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 08:30

괴물들이사는나라
카테고리 유아 > 4~7세
지은이 모리스 샌닥 (시공주니어, 2002년)
상세보기

별점평 : ★★★★★
줄평 : 우리 안의 어린이를 위해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데 한참의 시간이 흘렀네요. 사실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무엇보다 꼭 연재기일을 지키자는 굳은 다짐을 했었는데 뵐 낯이 없습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시작하는 '우리 처음 만난 날'이 될 거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동안 제게는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입사를 하게 되었다는 빅뉴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과 그림책을 만드는 에디터로 무럭무럭 자랄 예정입니다. 책이 좋아서 국문학과에 가고, 이 코너도 연재하고,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러고보니 저는 참 뻔하고 일관성이 있는 인간이네요. 흐흐 묘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책도 동화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아마 익숙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 동명의 제목 영화로도 나왔었죠? 이 책은 NHN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그림이 너무 예쁘고 신비로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간 책이었습니다. 어른이 무슨 동화책이냐? 하실 분들은 아마 없으시겠죠? 오히려 이 작은 책이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책들보다 더 짙은 진심을 전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주인공은 맥스란 소년입니다. 우리네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아있는 개구쟁이 소년이죠. 어느날 밤, 늑대옷을 입고 장난을 치던 맥스는 엄마에게 벌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자기 방에서 벌을 받던 맥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방이 밀림과 강으로 변했거든요. 

 
맥스는 배를 타고 괴물들의 나라로 떠납니다. 괴물들의 나라는 어떤 나라냐구요? 아마 누구든 한번쯤은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상상해봄직한 그런 나라예요.


맥스는 이런 괴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자신이 왕이라고 우기며 괴물들을 설득 내지는 제압하게 되죠.


귀여운 왕관까지 쓰니 그럴듯 하죠? 현실에서는 툭 하면 혼나고, 알게 모르게 컴플렉스나 스트레스가 있을지 모르는 맥스는, 그렇게 괴물들의 나라에서 강하고 씩씩한 왕이 됩니다.


아이들의 일탈이란 이렇게 스케일이 큽니다! 어른들은 고작 여행밖에 생각해내지 못하는데 말이죠! 괴물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재밌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맥스는 문득 쓸쓸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맥스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렇게 맥스는 아직 식지 않은 저녁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스틸컷은 크게 상관이 없지만ㅋ)


이 책의 저자인 모리스 센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책 작가 입니다. 1928년 브루클린에서 약한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혼자 종이에 뭔가 끼적거리기 좋아하는 섬세하고도 고독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굉장히 근엄해보이시지만.. 사실 어린이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또 여든이 넘어서도 여전히 동심을 간직한 분이세요!

 

학교신문에 풍자만화를 그리던 고등학생, 뉴욕의 아트스쿨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던 대학생은 1951년부터 어린이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초기 작품은 대부분은 흑백이었다고 하네요! 그의 3부작이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 '깊은 밤 부엌에서', '저너머 밖에서는'에 대해 센닥은 "아이들이 노여움, 지루함, 두려움, 분노, 질투와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들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마주치게 되는가 하는 동일한 주제를 바탕으로 해서 변화를 준 것 뿐이다"라고 담담히 말하기도 했죠.


센닥은 어린이를 그냥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안에 여전히 살고 있는 어린이를 발견해내는데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라고 합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최고의 상, 칼데콧상을 수상한 그의 수상식 소감으로 끝인사를 대신할게요!

 "어린이의 갈등이나 고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허식의 세계를 그린 책은 자신의 어릴 때의 경험을 생각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이 꾸며 내는 것이다. 그렇게 꾸민 이야기는 어린이의 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 이 동영상에는 동화책 장면과 원어(영어) 동화구연이 들어있어요! 필요하신 분들은 꼭 한번!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30. 18:12





양성평등 분야에서 한국은 아직 후진국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여자친구들의 얘기를 들을 때면, 남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 어떤 친구는, 부서 회식이 있을 때마다 부장님 옆에 앉을 것을 강요당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너는 부장님 옆에 앉아"라고 여자 선배가 지시한답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회사입니다.

 

맙소사. 지금은 2012년이고, 22세기가 100년도 남지 않았고, 스마트폰으로 열차좌석 예약도 되고 심지어 극장 좌석을 선택까지 해서 예매할 수 있는 시대인데. 술자리 좌석도 마음대로 못 정하다니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 때 예비역 남성들이 전투복을 입고 나올 때부터 불길했습니다. 전투복은 전투를 할 때 입는 옷인데,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국가의 심장부에 벌어진 평화시위에 왜 전투복을 입고 나와야 하는지 그때도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건 공익 출신인 제 전투복에 작대기 네 개가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퇴보가 명확합니다. 연약한 암컷들을 강인한 수컷들이 지키겠다는 말이었겠지요. 지금이 선사시대인가요. 석기시대인가요. 물론 가장 큰 책임은 폭력적 과잉진압으로 맞선 이명박 정권에 있습니다. 시위대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위권 행사에 나서는 수단으로 전투복을 동원하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더 발랄하고 아름다운 수단을 상상해야 합니다.

 

나꼼수의 마초주의가 구설에 올랐습니다. 정봉주 전 의원이 구치소에서 성욕감퇴제를 먹고 있다는 소식에 어느 여성 지지자가 비키니를 입고 응원하는 사진을 올렸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이에 대해 "가슴 인증샷을 옹호하는 마초들의 불쾌한 성희롱적 멘션들과 스스로 살신성인적 희생이라고 하는 여성들의 멘션까지 나오게 된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라고 개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꼼수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여전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공지영의 문제제기는 옳습니다.

 

공지영을 지지합니다.

 

정권교체를 향한 싸움이 너무 우악스러워졌습니다. 세밀하고 첨예한 맥락들이 생략되고 삭제되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가 이룩한 문명에 걸맞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싸울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세상의 투쟁은 아직도 테스토스테론만을 고집합니다. 정치적 마초들은 여성이나 소수자들을 희생시키고서라도 변화를 이끌어내려 합니다. 그 희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도 변화는 충분히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 중에 '벗을 권리'란 없으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많은 권리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보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진보성은 여성인권과 소수자인권에 대한 존중의 정도로 측정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 민주화, 정치적 민주화에 비해 인권 민주화는 아직 멀었습니다다. 마이너리티의 경우는 특히 더합니다. 한국은 아직 민주화 후진국입니다.

 

변화를 시작해야 할 사람들이 앞장서 과거 회귀를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변화를 부르짖는 사람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좌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앞으로는 나꼼수가 좀 더 세련된 감각과 문제의식을 갖추고 접근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 > 일요일, 학교에 안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학을 앞둔 우리 아이들에게  (1) 2012.07.16
착한 남자를 위한 변론  (1) 2012.02.04
강릉 좌파  (2) 2012.01.22
유혹하는 여성, 처벌받으리라  (1) 2012.01.15
좋은 선배  (3) 2012.01.1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26. 10:19

안녕하세요. '학교를 안 갔어' 코너를 맡고 있는 일요일의 남자, 스릉입니다. 저도 야구 좋아하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지는 편인데데, '치고 달려라'  코너가 몇 주째 비어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불시습격!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



원투펀치란 권투의 잽+스트레이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야구에서는 팀내 최고 선발투수(1선발)와 그 다음 선발투수(2선발)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입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고, 단기전은 특히나 더 그런 성격이 강한지라 뛰어난 투수 두 명만 있으면 웬만해서는 질 수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커트실링과 랜디존슨을 들 수 있겠네요. 이 때 애리조나는 '제국' 뉴욕양키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이 두 선발투수로만 4승을 전부 따냈습니다. 한국에서도 원투펀치라 부를 수 있는 선수들이 몇 존재했는데요, 82년부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순위를 매긴 기준은 두 명의 선수가 따낸 승리의 합입니다.



1위 (50승 합작) 85년 삼성 김시진(25승) 김일융(25승)

 

85년 김시진 25승 5패 10세이브 269 2/3이닝 201탈삼진 평균자책점 2.00

85년 김일융 25승 6패 0세이브 226이닝 107탈삼진 평균자책점 2.79  

 

 

1985년은 지금보다 23경기나 적은 팀 당 110경기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시진과 김일융은 각각 25승씩을 따냈습니다. 여러분이 프로야구 감독이라고 가정할 때, 팀 내에 25승씩을 올려줄 원투펀치가 있다면, 벤치에서 더 이상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 두 명의 투수가 있는 한, 1985년의 삼성라이온즈가 77승 1무 32패라는 7할대 승률로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을 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2위 (42승 합작) 83년 삼미 장명부(30승) 임호균(12승)

 

83년 장명부 30승 16패 6세이브 427 1/3이닝 220탈삼진 평균자책점 2.34

83년 임호균 12승 15패 2세이브 234 2/3이닝 86탈삼진 평균자책점 3.03

 

 

얼마 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알려져 많은 야구팬을 안타깝게 했던 원조 괴물투수 너구리 장명부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로도 잘 알려진 임호균입니다. 장명부는 한 시즌 동안 무려 427 1/3이닝을 소화해내며 전무후무한 한 시즌 30승을 따냈습니다. 풍문으로는 삼미의 회장이 30승을 따내면 1억을 준다고 했다고 하던데, 30승을 따내도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듬해에는 고의적으로 시즌을 망쳐버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1982년에 15승 65패라는 1할대 승률로 망신을 당했던 삼미슈퍼스타즈는 1983년 이 두 선수의 가세로 52승 47패를 기록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됩니다.

 

 

 

 

3위 (38승 합작) 90년 해태 선동열(22승) 이강철(16승)

 

90년 선동열 22승 6패 4세이브 190 1/3이닝 189탈삼진 평균자책점 1.13

90년 이강철 16승 10패 5세이브 220 2/3이닝 165탈삼진 평균자책점 3.14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최고의 투수 선동열과 최고의 잠수함 투수 이강철의 조합입니다. 해태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해태 타이거즈는 이 해에 LG 트윈스에 한 게임 반 차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내준 뒤,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한국시리즈를 3위로 마감했습니다. 만약에 이 해에도 해태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다면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었을텐데, LG 트윈스가 우승한 것은 프로야구 전체로 볼 때 행운이었을까요? 불운이었을까요?

 

 

 

 

4위 (37승 합작) 84년 롯데 최동원(27승) 임호균 (10승)

 

84년 최동원 27승 13패 6세이브 284 2/3이닝 223탈삼진 평균자책점 2.40

84년 임호균 10승 9패 0세이브 161 2/3이닝 44탈삼진 평균자책점 2.95

 

 

선동열과 함께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롯데의 최동원 선수와, 삼미를 떠나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뒤 다시 한 번 강한 메이트를 만나 최고 원투펀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행운아(?) 임호균 선수입니다. 아쉽게도 롯데 유니폼을 입은 임호균 선수의 사진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84년의 롯데 자이언츠는 최동원이라는 괴물투수의 활약에 힘입어 구단 사상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때 한국시리즈에서 롯데가 거둔 4승이 모두 최동원 선수의 것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혹사 논란에 시달렸겠죠? 84년 최동원과 92년 염종석을 예로들며 안경을 쓴 특급 에이스가 등장할 때가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할 때라고 하던데,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안경 쓴 투수들을 눈여겨 보는 것도 야구를 보는 흥미거리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5위 (36승 합작 + a) 00년 현대 정민태(18승) 김수경(18승) 임선동(18승)

 

00년 정민태 18승 6패 0세이브 207이닝 153탈삼진 평균자책점 3.48

00년 김수경 18승 8패 0세이브 195이닝 172탈삼진 평균자책점 3.74

00년 임선동 18승 4패 0세이브 195 1/3이닝 174탈삼진 평균자책점 3.36

 

 

이제는 아쉽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2000년대의 최고 명문팀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현대 유니콘스를 꼽겠습니다. 타 팀은 한 명이라도 보유하기 힘든 18승 투수를 세 명이나 보유한 현대유니콘스의 2000년 시즌 우승은 당연해보입니다. 2위인 두산과 무려 16게임 차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한 뒤, 한국시리즈 우승컵까지 가져갔습니다. 이 해에 현대 유니콘스가 기록한 91승은 역대 KBO 한 시즌 최다승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5위 (36승 합작) 89년 해태 선동열(21승) 이강철(15승)

 

89년 선동열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198탈삼진 평균자책점 1.17

89년 이강철 15승 8패 5세이브 195 1/3이닝 137탈삼진 평균자책점 3.23

 

 

90년에 38승을 합작했던 선동열 이강철 콤비는 그보다 일 년 전인 89년에도 36승을 합작해냈습니다. 하지만 89년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은 해태 타이거즈가 아닌 빙그레 이글스였습니다. 빙그레 이글스는 이 둘에 못지 않은 16승 듀오 이상군과 한희민을 앞세워 5게임 반 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해버립니다. 하지만 단기전에 강한 해태타이거즈답게 플레이오프에 태평양 돌핀스를,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 이글스를 꺾고 4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됩니다. 

 

 

 

 

7위 (34승 합작) 07년 두산 리오스(22승) 랜들(12승)

 

07년 리오스 22승 5패 0세이브 234 2/3이닝 147탈삼진 평균자책점 2.07

07년 랜들 12승 8패 0세이브 164 1/3이닝 113탈삼진 평균자책점 3.12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듀오라고 말할 수 있는 두산의 리오스와 랜들입니다. 이제는 리오스 선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픕니다. 2007년 시즌 개막 전 꼴찌 후보로 분류되었던 두산 베어스가 페넌트레이스를 2위로 마치며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육상부 3인방의 활약과 더불어 마운드의 두 외국인 선수의 힘이 컸습니다. 또한 유난히도 두산이 경기하는 곳마다 자주 내렸던 비를 꼽을 수도 있겠네요. 잦은 우천연기 덕분에 두산은 중요한 경기마다 리오스와 랜들을 투입하며 차근차근 승리를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7위 (34승 합작) 06년 한화 류현진(18승) 문동환(16승)

 

06년 류현진 18승 6패 1세이브 201 2/3이닝 204탈삼진 평균자책점 2.23

06년 문동환 16승 9패 1세이브 189이닝 85탈삼진 평균자책점 3.05

 



 

괴물 신인 류현진과 부상에서 완전히 재활에 성공한 인간 승리 드라마의 주인공 문동환의 멋진 조합이었습니다. 06년 최고의 원투펀치였던 이 두 선수간의 나이차는 무려 15살입니다. 선동열에 이어 투수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인 류현진은 부상만 없다면 향후 10년간 한국 야구의 마운드를 책임질 국보급 투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선수의 활약으로 한화 이글스는 페넌트레이스를 3위로 마치고, 준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를 꺾고,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꺾은 뒤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투수 자원 부족으로 아쉽게 삼성 라이온즈에게 패하긴 했지만, 팬들로부터 받은 박수나 관심, 언론으로 받은 각종 스포트라이트를 감안할 때 06년 한국 프로야구의 주인공은 한화 이글스였다고 생각합니다.

 

 

7위 (34승 합작) 94년 LG 이상훈(18승) 김태원(16승)

 

94년 이상훈 18승 8패 0세이브 189 2/3이닝 148탈삼진 평균자책점 2.47

94년 김태원 16승 5패 0세이브 190 2/3이닝 96탈삼진 평균자책점 2.41

 



 

은퇴해 가수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에도 'LG 트윈스'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그 이름, 야생마 이상훈 선수와 김태원 선수입니다. 94년의 LG 트윈스는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이라는 걸출한 신인 3인방이 타선을 이끌고, 마운드에서는 강력한 원투펀치와 더불어 15승 투수 정삼흠, 10승 투수 인현배가 뒤를 받치고, 마무리는 늘푸른소나무 김용수 선수가 지켜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시즌 LG 트윈스는 2위 태평양에 11.5게임이나 앞서는 압도적인 승률로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했고, 한국시리즈 역시 제패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0위 (33승 합작) 92년 빙그레 송진우(19승) 정민철(14승)

 

92년 송진우 19승 8패 17세이브 191 1/3이닝 130탈삼진 평균자책점 3.25

92년 정민철 14승 4패 7세이브 195 2/3이닝 145탈삼진 평균자책점 2.48

 


 

역대 최고 원투펀치에 한화의 선수들이 세 번이나 나오게 되네요. 빙그레&한화이글스 하면 타력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마운드에서도 역대 최고의 원투펀치를 구성해왔던 점을 발견하게 되니 흥미롭습니다. 통산 200승을 거둔 '회장님' 송진우와 송진우에 이어 통산 다승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민철 듀오는 활화산 같은 폭발력은 없지만 웬만해서는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다는 안정감과 강한 신뢰를 벤치에 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들 은퇴를 해서 레전드로 남게 되었네요.




앞으로도 뛰어난 투수들이 많이 등장해 한국 야구가 더욱 발전하기를 소망해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24. 08:30


1.

 빼도박도 못하게 이제 신년이군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시나요?





2.

일요일 포스팅을 담당하시는 스릉님이 번호매겨 포스팅하신 포맷이 무척 좋아서 저도 따라해보아요.

저는 원래 요 포맷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기쓸 때 이렇게 번호매기는 포맷을 자주 쓰는데요, 그래선지 저번 일요일 포스팅은 이전의 포스팅보다 좀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전의 포스팅이 제복입은 느낌이었다면 이번 포스팅은 캐쥬얼해서 더 진솔한 느낌이랄까? 어떤 게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어요. 특히 저는 제복입은 사람을 좋아...

이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도 좀 더 친근한 느낌 받으신다면 좋겠네요ㅎㅎ


3.

저는 제사 음식을 무척 좋아하는데

올해는 너무 간이 짜서 슬펐어요 T-T ...

그래도 약과랑 한과랑 곶감 등은 잔뜩 챙겼어요  호호.


4.

명절이란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례 가족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지만서도 
올해는 이런 생각 해봅니다.

모두 성인이고 모두 싱글일 때 친구들끼리 한 집에 모이는 겁니다. 잘 아는 사람 몇이 주축은 되겠지만 각자의 지인이나 손님들도 함께 모여서 잘 모르는 사람끼리도 모여보는거죠.
그리고는 전도 부치고 송편도 빚고 제사 음식 만들어서 제사도 지내보고
각자 한 해의 운을 빌면서
끝나고는 제사 음식 나눠먹으면서 정치얘기든 일상 얘기든, 혹은 화투를 치든 술을 마시든, 명절 특선 TV를 같이 보든 뭣하면 윷놀이를 하든지 뭐든지 간에

고렇게 모여 놀아도 재밌겠다.


4.

하긴 그러면 일가친척들은 또 언제 만납니까.


5.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바꿀 수 없는 본질적인 나, 내가 사랑하는 나 자신을 타인들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 부분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다수의 타인으로 하여금 당신이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6.


새해에는 <여러분>의 필진들이 한번 모여보려고 요래조래 시도를 해보고 있는데요
전 필진 현 필진 관계없이 한번이라도 흔적을 남겨주셨던 분들과 모이려는 건데,

과연 만날 수 있을지? 

해를 거듭할 수록, 모임의 인원이 많을 수록, 만나기는 어려워지지만
어려운 만남 하게 된다면 후기 올릴께요 :D


7.


올해도 우리 힘 내보아요.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22. 19:31

1.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베스트 셀러 코너에 있는 책 한 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남좌파'.

 

기존의 좌파들이 주로 서민과 노동자 계층에 속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했다면, 최근에 등장하는 좌파들 중 일부는 강남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며 8학군에서 공부했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합니다. 이들을 강준만 교수는 '강남좌파'라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경제개발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계층임에도 정치와 문화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권력을 비판합니다. 또한 노동자와 소수자들, 여성의 인권에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좌파들에 비해서 경제적인 결핍이나 소외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성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지닙니다.

 

 

 

 2.

 

저는 강남이 아닌 강릉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생각 없이,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거나 열심히 받아적다가 강릉을 떠난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여러 좋은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농활을 가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마르크스 계열의 사회학책과 문학이론서들을 접하면서, 문학과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당연하게 여겼던 지난 세월의 생각들과 심한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시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이십니다. 집이 부자인 것은 아니지만, 잘 나갈 때에는 억대 연봉을 받았던 슈퍼 우먼 어머니의 덕으로 저는 풍족한 대학생활을 누렸습니다. 전산실 근무, 입학처 알바처럼 용돈 벌이에나 신경을 썼을 뿐, 등록금 걱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고, 책 살 돈을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사고 싶은 물건들은 거의 다 살 수 있었습니다. 

 

 

 

3.

 

고3 시절, 저는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가야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카이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시기가 잠시나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강대학교에 와서 만난 선배들과 동기, 후배들, 그리고 책들은 제 시각에 상당한 드라이브 효과로 작동했습니다. 

 

돈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타인의 시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고 겪고 배운 것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저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해 속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대학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같은 강의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친구들 중에서도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교사 월급으로는 평생을 한푼도 안 쓰고 모아도 못 사는 아파트에는 사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저는 늘 흔들렸습니다. 

 

혼란스러웠던 1학년 시절에는 사람을 만나면 둘 중 하나를 경험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거나. 저는 누구를 만나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예스맨이 되었습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말에 절반쯤은 수긍했습니다.

 

 

 

5.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아온 친구들에게, 저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시골뜨기였습니다. 강릉에서 우리 집은 중산층 이상에 속했지만, 서울의 친구들이 보기에 저는 서민 중의 서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고 어머니가 보험을 하시면 살기가 힘들지 않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정말로 반대의 환경, 이를테면 시골에서 자라고 홀로 상경하여 낯선 서울에서 등록금과 용돈을 벌려고 아득바득하는 친구들에게는 제가 도리어 부르주아로 비춰지곤 했습니다.

 

내일의 걱정이 당면한 문제가 아닌 점, 먹고 싶은 음식은 다 먹고 사는 것, 일주일도 거르지 않고 당구를 치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거의 다 사는 것 등등, 그들의 눈에 저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였습니다.

 

 

 

6.

 

언젠가 술 취한 후배가 울면서 제게 했던 말은 한동안 큰 상처로 머물렀습니다.

 

"형은 먹고 살 걱정 안 하잖아요. 아르바이트도 안 하잖아요. 형이 야학을 하거나 농활을 가고 진보적인 잡지나 글을 읽는다고 뿌리가 바뀔 것 같나요? 배고파본 적 있어요? 저는 형처럼 야학을 하거나 책을 사서 보지 못해요. 야학할 시간에는 돈 벌어야 되고, 형이 밥먹듯이 사는 소설책 값은 내 한달 밥값이에요."

 

그 때, 저는 속으로 많은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 후배에게 제가 어떻게 보였는지에 관하여, 그리고 내 나름의 고민을 말하지 못하고 삭혀야 되는 것에서, '나보고 어쩌라고?'하는 당황함과, 좀 더 치열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기분은,

 

지금도 회상할수록 마음 한 쪽이 아려오기만 합니다. 그 얘기를 또 다른 강남부르주아 친구들에게 하면, 그들은 신경 끄라는 충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 얘기 듣고 상처 받으면 죽어야 된다고.

 

가슴 아픈 건, "신경 끄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열 받고, 그렇게 절반 쯤의 오해를 받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부르주아도 아니고, 정말 어려운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 나 자신은 어디에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

 

 

 

7.

 

부유하거나, 없이 지내거나, 그 중간이거나와 무관하게, 세상에 진보적인 시선으로 응시해야 할 가치들은 많습니다. 이를테면 부당한 권력과 언론, 온갖 왜곡과 곡해, 차별들. 그것들과 싸우거나 바꾸는데 있어서 계층이 꼭 문제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8.

 

대기업에 다니거나, 외국에 유학을 가거나, 법조인이 되거나 의사가 된 친구들에게는 좌파로 비춰지고, 대학에서 만난 몇몇 이들에게는 부르주아로 비춰지는 이중의 시선에서 늘 당황스럽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강남 출신 친구들의 보수성향, 성공강박증에 걸린 아줌마들, 그리고 그 배 튀어나온 욕심쟁이 아줌마들의 자식들, 철없이 소비에 몰두하는 된장녀들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일정부분 익숙한 것. 차별받는 소수들의 시선과 '자유'라는 문학의 기본정신에 깊이 동감하면서도 그것을 내 삶의 전체로는 확대하지 못하는 것.

 

 그 사이에서, 늘, 흔들립니다.

 

 

 

9.

 

스무살 초반에 인문학을 택하지 않고 경영학과에 갔다면 지금쯤 저는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당혹감을 느끼지 않고 조금은 가뿐하고 자유로워졌을까요. 그랬다면 약간의 권태를 고급문화로 소비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까요.

 

 

 

10.

 

그렇다면, 지금의 저는 무엇일까요. 계층도, 입장도, 관념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 노는 켄타우로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7. 08:30

 여러분 혹시 영화 <러브레터>(1995)를 기억하십니까?

 질문을 던질 때만 해도, '기억 못하실리가!' 라는 생각으로 한 말인데 벌써 17년 전 영화군요? 모르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기억하는 분이 틀림없이 더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혹 영
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 영화의 '오겡끼데스까'의 장면만은 알고 계실 거에요. 그 장면은 영화보더 더 유명하고 인기를 끈 장면이면서, 영화 내에서는 한 명의 히로인인 히로코의 감정 클라이막스 장면이기도 한 중요한 씬입니다만,  사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연정'의 주인공은 또 다른 히로인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아닌가 합니다. 


                                                             봐요, 히로코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서 보여주는 "매우 뜸들이는 연정"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지막 씬에 도달하기 전까지 여자 이츠키 그녀는 남자 이츠키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알지 못합니다. 주변의 추궁에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일관하죠. 중학생 때 반 아이들의 짖궂은 놀림에 그녀가 울자 그가 클라스메이트를 때렸을 때부터 우리는 다 알겠든데... 

 그렇지만 그녀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감정을 그녀보단 분명히 알고는 있었던 그도 도대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요즘의 우리들이라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어!'라고 말할만한 행동들 뿐이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새학기 첫날,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성과 이름이 같은 두 어린 남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쉽게 잊을 수는 없죠. 이때부터 필연적으로 둘은 서로를 의식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쓰기 때문에 혈연이 아닌 남녀가 이름이 같다면 놀림당하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저 때는 가장 철없다는 중학생 시절 아니겠습니까?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두 남녀는 결국 아이들의 장난으로 도서위원일을 함께 맡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거의 일을 하지 않기 일쑤. 그리고 이상한 장난을 치곤 합니다.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히로코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건 우리도 미처 몰랐겠다! 싶은 강도의 어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가 그녀를 충분히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였을까요? 놀랍게도 아닙니다. 왜냐면 그녀와 닮은 히로코를 본 순간, 여자에게 쑥맥인 그가 첫눈에 반했다,며 고백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는 환상이 가진 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진실하고 강력한 감정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거죠.

 그러나 계속 그 정도 범위에서 그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에게 약간은 심술을 부리지만, 뭘 더 어쩌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신경을 쓰고 있을 뿐, 뭔가 잘해준다거나 사귀자고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죠. 감정이 표현될 때 해소되는 것이라면, 이 감정은 끝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연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그가 그녀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자, 그는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전하지만, 그녀는 그게 러브레터인지 알지 못한 채 또 수 년이 흐르고 맙니다. 그 러브레터란 것도 걸작인 것이 그녀의 이름을 적은 독서카드 뒤에 그린 그녀의 초상화이거든요. 우회와 지연을 더하고 더한 엄청난 지연이죠.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뜸을 들인 그 마음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수신인에게 도착합니다. 온 러닝타임동안,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이후부터 그는 죽고 그녀만 남아 살아가고 있을 때까지의 시간 동안, 뜸들이며 무르익은 그 감정은, 어린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척이나 큰 감흥으로 터지게 됩니다.

 만약 그 마음이 더 일찍 그녀에게 전해졌다면? 
 그녀가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발견을 했거나, 혹은 아예 그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고백했다면?
 과연 영화는 지금 같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그 "뜸들임"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그 영화가 담고 있는 그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무척 매료되면서도 꽤나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만으로 족했던, 뭔가를 더 바라지도 않거나, 감히 바라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만 담아둔 마음을 오래오래 유지했던 '순정어린' 때는 언제가 마지막이였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만약 이게 현재의 우리들에게 들려진 얘기라면  아마 그가 친구를 때린 그 포인트에서 이미 '요거는 사랑이구만'이라며 잽싸게 그 포인트를 찍어내서 그 감정들을 모두 해부해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너 나 좋아하니?'라고 도발적으로 말한다던가, 키스부터 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는 나랑 사귀자, 느니 하면서 말이죠. 

 우리가 더 이상 그런 순정어린 사랑을 하지 않게 된 건 우리가 더 이상 중학생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17년 전과 지금의 사회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라진 탓이 있지 않을까요? 빨리 빨리, 어서 결론을 내자, 라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혹은 이제는 무언가를 진득하니 안고 가기보다는 욕망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어 빨리빨리 해소해 버려야 하는 문화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뭔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해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원인을 찾자면 이것저것이 될 수 있겠지만 요는 문화 자체가 즉각적이고 빠른 방향으로 변화했고 연애 문화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중학생도 저런 순정어린 사랑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 변화를 두고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순정어린 사랑이 반드시 더 좋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조건 회귀하자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생각일 수 있죠.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야하는 합당하고 현명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천천히, 은은히, 뜸들이는' 사랑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위상 혹은 유의미한 지점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소개팅이나 선처럼 애초에 어떤 목적을 가진(조건이 맞으면 함께 한다는 식의) 만남을 주로 하고 있는 요즈음이라 그런지, 조금은 저 순수한 사랑이 그립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족했던, 오래오래 그 감정을 가슴 속에서 숙성시켰던 그런 때가. 그래서 쉽게 변하지 않았던 마음이라는 것이. 사랑이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연모의 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감정도 비교적 빨리 타오르고 빨리 식는 지금의 문화에서
오랜 시간 뜸을 들였을 때 감정이 더 깊어진다는 것은 예전의 사랑이 주는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진득하게 사랑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은 욕망을 절제해 가면서 말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S.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5. 17:43

안녕하세요 :) '학교를 안 갔어' 코너를 맡고 있는 스릉입니다. 먼저 포스팅이 늦어진 데 대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ㅠㅠ 오늘이 일요일인줄 몰랐어요....... 요즘 방학하고 잉여롭게 살다보니 날짜 감각이 없어요 헝헝. 오늘은 학교에서는 조금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재미없어도 재미나게 봐주시면 캄사하겠습니다!





남자들끼리 대화를 하다 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값)싸 보이는 여자', '꼬리치는 여자'에 관한 것인데요, 흔히 남성들은 '여자가 먼저 유혹해서 벌어지는 불륜이나 성행위, 만남은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다' 라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합니다. 


"그 년이 딴 새끼한테 꼬리쳐서 바람피웠다."

"야한 옷 입은 거 자체가 자기 꼬셔달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어.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기 때문에, 잠시만 혼자 놔둬도 바람 피워"
"지가 원해서 매춘하는데, 왜 남자들만 성매매 하면 죽일 놈 취급하지?"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음담패설은 단골메뉴이고, 그 음담패설이 대부분 여성의 바람끼(밝힘증이라고도 표현한다)나, 여성에 대한 은유로 채워져 있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을 살펴보면 곧 물음표가 생깁니다. 나이 들어서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원조교제를 하고, 술집에서 어린 여자들을 찾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여자가 성욕을 표시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면서 유혹하면 누구보다 환영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남자들이 여러 여자들을 사귀거나 같이 잠자리를 하면 '능력 있다' 라는 평을 듣는데, 왜 여자들이 그러면 '걸레' 라는 모욕적인 욕이 나올까요?


한국과 같이 보수적인 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의 야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섹스와 성에 있어서 여성들은 불리한 위치에 존재합니다. 아담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한 죄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평생 노동을 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성경의 내용, 그리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인류는 죄악에 노출되었다는 신화의 내용, 또 트로이 전쟁도 헬레네를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치정극이 아니었던가요. 여기서 문제되는 점은 남성들의 양가감정입니다. 


여성의 미에 현혹되고, 여성들이 한없이 아름답기만을 바라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들을 온갖 신화와 회화, 담론을 통해 저급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쾌락은 즐기되 책임은 회피하려는 저열함에 기인합니다. 


아리스토렐레스 같은 위대한 학자도, 신화 속의 영웅들도 모두 여성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남성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 저급한 여성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미를 취하면서도 그것을 깍아내리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요부가 유혹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는 남성들의 초라한 자기위안이야말로 팜므파탈로 상징되는 왜곡된 여성성의 진실이고, 팜므파탈이라는 코드를 만들고, 유포하며 즐기는 동시에 비판하는 양가성의 원인입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과에 아주 예쁜 여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남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꿀을 얻으려는 벌떼들과 같이 많은 선배·동기들이 그 여학생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술에 취해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학생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얌전히 공부만 했습니다. 1년이 흘렀습니다. 더러 몇몇은 그 여학생에게 직접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고, 몇몇 동기는 연정을 삭힌 채 군대에 갔습니다. 그리고 고백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이도 남아 있었습니다. 술 취한 동기의 넋두리를 들어주며 흥미롭게 그 사태(?)를 관찰했습니다. 결과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그 치사한 경쟁의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1년 동안 그 여학생이 자신도 모르게 '팜므파탈'로 둔갑해 있었다는 사실이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지요. 학교 남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돈 많은 유부남과 사귀기 때문이다, 방학 때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더라, 여름에 야하게 입고 화장한 것을 봤는데 영락없는 '나가요 걸' 이더라, 은근히 남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남자 여럿 잡아먹을 여자다.......(술 취해서 그 여학생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인간들이 나중에 소문이 퍼지자 서로 일치 단결하여 그 여학생을 성토하는 것을 보고 느낀 황당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백했다 실패한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퍼뜨린 것인지, 한을 품고 군대에 간 누군가가 퍼뜨린 것인지, 아니면 그 소문 중 몇 개는 사실인지,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평범한 한 여학생이 순식간에 팜므파탈로 변신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신화나 고전 회화, 그리고 역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의 존재와 내용에 대해서 저항을 갖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뱀을 두른 클레오파트라나 이브의 그림을 보고, 상자를 여는 판도라를 보고, 나폴레옹을 매혹시킨 조세핀의 일화와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그들을 요부로 각인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뿌리깊게 박히고, 여성들은 자신은 그들과 같은 요부가 아님을 다행으로 알면서 안도합니다. 


성매매 여성이 미군에게 찔러서 죽은 사건은 무심코 넘어가면서, 여중생이 죽으면 수십만명이 촛불을 들고 정의로운 자가 되는 현상도, 성매매 여성들은 요부들이고 값싼 여자들이라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은 지금-여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팜므파탈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비교하면서 안심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일탈과 맹목적인 몰두를 변명하기 위해서.


넬슨 제독의 애인 해밀턴 부인과 19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레카미에 부인에 대한 일화를 보면 04년에 출간된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정이현)이 떠오릅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돋보이는 학벌도 부유함도 소유하지 못한 평범한 여성. 그렇다고 온갖 아부와 먹이사슬이 횡행하는 학문에 몰두할 뜻도 없으나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기는 싫은 소비세대 여성. 그 여성이 택한 것은 남자를 통한 성공이었습니다. 만나되 잠을 자지는 않으며, 좋다고 말하되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그러다가 안정적인 남자를 만나서 순결을 바치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은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그 논쟁도 팜므파탈을 보는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체적인 사회인식을 포기하고 낭만을 허울 삼아 벌이는 색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느냐라는 반문부터 문체나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쟁까지. 하지만 이 소설에 관한 논쟁 중에서 현저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 평범한 여성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렇게 탐색하다가 안정을 발견하면 몸을 던지는 조신(?)하고 깨끗한(?) 여성들을 갈구하는 남자들, 그리고 욕을 하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조신한 이미지로 부와 명예를 갖춘 남자를 만나길 바라는 여자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런 여성들은 수없이 생겨날 것이고, 이 현실적이지만 수준미달인 소설에 대한 논쟁도 계속될 것입니다.


'람보'의 강인한 근육과 엄청난 능력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 환타지를 이용해 자신들이 벌인 더러운 전쟁의 패배를 영상으로 복수하는 것은 문제적입니다. 여성의 미를 원하면서 그 미를 순식간에 더러움과 요설로 격하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양분되어 있지 않으며, 한 인간에게 그 특징들이 혼재합니다. 


모든 구분들은 이해관계의 산물이 아닐까요. 성경이라는 경전과 신화의 견고한 이미지를 통해 남성들은 변명과 위안을 얻었고, 여성들은 자신들은 정숙하다는 면죄부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동의와 비열한 계산은 '구분'을 양산하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곁에 잔존합니다. 일상의 대화로, 영상 이미지와 소비의 형태로, 그리고 예술로.



팜므파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만들어질 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1. 20:25


좋은 선배란 무엇일까요. 이 말에 답하기 전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후배들이 좋아하는 선배의 기준이 있으니까요.

 

요즘 친구들에게 '좋은 선배' 란 보통 이런 것입니다.

 

 

밥과 술을 잘 사주고,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도,

선배의 짬밥과 경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와줬으면 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되도록 자기들에 맞춰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준다고 잘 따르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그런 선배들을 갈구했습니다.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욕하지 않고, 일이나 공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만나서 내 돈 쓸 일 없고, 그러면서도 간섭 안 하는 선배. 좋지 않은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런 선배들은 기억 속에서 흐릿합니다.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소위 말하는 '대세'란, 물과 기름처럼 혹은 비켜가는 돌팔매처럼 서로 섞이거나 충돌 하지않고, 필요할 때만 연합하는 '쿨'함을 추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쿨한 것을 추구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배를 이용하게 됩니다. 생각 없는 선배들은 대세에 맞춰서, 돈을 뜯기고, 지식과 경험을 뜯깁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와 같이 후배들이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월이 축적되면서 선배들이 느끼는 것은 묘한 상실감입니다.

 

어린 친구들에게 보상을 요구할수도 없고, 자기 시간과 돈, 경험만 뜯기는 묘한 싸이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과 함께 기대하지 않고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둘 고학년이 되거나 졸업하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춥니다. 각자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겠지요. 그러나 예전보다 대학시절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그리움의 강도는 훨씬 적을 것입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철없는 신입생부터 졸업생까지,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쥐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선배의 잔소리와 간섭, 권위를 비판하던 사람들이, 선배가 되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개념없는 후배들을 보고 한탄한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일정 부분 이런 인류 공통의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을 냅니다.

 

후배들이 게으르고 건방지다고 욕하던 선배, 애정어린 강요를 하면서 밤새도록 술잔을 놓고 말싸움하던 선배, 술꼬장 부리는 것을 보면 멱살 잡아서라도 버릇을 고치려 했던 선배,

 

잘못하고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으면 끝까지 비판하던 선배, 여자와 헤어졌을 때 무작정 위로하기보다는, 제 결핍과 나약함을 추궁하며 상대의 변절에만 분노하던 저에게 일침을 가하던 선배,

 

비싼 것을 사주지 못해도, 자기 책값과 식비를 아껴서 분식집 데려가던 선배.

 

그런 선배들과의 '부딪힘'이 없었다면, 그 부딪힘 때문에 분노하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저의 대학시절은 쿨하고 스트레스 없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어디서든 막막했을 것입니다.

 

어디에선가 아무런 대책없이 착취 당하거나 저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무개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인간들을 한없이 미워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선배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비슷한 짓이라도 했다가는 후배들에게 욕을 먹기 십상이니까요. 욕 먹지 않고, 더러 보통 사이로 지내더라도, '어려운 선배'로 '찍힐'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사람마저 거기에 아무런 회의없이 서둘러 따라가면 안 됩니다.

 

자기 사업이나 회사일 때문에 부딪히는 사람들의 '쿨'함이 부러운가요. 명함을 수없이 주고받고, 아무리 자주 만나더라도 거기에는 부딪힘의 아픔과 그 아픔에 동반되는 상호간의 책임과 정이 부재하지 않는가요.

 

사람은, 아프게 만나야 됩니다. 추억과 정은 바로 거기서 생긴다고, 저는 배웠고, 경험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제게 추억과 교훈을 주었던 '좋은 선배'들이 많습니다. 그들과의 부딪힘이, 저는 그립고, 고맙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7. 08:30

 


 



 언젠가 '문과 여자와 공대 남자가 어울리는 이유'라는 포스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어요. 어린 나이에는 내가 아는 세계를 나보다 잘 아는 '문과' 오빠들에게 끌리지만 내가 머리가 크고 눈이 넓어지게 되면 그 '오빠'의 한계가 언젠가는 드러나버리고 그러면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대남자는? 내가 영원히 잘 모를 세계이므로 그가 어려운 공식과 원리를 설명하면 "어머 오빠 대단해"를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쉽게 그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게되고(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많은 트러블이 없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문과 여자'의 심리에 무척 공감했습니다. 사실 많은 여자들이 배우자의 조건으로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꼽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 반드시 많이 아는 것만 존경할 부분이 되는 건 아니지만 - "잘 아는 남자"에게 가지는 호감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저 포스팅을 접했을 때는 특히 "문과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갈증같은 것이 무척 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뜨끔했어요. 그럴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문과 남자를 만나려고 하는 생각이 틀린 걸까?

 그에 대한 답과는 별개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의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닮은 사람이 좋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좋을까?

 서로 다른 사람이 끌린다는 말도 있고, 공통점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다기보다는 둘 다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끌릴 수 있죠. 그 다른 점/닮은 점이 끌림의 이유일 수도 있고, 또 그와는 상관 없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우선, 여기서 닮은 것과 다른 것은 소소한 부분보다는 큰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을까, 아니면 문과 여자와 이과 남자처럼 "그 세계를 모르지만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제목 보셨겠지요?


 이것은 질문입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5. 08:32






신입생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2012
년이 되었습니다. 시무식도 했고, 19일부터는 보충수업이 시작됩니다. 3월이 되면 입학식도 할 테고, 또 다른 일 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담임교사에게 가장 바쁜 시기는 3월입니다. 이것저것 조사할 것, 준비할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아이들 이름 외우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급식비 감면 대상자 파악 작업 역시 매년 3월이면 하는 일입니다. 요즘 어디 밥 굶는 아이가 있겠냐고 속 편히 생각하기 쉽지만, 2012년의 대한민국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합니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이 745만 명 쯤 된다고 하는데, 2011년에 점심값을 지원받은 학생은 97만 명에 달했습니다. 35명이 한 반이라면 한 반에 4~5명씩은 꼭 있는 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그만 무감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해 예산안에 대해 개거품을 물고 화내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예산부족을 이유로 복지예산을 크게 삭감했고, 그 과정에서 초중고생의 급식지원비가 0원으로 책정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서울시 전면무상급식과 오세훈의 자폭, 곽 교육감에 대한 권력층의 보복 등 여러 사건들을 지나왔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초중고 무상급식과 관련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논의의 층위가 한 단계 높아져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들먹이는 수준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선별적 복지라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이들이 주장의 출발점을 자신들의 논점이 아닌 보편적 복지라는 논점의 반대편에서 출발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등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재벌 자녀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복지혜택을 주자는 논리를 펼치면 될 것을 굳이 보편적 복지의 반대점에서 반박을 하려니 이런 무리한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나라 초중고에 부잣집 아이들, 특히나 재벌 자녀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 아이들이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는다고 해서 그걸 '혈세'라고 표현할 것까지 있을까요. 무상급식을 시행하면 1년에 2조원인가 하는 돈이 추가로 든다고 합니다. 큰 돈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재벌 자녀들이 공짜로 먹는 밥으로 인해 추가되는 돈은 얼마나 될까요? 재벌이라는 계층이 몇 %나 될까요? 이걸 논의한다는 자체가 우습습니다차라리 재벌들이 자녀들에게 부를 상속하는 과정에서 부리는 갖은 편법과 불법 수단을 제대로 적발해 납세 의무를 정직히 수행하게만 해도 그 자녀들에게 공짜 밥 주는 것 이상의 재원은 나올 텐데 말입니다.


저도 2010년부터 근로소득세를 내고 있습니다. 는 제가 낸 세금이 우리 아이들의 밥값으로, 교육비로 지출되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일 년에 수십 억 이상의 돈이 청계천 광장 유지비로 나가고 있고, 오세훈이 깔아놓은 시청 앞 잔디 관리비로도 그만큼의 돈이 나가고 있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다 뜯어내고 새로 까는 데 쓰는 돈, 기업을 경영한다는 핑계로 자기들 배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가 경제위기 닥치면 받아가는 공적자금, 이런 저런 특수활동비라는 명목으로 고위층 인사들이 개념 없이 써 대고 있는 돈, 그런 걸 바로 '혈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굳이 22조 이상의 돈이 들어가게 될 4대강 사업을 말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전 그런 돈이 훨씬 더 아깝습니다
.

 

사실 아이들이 먹는 밥, 그거 공짜 아닙니다. 왜 그걸 공짜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땅의 미래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려집니까? 연말에 새로 까는 보도블록, 쓰잘 데 없이 파헤쳐지는 4대강이 우리의 미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선별적 무상급식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비참한 일입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걱정해 무상급식을 신청하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관용과 배포가 배부른 그대들에게는 없습니다.

 

청계천과 4대강 사업을 불도저식으로 추진한 토목 대통령께서는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과거 우리가 남들에게 도움을 받았듯,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국격을 향상시키는 길이다."

 

좋습니다. 그것이 진정 국가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혼자 가오 잡기 위해 그런 것인지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진정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면, 그래서 이제는 남을 도와도 될 수준이 되었다면 쪼잔하게 아이들 '''마음'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맙시다.

 

이번 정부에서 전국적 무상급식을 지원해줄 예산을 확보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면, 저는 생애 처음으로 명박이를 이명박 대통령 각하라고 불러줄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 > 일요일, 학교에 안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혹하는 여성, 처벌받으리라  (1) 2012.01.15
좋은 선배  (3) 2012.01.11
안 아파도 청춘이다  (0) 2012.01.01
전교조를 위한 변명  (0) 2011.12.25
담임이 없는 학교  (3) 2011.12.1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