. 그 얘기를 또 다른 강남부르주아 친구들에게 하면, 그들은 신경 끄라는 충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 얘기 듣고 상처 받으면 죽어야 된다고.

 

가슴 아픈 건, "신경 끄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열 받고, 그렇게 절반 쯤의 오해를 받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부르주아도 아니고, 정말 어려운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 나 자신은 어디에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

 

 

 

7.

 

부유하거나, 없이 지내거나, 그 중간이거나와 무관하게, 세상에 진보적인 시선으로 응시해야 할 가치들은 많습니다. 이를테면 부당한 권력과 언론, 온갖 왜곡과 곡해, 차별들. 그것들과 싸우거나 바꾸는데 있어서 계층이 꼭 문제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8.

 

대기업에 다니거나, 외국에 유학을 가거나, 법조인이 되거나 의사가 된 친구들에게는 좌파로 비춰지고, 대학에서 만난 몇몇 이들에게는 부르주아로 비춰지는 이중의 시선에서 늘 당황스럽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강남 출신 친구들의 보수성향, 성공강박증에 걸린 아줌마들, 그리고 그 배 튀어나온 욕심쟁이 아줌마들의 자식들, 철없이 소비에 몰두하는 된장녀들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일정부분 익숙한 것. 차별받는 소수들의 시선과 '자유'라는 문학의 기본정신에 깊이 동감하면서도 그것을 내 삶의 전체로는 확대하지 못하는 것.

 

 그 사이에서, 늘, 흔들립니다.

 

 

 

9.

 

스무살 초반에 인문학을 택하지 않고 경영학과에 갔다면 지금쯤 저는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당혹감을 느끼지 않고 조금은 가뿐하고 자유로워졌을까요. 그랬다면 약간의 권태를 고급문화로 소비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까요.

 

 

 

10.

 

그렇다면, 지금의 저는 무엇일까요. 계층도, 입장도, 관념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 노는 켄타우로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5. 17:43

안녕하세요 :) '학교를 안 갔어' 코너를 맡고 있는 스릉입니다. 먼저 포스팅이 늦어진 데 대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ㅠㅠ 오늘이 일요일인줄 몰랐어요....... 요즘 방학하고 잉여롭게 살다보니 날짜 감각이 없어요 헝헝. 오늘은 학교에서는 조금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재미없어도 재미나게 봐주시면 캄사하겠습니다!





남자들끼리 대화를 하다 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값)싸 보이는 여자', '꼬리치는 여자'에 관한 것인데요, 흔히 남성들은 '여자가 먼저 유혹해서 벌어지는 불륜이나 성행위, 만남은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다' 라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합니다. 


"그 년이 딴 새끼한테 꼬리쳐서 바람피웠다."

"야한 옷 입은 거 자체가 자기 꼬셔달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어.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기 때문에, 잠시만 혼자 놔둬도 바람 피워"
"지가 원해서 매춘하는데, 왜 남자들만 성매매 하면 죽일 놈 취급하지?"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음담패설은 단골메뉴이고, 그 음담패설이 대부분 여성의 바람끼(밝힘증이라고도 표현한다)나, 여성에 대한 은유로 채워져 있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을 살펴보면 곧 물음표가 생깁니다. 나이 들어서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원조교제를 하고, 술집에서 어린 여자들을 찾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여자가 성욕을 표시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면서 유혹하면 누구보다 환영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남자들이 여러 여자들을 사귀거나 같이 잠자리를 하면 '능력 있다' 라는 평을 듣는데, 왜 여자들이 그러면 '걸레' 라는 모욕적인 욕이 나올까요?


한국과 같이 보수적인 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의 야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섹스와 성에 있어서 여성들은 불리한 위치에 존재합니다. 아담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한 죄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평생 노동을 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성경의 내용, 그리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인류는 죄악에 노출되었다는 신화의 내용, 또 트로이 전쟁도 헬레네를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치정극이 아니었던가요. 여기서 문제되는 점은 남성들의 양가감정입니다. 


여성의 미에 현혹되고, 여성들이 한없이 아름답기만을 바라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들을 온갖 신화와 회화, 담론을 통해 저급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쾌락은 즐기되 책임은 회피하려는 저열함에 기인합니다. 


아리스토렐레스 같은 위대한 학자도, 신화 속의 영웅들도 모두 여성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남성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 저급한 여성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미를 취하면서도 그것을 깍아내리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요부가 유혹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는 남성들의 초라한 자기위안이야말로 팜므파탈로 상징되는 왜곡된 여성성의 진실이고, 팜므파탈이라는 코드를 만들고, 유포하며 즐기는 동시에 비판하는 양가성의 원인입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과에 아주 예쁜 여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남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꿀을 얻으려는 벌떼들과 같이 많은 선배·동기들이 그 여학생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술에 취해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학생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얌전히 공부만 했습니다. 1년이 흘렀습니다. 더러 몇몇은 그 여학생에게 직접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고, 몇몇 동기는 연정을 삭힌 채 군대에 갔습니다. 그리고 고백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이도 남아 있었습니다. 술 취한 동기의 넋두리를 들어주며 흥미롭게 그 사태(?)를 관찰했습니다. 결과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그 치사한 경쟁의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1년 동안 그 여학생이 자신도 모르게 '팜므파탈'로 둔갑해 있었다는 사실이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지요. 학교 남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돈 많은 유부남과 사귀기 때문이다, 방학 때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더라, 여름에 야하게 입고 화장한 것을 봤는데 영락없는 '나가요 걸' 이더라, 은근히 남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남자 여럿 잡아먹을 여자다.......(술 취해서 그 여학생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인간들이 나중에 소문이 퍼지자 서로 일치 단결하여 그 여학생을 성토하는 것을 보고 느낀 황당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백했다 실패한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퍼뜨린 것인지, 한을 품고 군대에 간 누군가가 퍼뜨린 것인지, 아니면 그 소문 중 몇 개는 사실인지,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평범한 한 여학생이 순식간에 팜므파탈로 변신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신화나 고전 회화, 그리고 역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의 존재와 내용에 대해서 저항을 갖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뱀을 두른 클레오파트라나 이브의 그림을 보고, 상자를 여는 판도라를 보고, 나폴레옹을 매혹시킨 조세핀의 일화와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그들을 요부로 각인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뿌리깊게 박히고, 여성들은 자신은 그들과 같은 요부가 아님을 다행으로 알면서 안도합니다. 


성매매 여성이 미군에게 찔러서 죽은 사건은 무심코 넘어가면서, 여중생이 죽으면 수십만명이 촛불을 들고 정의로운 자가 되는 현상도, 성매매 여성들은 요부들이고 값싼 여자들이라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은 지금-여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팜므파탈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비교하면서 안심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일탈과 맹목적인 몰두를 변명하기 위해서.


넬슨 제독의 애인 해밀턴 부인과 19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레카미에 부인에 대한 일화를 보면 04년에 출간된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정이현)이 떠오릅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돋보이는 학벌도 부유함도 소유하지 못한 평범한 여성. 그렇다고 온갖 아부와 먹이사슬이 횡행하는 학문에 몰두할 뜻도 없으나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기는 싫은 소비세대 여성. 그 여성이 택한 것은 남자를 통한 성공이었습니다. 만나되 잠을 자지는 않으며, 좋다고 말하되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그러다가 안정적인 남자를 만나서 순결을 바치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은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그 논쟁도 팜므파탈을 보는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체적인 사회인식을 포기하고 낭만을 허울 삼아 벌이는 색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느냐라는 반문부터 문체나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쟁까지. 하지만 이 소설에 관한 논쟁 중에서 현저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 평범한 여성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렇게 탐색하다가 안정을 발견하면 몸을 던지는 조신(?)하고 깨끗한(?) 여성들을 갈구하는 남자들, 그리고 욕을 하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조신한 이미지로 부와 명예를 갖춘 남자를 만나길 바라는 여자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런 여성들은 수없이 생겨날 것이고, 이 현실적이지만 수준미달인 소설에 대한 논쟁도 계속될 것입니다.


'람보'의 강인한 근육과 엄청난 능력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 환타지를 이용해 자신들이 벌인 더러운 전쟁의 패배를 영상으로 복수하는 것은 문제적입니다. 여성의 미를 원하면서 그 미를 순식간에 더러움과 요설로 격하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양분되어 있지 않으며, 한 인간에게 그 특징들이 혼재합니다. 


모든 구분들은 이해관계의 산물이 아닐까요. 성경이라는 경전과 신화의 견고한 이미지를 통해 남성들은 변명과 위안을 얻었고, 여성들은 자신들은 정숙하다는 면죄부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동의와 비열한 계산은 '구분'을 양산하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곁에 잔존합니다. 일상의 대화로, 영상 이미지와 소비의 형태로, 그리고 예술로.



팜므파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만들어질 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1. 20:25


좋은 선배란 무엇일까요. 이 말에 답하기 전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후배들이 좋아하는 선배의 기준이 있으니까요.

 

요즘 친구들에게 '좋은 선배' 란 보통 이런 것입니다.

 

 

밥과 술을 잘 사주고,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도,

선배의 짬밥과 경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와줬으면 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되도록 자기들에 맞춰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준다고 잘 따르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그런 선배들을 갈구했습니다.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욕하지 않고, 일이나 공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만나서 내 돈 쓸 일 없고, 그러면서도 간섭 안 하는 선배. 좋지 않은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런 선배들은 기억 속에서 흐릿합니다.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소위 말하는 '대세'란, 물과 기름처럼 혹은 비켜가는 돌팔매처럼 서로 섞이거나 충돌 하지않고, 필요할 때만 연합하는 '쿨'함을 추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쿨한 것을 추구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배를 이용하게 됩니다. 생각 없는 선배들은 대세에 맞춰서, 돈을 뜯기고, 지식과 경험을 뜯깁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와 같이 후배들이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월이 축적되면서 선배들이 느끼는 것은 묘한 상실감입니다.

 

어린 친구들에게 보상을 요구할수도 없고, 자기 시간과 돈, 경험만 뜯기는 묘한 싸이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과 함께 기대하지 않고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둘 고학년이 되거나 졸업하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춥니다. 각자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겠지요. 그러나 예전보다 대학시절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그리움의 강도는 훨씬 적을 것입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철없는 신입생부터 졸업생까지,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쥐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선배의 잔소리와 간섭, 권위를 비판하던 사람들이, 선배가 되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개념없는 후배들을 보고 한탄한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일정 부분 이런 인류 공통의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을 냅니다.

 

후배들이 게으르고 건방지다고 욕하던 선배, 애정어린 강요를 하면서 밤새도록 술잔을 놓고 말싸움하던 선배, 술꼬장 부리는 것을 보면 멱살 잡아서라도 버릇을 고치려 했던 선배,

 

잘못하고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으면 끝까지 비판하던 선배, 여자와 헤어졌을 때 무작정 위로하기보다는, 제 결핍과 나약함을 추궁하며 상대의 변절에만 분노하던 저에게 일침을 가하던 선배,

 

비싼 것을 사주지 못해도, 자기 책값과 식비를 아껴서 분식집 데려가던 선배.

 

그런 선배들과의 '부딪힘'이 없었다면, 그 부딪힘 때문에 분노하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저의 대학시절은 쿨하고 스트레스 없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어디서든 막막했을 것입니다.

 

어디에선가 아무런 대책없이 착취 당하거나 저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무개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인간들을 한없이 미워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선배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비슷한 짓이라도 했다가는 후배들에게 욕을 먹기 십상이니까요. 욕 먹지 않고, 더러 보통 사이로 지내더라도, '어려운 선배'로 '찍힐'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사람마저 거기에 아무런 회의없이 서둘러 따라가면 안 됩니다.

 

자기 사업이나 회사일 때문에 부딪히는 사람들의 '쿨'함이 부러운가요. 명함을 수없이 주고받고, 아무리 자주 만나더라도 거기에는 부딪힘의 아픔과 그 아픔에 동반되는 상호간의 책임과 정이 부재하지 않는가요.

 

사람은, 아프게 만나야 됩니다. 추억과 정은 바로 거기서 생긴다고, 저는 배웠고, 경험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제게 추억과 교훈을 주었던 '좋은 선배'들이 많습니다. 그들과의 부딪힘이, 저는 그립고, 고맙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5. 08:32






신입생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2012
년이 되었습니다. 시무식도 했고, 19일부터는 보충수업이 시작됩니다. 3월이 되면 입학식도 할 테고, 또 다른 일 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담임교사에게 가장 바쁜 시기는 3월입니다. 이것저것 조사할 것, 준비할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아이들 이름 외우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급식비 감면 대상자 파악 작업 역시 매년 3월이면 하는 일입니다. 요즘 어디 밥 굶는 아이가 있겠냐고 속 편히 생각하기 쉽지만, 2012년의 대한민국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합니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이 745만 명 쯤 된다고 하는데, 2011년에 점심값을 지원받은 학생은 97만 명에 달했습니다. 35명이 한 반이라면 한 반에 4~5명씩은 꼭 있는 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그만 무감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해 예산안에 대해 개거품을 물고 화내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예산부족을 이유로 복지예산을 크게 삭감했고, 그 과정에서 초중고생의 급식지원비가 0원으로 책정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서울시 전면무상급식과 오세훈의 자폭, 곽 교육감에 대한 권력층의 보복 등 여러 사건들을 지나왔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초중고 무상급식과 관련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논의의 층위가 한 단계 높아져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들먹이는 수준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선별적 복지라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이들이 주장의 출발점을 자신들의 논점이 아닌 보편적 복지라는 논점의 반대편에서 출발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등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재벌 자녀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복지혜택을 주자는 논리를 펼치면 될 것을 굳이 보편적 복지의 반대점에서 반박을 하려니 이런 무리한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나라 초중고에 부잣집 아이들, 특히나 재벌 자녀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 아이들이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는다고 해서 그걸 '혈세'라고 표현할 것까지 있을까요. 무상급식을 시행하면 1년에 2조원인가 하는 돈이 추가로 든다고 합니다. 큰 돈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재벌 자녀들이 공짜로 먹는 밥으로 인해 추가되는 돈은 얼마나 될까요? 재벌이라는 계층이 몇 %나 될까요? 이걸 논의한다는 자체가 우습습니다차라리 재벌들이 자녀들에게 부를 상속하는 과정에서 부리는 갖은 편법과 불법 수단을 제대로 적발해 납세 의무를 정직히 수행하게만 해도 그 자녀들에게 공짜 밥 주는 것 이상의 재원은 나올 텐데 말입니다.


저도 2010년부터 근로소득세를 내고 있습니다. 는 제가 낸 세금이 우리 아이들의 밥값으로, 교육비로 지출되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일 년에 수십 억 이상의 돈이 청계천 광장 유지비로 나가고 있고, 오세훈이 깔아놓은 시청 앞 잔디 관리비로도 그만큼의 돈이 나가고 있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다 뜯어내고 새로 까는 데 쓰는 돈, 기업을 경영한다는 핑계로 자기들 배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가 경제위기 닥치면 받아가는 공적자금, 이런 저런 특수활동비라는 명목으로 고위층 인사들이 개념 없이 써 대고 있는 돈, 그런 걸 바로 '혈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굳이 22조 이상의 돈이 들어가게 될 4대강 사업을 말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전 그런 돈이 훨씬 더 아깝습니다
.

 

사실 아이들이 먹는 밥, 그거 공짜 아닙니다. 왜 그걸 공짜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땅의 미래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려집니까? 연말에 새로 까는 보도블록, 쓰잘 데 없이 파헤쳐지는 4대강이 우리의 미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선별적 무상급식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비참한 일입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걱정해 무상급식을 신청하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관용과 배포가 배부른 그대들에게는 없습니다.

 

청계천과 4대강 사업을 불도저식으로 추진한 토목 대통령께서는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과거 우리가 남들에게 도움을 받았듯,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국격을 향상시키는 길이다."

 

좋습니다. 그것이 진정 국가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혼자 가오 잡기 위해 그런 것인지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진정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면, 그래서 이제는 남을 도와도 될 수준이 되었다면 쪼잔하게 아이들 '''마음'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맙시다.

 

이번 정부에서 전국적 무상급식을 지원해줄 예산을 확보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면, 저는 생애 처음으로 명박이를 이명박 대통령 각하라고 불러줄 의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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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 10:30

수능이 끝나니 3학년 전담 교사는 학교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며칠을 바보처럼 앉아 별로 할 것도 없는 교무부 일이나 깔짝거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학교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성수고에서 보낸 시간만 20개월이 넘는데, 천천히 도서관을 살펴본 적이 처음인 국어교사라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별관에 있는 학교 도서관은 장서가 몇 권 되지 않는 소소한 규모였지만, 생각보다 읽을 만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의 꼭대기에서 놀았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여덟 권이나 있었고, 최근 인기가 많다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여섯 권이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감하기엔 아직 이른 문제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청춘에 대한 담론이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통의 청춘 담론들도 이처럼 대개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짱돌을 들고 당신들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체제에 저항하라고 선동하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식입니다. 이 두 가지 담론이 팽창하는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간과했던 청춘들의 불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꿈꾸는 여당과 정권 교체를 희구하는 야당, 양측 모두에게 ‘청춘들의 불만’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등록금 투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들과 보수언론들은 이 문제를 선심성 복지논쟁과 장학금의 범위확대 문제로 국한시키며 정작 ‘청춘’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지 포퓰리즘 논쟁과 증세 논쟁, 부실사학 퇴출 논쟁, 장학금 확대 논쟁은 기성 세대의 이윤과 더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요.

 

등록금 투쟁이 야기한 정치권의 논쟁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라는 이들과 청춘은 원래 아프니까 힘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기성세대라는 사실과 등록금을 둘러싼 논쟁이 다른 범주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요. 바로 청춘의 담론에서 청춘들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춘의 범주를 20대, 혹은 후하게 쳐서 30대 초반까지로 설정하고 전개하는 세대론에는 일종의 ‘함정’이 존재합니다. 특정 시기를 ‘청춘’으로 명명하는 순간, 청춘의 현실과 고민은 철저하게 ‘시간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우석훈 식으로 짱돌을 드는 순간, 기성세대와 ‘특정 나이’의 청춘들은 적대적인 이분법 위에 놓여집니다. 짱돌을 들고 저항하라는 말은 일면 후련한 일갈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의 저항은 세대의 구분 없이 존재하는 문제들을 청춘들의 문제로 한정짓게 되는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현재 청춘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 이를테면 비정규직, 등록금, 학력 차별, 대학의 상업화, 다가올 초고령화 사회- 은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우석훈 식의 발언은 ‘88만원’이라는 기표 아래 청춘들의 현실을 분노로 휘발시켜 버립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다를 바 없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는 제자들과의 상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청춘들의 고민과 현실을 보여주는 표본집단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한 저항과 위로는 상당부분 적실하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체계는 그렇게 간단히 전복되거나 "화이팅!“ 이라는 구호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로 군림하며 청춘들에게 힘을 보태주려는 듯한 책들은 일시적인 위안에 머물며 청춘들이 처한 상황을 개인의 극복의지와 의식화라는 영역으로 축소시킵니다.

 

매년 대학 입시가 끝날 무렵 보수언론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입시영웅’들의 신화처럼 의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그 기사들은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입시제도라는 ‘구조’를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무책임하게 짱돌을 들고 맞서라는 언술이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옵니다.

 

현재의 청춘들은 과거의 세대들처럼 투쟁과 혁명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가혹한 세대 내 경쟁에 내몰린 세대들은 변화를 꿈꾸지 못한 채로 조로한 청춘이 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세대 내 경쟁은 청춘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생존에 대한 불안은 청춘들의 관심사를 축소시켰습니다. 지금 여기의 청춘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안을 주입하는 살벌한 세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고 청춘들 개개인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소중합니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면서 건네는 충고와 위로보다는 불안한 청춘들이 행하는 자기 고백이 고립된 청춘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경쟁의 일상화는 개인의 내면에 견고한 벽을 형성시키고, 그 안에 고립된 청춘들은 일방적으로 매도되거나 훈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고통을 강요하는 세계 안에 던져진 청춘들이 연대와 저항을 꿈꾸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요. 경쟁의 대상이 아닌, 외롭고 아픈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동료들을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당신도 삶이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면, 그래서 단자적인 고립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개인의 성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는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좀 더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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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5. 08:30
 

존경하는 전교조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은 자주 눈물을 흘리십니다. 전교조가 사사건건 매도당해서, 선생님들의 진심을 이 사회가 몰라주는 게 억울해서가 아닙니다. 십수년간을 온몸으로 버텨왔건만, 우리 교육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아이들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져서, 그래서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선생님은 우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오후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을 때 피로를 이기지 못해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에 학원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전교조를 한답시고 날마다 동분서주하는 것은 저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덜어줄 수 있을지, 12년간의 학교 교육이 실은 12년간의 집단 아동 학대인 나라에서, 교육을 둘러싼 지옥 같은 경쟁이 이제 꼭대기까지 차오른 나라에서,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 1989년에 설립된 이 노동조합은 교직원의 권리를 수호하고, 교육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참교육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탄생한 단체입니다. 수구꼴통 일색인 우경국가 대한민국에서 여느 노동조합이 그렇듯, 탄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숱한 고난, 비난, 힐난을 당해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전교조가 하는 일이라면 우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놓으려는 세력이 생겨났습니다. 조중동은 원래 그랬지만, 학사모라는 이상한 학부모 단체에다 더해 자유교원노조라는 더 이상한 교원단체까지 생겼습니다. 이들은 아예 안티 전교조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전교조를 미워할까요.

 

전교조가 제 밥그릇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교사가 밥그릇 지키면서 편안하게 사는 확실한 길은 전교조 활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요모조모 준비해 승진에 필요한 점수 따고, 안팎으로 둥글게 처신하는 게 최선입니다.

 

전교조는 조합원 수가 9만 명이나 되는 거대 조직이고, 그 속에는 다양한 성향들이 뒤섞여 있습니1다. 교사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중산층 의식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전교조 운동에서 교사 집단의 기득권 수호 의식 따위가 중심에 서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학벌대 많이 보내는 학교를 찾아 비싼 집값을 무릅쓰고 이사하기를 마다 않는 맹모들의 나라에서 전교조는 늘 외롭고 힘에 부쳤습니다. 정권은 시도 때도 없이 반교육적인 정책들로 불을 질렀고, 전교조는 그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불을 꺼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의 투쟁은 늘 격한 구호로 채워졌고, 또한 언제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전교조는 여기저기서 미운 오리 새끼 신세입니다. MB정권에서는 학교별 조합원 수를 공개하게 법령을 만든다고 난리더니, 반국가 불법행위 고발센터를 만들어 이적단체로 고발하겠다고 나서기도 합니다. 교육감 후보 선거자금을 지원했다며 수사를 의뢰하자, 검찰은 즉시 수사로 화답합니다. 한나라당은 교원노조 교섭권을 더 제한하는 법률로 확인사살을 하겠다고 하고, 교육기술과학부는 6년 전 체결한 단체협약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통보해 쐐기를 박아주시며, 교육청은 단체협약 해지로 사무실을 비우라, 마무리 한 방을 날립니다. 교원평가 여론전에서 밀려 전교조가 왜 교원평가를 반대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교사만 평가를 안 받을 수 있냐는 핀잔이고, 학교 현장에서 인심을 잃는 조합원도 많은 듯하며, 조합원이 줄기 시작한 지 몇 년입니다.

 

이 나라는 모든 것이 힘 있는 자의 논리대로 돌아갑니다. 교원노조법은 애초부터 교원의 교섭단 구성을 원천봉쇄합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도 무시해 집회를 하려고 하면 아이들을 두고 어디 나가냐고 합니다. 근로 조건 문제를 들고 나가면 밥그릇이나 챙긴다고 하고, 교육정책을 말하면 정책은 교섭 사항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사의 일터가 바로 교육의 현장이고, 해야 하는 일은 교육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헌법에 보장돼 있다는 것은 안전에도 없습니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집니다>는 구호를 내세우는 사람이 서울시교육감으로 있었으니,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인정조차 없는 셈입니다.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습니다. 전교조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유일한 교원노조가 아니며 흠이 없는 조직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싸워 척결할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른 목소리가 없는 세상은 갈등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입니다. 전교조가 아니라면 누구도 교육현장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학교를 서열화하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이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0교시 수업에 반대하는 선생님들도 사라질 것이고, 학교 안, 교육 현장에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선생님들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지만, 미꾸라지가 살지 못하는 물은 이미 썩어서 아무도 살 수 없는 물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전교조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8. 08:30

2011학년도가 끝나갑니다. 다음 주면 저희 학교도 겨울방학을 합니다. 파란만장했던 2011년, 저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1교무실의 교무부로 내려와 많은 업무를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담임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 지금 해내야 할 일이 명확한 것이 업무라면, 담임의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니까요. 몸은 작년보다 올해가 더 힘들고, 평균 퇴근시간도 훨씬 늦어졌지만, 신경을 쓰거나 골몰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는 훨씬 덜합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를 가득 채운 이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 제 아이들은 하나도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괜히 부담임을 맡은 3학년 4반에 기웃거리고는 했습니다. 제가 아무때나 들어가도 이상하게 여겨지 않았던 1학년 3반 아이들과 달리, 3학년 4반 아이들은 묻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생각해보면 작년 우리 반 부담임이셨던 전 선생님도 수업이나 행사가 아니면 우리 반에 들어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한 작년 우리 반 애들을 보면 뭔가 찌릿하고, 내것을 뺏겨버린 것만 같아서 아쉬운 기분이 종종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봅니다.

 

학교엔 꼭 담임이 필요한가요? 왜 담임은 있어야 하나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이라 일컫는 교육, 즉 제도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담임선생님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기억에 남는 담임선생님 한 분쯤은 있을테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그때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은 담임선생님 한 분쯤도 있을 것입니다. 담임이 없는 학교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벌이는 오류 중 하나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기준으로 학교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교들은 세상의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특징을 지닙니다. 그것을 일반화시켜 생각해 버리는 일은 언제나 몰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대학교에는 담임이 없습니다. 지도교수라는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 분은 담임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그분이 학생에게 영향을 끼칠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성인으로서의 대학생들은 스스로 모든 행동에 책임을 갖고 행동합니다. 조회나 종례가 없는 대신, 공지사항을 놓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며,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집니다. 공부를 잘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사회적 압박이지 결코 누군가의 으름장이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대학같이 될 수 있을까요?

 

‘담임결정론’이 있습니다. 한 해의 운세는 학기 초에 배정되는 담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담임은 대한민국 학생의 1년 행복을 좌우합니다. 1년이 저당 잡히기는 학생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 증후군’이 학교를 떠돕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특히 원로교사분들은 담임을 서로 안 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몇 년에 한 번은 꼭 담임을 맡는다는 것을 학교 내규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출퇴근 부담이 없고, 승진도 자유롭고, 방학이 있고, 퇴근 시간이 빠른 것과 같이 ‘좋은 직장’의 조건만을 따지는 선생님의 ‘자질’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담임을 맡으면 담임 수당이 더해집니다. 기피 원인은 담임이 되면 겪는 잡일과 행정 업무 때문입니다. 교과를 지도해야 하는 것은 다른 선생님과 마찬가지지만 더 일찍 출근해야 하고 공문 처리도 많이 해야 하며, 아이들에게 신경쓰면서 겪는 심적인 부담도 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하는 좋은 선생님일수록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학교를 경험한 수많은 학생 출신 국민들이 증명하듯, 담임에 따라 학교생활이 좌우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비민주적,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교육도 이제 점차 교육에 대한 학생의 주체적인 선택권이 보장되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어 교과목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쪽으로 교육과정이 수정되어가고 있습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과목을 배우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는 점점 더 민주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불평하는 '야간강제학습'이나 '체벌'은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말대꾸'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받는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다면 담임제도는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본질적으로 담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관리의 책임'에 있습니다. 관리대상으로서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관료제 체제하의 중간단계로서 담임이라는 위치를 설정해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식으로 하면 소대장이 될 것이고, 회사식으로 말하면 과장이나 부장이 될 것입니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학교당국의 지침을 전달하고, 감독하고, 통제합니다. 말썽은 부리지 않는지, 싸우진 않는지, 다친 이는 없는지 보살피는 것 역시 담임의 몫입니다. 이것은 학교를 하나의 관료체제로 보는 것입니다.

 

즉, 국가의 목적(근대 국민의 양성)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는 효율적인 통제와 작동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조직이 필요한 것이고 그 최일선에 담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수의 대상(학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필요한 존재가 바로 담임입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학생을 관리의 대상,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조직은 군대조직과도 같습니다. 시스템과 목적이 다를 뿐 작동원리는 비슷합니다. 효율적인 관리라는 미명 하에 담임의 전권행사, 횡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잘되면 신경써주는 일이 되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억압하는 일, 강제하는 일이 되기 일쑤입니다.

 

담임이 통제의 책임을 지는 한은, 학생과 교사간의 평등한 관계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교사가 무조건 옳고, 학생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권력과 폭력, 점수와 기록의 이름으로 가능할 뿐이지 그외의 능동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키기는 힘듭니다. 미성숙한 존재라고 하여 학생에게 주체적인 판단권을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중, 고등학생이라고 눈코입을 다 닫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만큼 책임있는 판단을 위해 학생 스스로가 좀 더 노력하게 해주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학생 육성의 목적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고분고분하며 순응적인 학생을 길러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말대꾸하는 학생을 반기지 않습니다. 무한경쟁에 적응할 수 있는 학생을 기르기보다는 패배를 용인할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시키는 일에 군소리 없이 따라주는 벙어리 국민을 키워내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치열한 대학입시와 자리잡기 싸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키워낸 학생들이 그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쟁을 없애야 한다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 행동이 없기에 어른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목적삼고 계획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여야 하는지 제도상으로 정한다는 것은 분명 이견이 있을 일이지만, 그 방향성 자체는 대한민국 자체가 동의해도 좋을 일입니다. 왜 교사는 노예를 키워내야 하나요?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체제순응적인 노예를 키워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국 담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 어떤 식의 교육이 미래 한국에 필요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담임이 학생의 권리를 대신하여 행사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학부모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실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태어날 리 없습니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이론적으로 합의를 끌어내봤자, 우리 앞에 서있는 거대한 괴물인 입시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돈만 잘 벌면 오케이, 앞에서는 모두 깨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잘가면 그까짓 인권 따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들이 있는 한 그 어떤 논의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를 바꾸자 라는 말을 대학을 좀 더 보내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같은 배를 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몇몇 어른들과, 미성숙한 존재를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남겨두려는 몇몇 집단들의 해묵은 사고방식에 대해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담임이 사리지게 되면서 겪게 될 교사권력의 공백과, 교사가 단지 점수만을 부여하는 점수기계로 전락할 가능성, 인성교육마저 학교에 떠맡기려는 고전적 교육관 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검되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한 관료제 중간기구로서의 학교가 일정한 국가통제를 벗어나게 되면서 얻게될 혼란 역시 예상되는 일입니다. 결국, 교육의 문제도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서 한발짝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애정결핍이 일상화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테두리를 걷어내는 일이, 즉 담임제를 없애는 것이 그들을 더욱 외로움으로 밀어넣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돈을 벌기 바빠서 가정일조차 경쟁적으로 하는 부모님 밑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담임은 어쩌면 가장 믿을만한 어른일지도 모릅니다. 그 관계는 다만 점수를 주고 말고의 관계를 떠나, 서로에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갖는 매우 기초적인 인간관계의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학생 스스로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목적의식 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그들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고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만 시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학교를 오지 않든, 수업을 땡땡이치든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학생 자신이 비바람 앞에 홀로 서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놔두는 것입이다. 패배의 책임도, 좌절의 책임도 모두 학생에게 일임하고 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1. 10:00








학교가 양성하고자 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의 인간상일까요?


저는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 경력도 이제 겨우 2년차인 초보 교사입니다. 아직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르며, 아이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생 노릇인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 여기 저기 참고서를 보고 일일이 메모해 두었다가 수업시간에 자료로 활용하는 것, 그런 것이 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 교훈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근면, 정직, 성실’입니.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근면하기만 하거나 정직하기만 하고, 성실하기만 사람을 학교가 길러 내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한때 전경련에서 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업 경영자들의 모임인 전경련이 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이것은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자본의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만나는 지문이나 작품마다 해줄 얘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간혹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면서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노동탄압에 대한 예를 들거나 노동자의 권리 등을 얘기할 때면 어김없이 반박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아마도 장차 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처럼 자본의 시각에서 반박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조중동을 읽고 있습니다.

 

노동자 의식을 거세한 인간 양성

 

이것이 자본이 원하는 인간상입니다. 교육부가 어떤 의도에서 전경련의 교과서 집필을 허용하려고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노예인데 생각은 주인의 머리를 가진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은 민주시민을 양성하지 않겠다는 반교육적 교육포기 선언과 같습니다.

 

정직하기만 한 사람, 근면하기만 한 사람. 이런 교훈은 주로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가 자본이 원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내걸었던 교훈입니다. 왜 강원도의 학생들은 희망버스를 빨갱이들의 집단 선동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르바이트를 하면 반드시 최저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무노조 경영은 왜 지지할까요?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주변에서 듣고 배운 사회교육의 결과입니다.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요?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를 두고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친일 세력의 후예들이 만들어 준 국정 교과서를 열심히 가르쳐 주면 훌륭한 교사일까요? 불의한 세상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키워 주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이 될까요? 머릿속에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환경의식이 없으면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민주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민주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질 높은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학교가 길러야 할 인간상은 품행이 방정하여모범상을 받는 학생이 아닙니다. 골든벨을 울려 스타가 되는 학생은 더더욱 아닙니다. 노동자 의식을 가진 건강한 인간, 내가 누리는 작은 자유가 우연히 던져진 것이 아니라 선배들의 피땀으로 일구어 낸 소중한 가치라는 역사의식을 가진 인간, 비판능력과 주권의식을 가진 건전한 인간, 권리의식과 평등의식을 가진 그런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있어도 생각이 없는 사람을 길러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불행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직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존재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