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3. 08:30
 
 여러분 안녕하세요? 토끼고양이입니다. 신년 첫 포스팅에서 인사드려요. 올해는 싱글인 여러분 모두 좋은 인연 만나서 진하고 아름다운 연애 하시길 기원하고 커플인 분들은 지금 그 사랑 더욱더 열정적으로 깊어지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면서, 이것저것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실 것 같아요. 게다가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면서, 점점 연애에 대해서 주저하게 되는 부분들도 많아지실 것 같아요.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따지게 되는 것도 많아지고요? 

 그러면서 우리는 연애라는 것이 가지는 가장 순수한 본질에 대해 잊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본질만으로는 현실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따질 것은 따져야 합니다만, 그래도 본질이 전도된다면 그것은 이미 연애가 아닐 수도 있겠지요. 슬슬 현실적인 부분도 생각해야 하는 때이기는 하나, 신년을 맞이하여 오늘은 본질에 한번 집중해 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연애의 순수한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일단은 분명 진한 연애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일 텐데요. 그런
 연애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역시 이 시를 빼 놓을수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고, "진짜 연애"를 욕심내게 만드는, 문정희 시인의 <딸아 연애를 해라>를 소개합니다.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있던 신사임당의 우아한 그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길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서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길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 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어우.. 옮기고 나니 시가 쏟아내는 에너지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입니다. 군데군데는 너무 열정적이라서 어우 이건 too much하진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간혹 있네요 ㅎㅎ 신사임당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표현에 집착하기 보다는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이 시의 액면 그대로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어른의 전 존재"로 한다는 "야성의 생명성"을 가진 "연애"에요. 그 부분은 이 시가 비록 "딸"에게 말하는 내용이나 "아들"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의 내용만으로도 이미 야성의 생명성을 가진 듯한 느낌이 참으로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애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주체로 온전히 살아가기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다간 사람도, 살다 갈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마 인간은 절반 (혹은 그 이상을) 현실에 담그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야성의 생명성"이란 영적 체험에 가까운 경험인가 싶기도 하고요.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네요. 그런 성숙한 연애라면 분명, 일생의 사랑이 될 것 같기는 하다만, 과연 현재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만큼 어른이기는 할까요?

@_@ 어질어질.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안에 연애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는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은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겠죠. 저 경지에 비록 이르지 못했더라도, 혹은 영영 못하더라도 다만 배우면 좋을 것은 저 주체적인 에너지가 아닐까요? 비록 온전하지 않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주체적이고 용감하게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다시 한번 바라겠습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 10:30

수능이 끝나니 3학년 전담 교사는 학교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며칠을 바보처럼 앉아 별로 할 것도 없는 교무부 일이나 깔짝거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학교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성수고에서 보낸 시간만 20개월이 넘는데, 천천히 도서관을 살펴본 적이 처음인 국어교사라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별관에 있는 학교 도서관은 장서가 몇 권 되지 않는 소소한 규모였지만, 생각보다 읽을 만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의 꼭대기에서 놀았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여덟 권이나 있었고, 최근 인기가 많다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여섯 권이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감하기엔 아직 이른 문제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청춘에 대한 담론이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통의 청춘 담론들도 이처럼 대개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짱돌을 들고 당신들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체제에 저항하라고 선동하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식입니다. 이 두 가지 담론이 팽창하는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간과했던 청춘들의 불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꿈꾸는 여당과 정권 교체를 희구하는 야당, 양측 모두에게 ‘청춘들의 불만’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등록금 투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들과 보수언론들은 이 문제를 선심성 복지논쟁과 장학금의 범위확대 문제로 국한시키며 정작 ‘청춘’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지 포퓰리즘 논쟁과 증세 논쟁, 부실사학 퇴출 논쟁, 장학금 확대 논쟁은 기성 세대의 이윤과 더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요.

 

등록금 투쟁이 야기한 정치권의 논쟁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라는 이들과 청춘은 원래 아프니까 힘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기성세대라는 사실과 등록금을 둘러싼 논쟁이 다른 범주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요. 바로 청춘의 담론에서 청춘들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춘의 범주를 20대, 혹은 후하게 쳐서 30대 초반까지로 설정하고 전개하는 세대론에는 일종의 ‘함정’이 존재합니다. 특정 시기를 ‘청춘’으로 명명하는 순간, 청춘의 현실과 고민은 철저하게 ‘시간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우석훈 식으로 짱돌을 드는 순간, 기성세대와 ‘특정 나이’의 청춘들은 적대적인 이분법 위에 놓여집니다. 짱돌을 들고 저항하라는 말은 일면 후련한 일갈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의 저항은 세대의 구분 없이 존재하는 문제들을 청춘들의 문제로 한정짓게 되는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현재 청춘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 이를테면 비정규직, 등록금, 학력 차별, 대학의 상업화, 다가올 초고령화 사회- 은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세대론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우석훈 식의 발언은 ‘88만원’이라는 기표 아래 청춘들의 현실을 분노로 휘발시켜 버립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다를 바 없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는 제자들과의 상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청춘들의 고민과 현실을 보여주는 표본집단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한 저항과 위로는 상당부분 적실하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체계는 그렇게 간단히 전복되거나 "화이팅!“ 이라는 구호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로 군림하며 청춘들에게 힘을 보태주려는 듯한 책들은 일시적인 위안에 머물며 청춘들이 처한 상황을 개인의 극복의지와 의식화라는 영역으로 축소시킵니다.

 

매년 대학 입시가 끝날 무렵 보수언론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입시영웅’들의 신화처럼 의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그 기사들은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입시제도라는 ‘구조’를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무책임하게 짱돌을 들고 맞서라는 언술이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옵니다.

 

현재의 청춘들은 과거의 세대들처럼 투쟁과 혁명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가혹한 세대 내 경쟁에 내몰린 세대들은 변화를 꿈꾸지 못한 채로 조로한 청춘이 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세대 내 경쟁은 청춘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생존에 대한 불안은 청춘들의 관심사를 축소시켰습니다. 지금 여기의 청춘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안을 주입하는 살벌한 세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고 청춘들 개개인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소중합니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면서 건네는 충고와 위로보다는 불안한 청춘들이 행하는 자기 고백이 고립된 청춘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경쟁의 일상화는 개인의 내면에 견고한 벽을 형성시키고, 그 안에 고립된 청춘들은 일방적으로 매도되거나 훈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고통을 강요하는 세계 안에 던져진 청춘들이 연대와 저항을 꿈꾸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요. 경쟁의 대상이 아닌, 외롭고 아픈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동료들을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당신도 삶이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면, 그래서 단자적인 고립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개인의 성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는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좀 더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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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7. 13:08

 

 

 요즘 나라 일에 워낙 굵직한 사건들이 많죠.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덜 핫한 이슈가 되었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 역시 한 주 전만 해도 꽤나 논란 속에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조례안이 상정되면서부터 그 내용과 통과여부를 놓고 지지층과 반지지층의 설전이 눈에 띄었는데요, 사실 상대적으로 덜하다 뿐이지 사안 자체에서는 이 조례안이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이후에 논란이 더욱 커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회의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서 재심의도 거론되고... 재심의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지지층과 반지지층의 시위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군요.

 

 힘겹게 통과하고도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조례안의 주요 내용을 여러분도 많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논란이 되는 주요 내용은 동성애와 임신·출산에 따른 차별 금지, 교내 집회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보장 등의 내용입니다. 이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부분은 역시 동성애와 임신 출산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인 것 같습니다. 이 조례안이 동성애나 임신 출산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으음. 그 논리구조도 모르겠는 바는 아닙니다. 어떤 상황을 터부시하지 않고 그것도 가능한 상황이며 다른 상황과 똑같이 대우받는 상황이라고 여긴다면 그 상황에 거부감이 없으니까 그걸 멀리하려하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입장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벌로(차별로) 겁을 주면 그 내용을 피하려고 하는 효과는 분명 있겠지만 그건 너무 해당사항이 없는 다수의 입장만 고려하는 내용이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 무섭기까지 해요. 임신 출산을 하거나 동성애 성향을 가지지 않은(혹은 가졌다고 티내지 않는) 다수 학생들이 그런 내용에 해당되지 않기 위해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소수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게 말입니다. 혹은 차별받는 소수 학생이 다수의 해당 내용으로 돌아서게 만드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대되는 효과라는 게 참 애매합니다. 이미 임신 출산한 학생이 그런 일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동성애 성향을 지닌 학생이 자기 성적 성향을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요? 제가 동성애 성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후자의 질문은 정말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반드시 이성애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그게 살아가기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위험이 없으니까, 혹은 소수자가 아니니까 더 편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근본적으로 피하고 터부시해야할 이유는 뭘까요? 솔직히 말하면 저에겐 그 조례안의 내용이 좀 새삼스럽기까지 했어요. 읭? 그럼 여태까진 차별해도 되는 거였어? 라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그리고 특히나 동성애 차별금지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얘기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반감을 사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저에게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의견이 있는 분은 저에게 귀띔 좀 해주세요. 그런데 제가 체감하고 있는 옳고 그름과는 달리 막상 생각을 시작하니 이 판단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더군요. 애초에 동성애라는 개념에 대해서 차별금지 찬성입장과 반대입장의 전제나 정의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차별금지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도 그 내용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파고들수록 혼란스러워져서 그 부분은 좀 더 생각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제가 차별금지를 지지하는 동성애란 같은 성을 사랑하는 성적 지향을 말합니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적 성향의 한 종류이고, 어떤 성을 대상으로 하느냐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개념이에요. 대상으로 하는 성이 다른 것은 저에게 별다른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하고 각자를 성장시키는 동성연애가 있다면 저는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고 좋아할 거에요. 하지만 무분별한 성관계나 도구적인 관계가 성행하는 동성연애가 있다면, 그런 이성연애와 마찬가지로 싫어할 거에요. 그렇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지 말고 차별해야 한다면 그것에는 쉽게 찬성할 수 없어요. 물론 싫어하는 연애가 한 쪽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일어났다든지 속아서 일어났다든지 피해가 너무 강력하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제제와 처벌을 도입하는 데 찬성할 수 있지만, (결국 어디까지를 한 주체의 자유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일까요?) 그래도 인권을 보장하지 말자는 부분은 매우 조심스러울 것 같습니다. 사형수에게도 인권이 있잖아요.

 

 어쨌든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평소 동성애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얼마나 성행했었나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에서 혹시 동성애자에요? 라고 묻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나는 이성을 엄청 좋아합니다. 라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진짜로 성적 성향을 궁금해 하는 질문이라기 보단 “에이, 아니죠?”라며 웃어넘길 준비를 하고 있는 질문 같달까요. ‘오해’자체가 웃음의 포인트가 아니냐는 생각도 하실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오해가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오해하거나 하는 장면이 등장해서 거기서도 사람들이 웃게 된다면 그건 웃음 포인트가 오해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언제나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경우만이 웃음거리가 된다면, 동성애 자체가 웃음거리인 양 여겨질 수 있으니까요. 문제가 이런 차별이 너무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모른다잖아요. 저도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잡이들이 불편함을 토로하는 말을 들을 때 ‘어머 그렇게까지 불편할 게 있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그저 왼손잡이도 이러할진데 비유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동성연애자는 얼마나 불편함을 느낄까 싶습니다. 사실 나영이부터도-최대한 그런 편견을 배제하려 노력은 했지만-이성애의 연애를 중심으로 해서 쓰이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혹시 그로인해 마음 상하게 만들 만한 글은 없었나? 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지지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건, 인간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지지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상대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랑을 지지합니다. 이 논란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포함하여 계속되었다는 점이 또 조금 슬펐어요.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이라는 말은 크리스마스의 모토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여튼 저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지지합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래보아요. 이제 새해에 인사드리겠군요. 여러분 모두 연말 마무리 잘 하시길. Happy New Year!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5. 08:30
 

존경하는 전교조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은 자주 눈물을 흘리십니다. 전교조가 사사건건 매도당해서, 선생님들의 진심을 이 사회가 몰라주는 게 억울해서가 아닙니다. 십수년간을 온몸으로 버텨왔건만, 우리 교육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아이들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져서, 그래서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선생님은 우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오후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을 때 피로를 이기지 못해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에 학원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전교조를 한답시고 날마다 동분서주하는 것은 저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덜어줄 수 있을지, 12년간의 학교 교육이 실은 12년간의 집단 아동 학대인 나라에서, 교육을 둘러싼 지옥 같은 경쟁이 이제 꼭대기까지 차오른 나라에서,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 1989년에 설립된 이 노동조합은 교직원의 권리를 수호하고, 교육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참교육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탄생한 단체입니다. 수구꼴통 일색인 우경국가 대한민국에서 여느 노동조합이 그렇듯, 탄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숱한 고난, 비난, 힐난을 당해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전교조가 하는 일이라면 우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놓으려는 세력이 생겨났습니다. 조중동은 원래 그랬지만, 학사모라는 이상한 학부모 단체에다 더해 자유교원노조라는 더 이상한 교원단체까지 생겼습니다. 이들은 아예 안티 전교조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전교조를 미워할까요.

 

전교조가 제 밥그릇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교사가 밥그릇 지키면서 편안하게 사는 확실한 길은 전교조 활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요모조모 준비해 승진에 필요한 점수 따고, 안팎으로 둥글게 처신하는 게 최선입니다.

 

전교조는 조합원 수가 9만 명이나 되는 거대 조직이고, 그 속에는 다양한 성향들이 뒤섞여 있습니1다. 교사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중산층 의식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전교조 운동에서 교사 집단의 기득권 수호 의식 따위가 중심에 서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학벌대 많이 보내는 학교를 찾아 비싼 집값을 무릅쓰고 이사하기를 마다 않는 맹모들의 나라에서 전교조는 늘 외롭고 힘에 부쳤습니다. 정권은 시도 때도 없이 반교육적인 정책들로 불을 질렀고, 전교조는 그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불을 꺼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의 투쟁은 늘 격한 구호로 채워졌고, 또한 언제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전교조는 여기저기서 미운 오리 새끼 신세입니다. MB정권에서는 학교별 조합원 수를 공개하게 법령을 만든다고 난리더니, 반국가 불법행위 고발센터를 만들어 이적단체로 고발하겠다고 나서기도 합니다. 교육감 후보 선거자금을 지원했다며 수사를 의뢰하자, 검찰은 즉시 수사로 화답합니다. 한나라당은 교원노조 교섭권을 더 제한하는 법률로 확인사살을 하겠다고 하고, 교육기술과학부는 6년 전 체결한 단체협약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통보해 쐐기를 박아주시며, 교육청은 단체협약 해지로 사무실을 비우라, 마무리 한 방을 날립니다. 교원평가 여론전에서 밀려 전교조가 왜 교원평가를 반대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교사만 평가를 안 받을 수 있냐는 핀잔이고, 학교 현장에서 인심을 잃는 조합원도 많은 듯하며, 조합원이 줄기 시작한 지 몇 년입니다.

 

이 나라는 모든 것이 힘 있는 자의 논리대로 돌아갑니다. 교원노조법은 애초부터 교원의 교섭단 구성을 원천봉쇄합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도 무시해 집회를 하려고 하면 아이들을 두고 어디 나가냐고 합니다. 근로 조건 문제를 들고 나가면 밥그릇이나 챙긴다고 하고, 교육정책을 말하면 정책은 교섭 사항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사의 일터가 바로 교육의 현장이고, 해야 하는 일은 교육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헌법에 보장돼 있다는 것은 안전에도 없습니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집니다>는 구호를 내세우는 사람이 서울시교육감으로 있었으니,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인정조차 없는 셈입니다.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습니다. 전교조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유일한 교원노조가 아니며 흠이 없는 조직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싸워 척결할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른 목소리가 없는 세상은 갈등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입니다. 전교조가 아니라면 누구도 교육현장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학교를 서열화하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이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0교시 수업에 반대하는 선생님들도 사라질 것이고, 학교 안, 교육 현장에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선생님들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지만, 미꾸라지가 살지 못하는 물은 이미 썩어서 아무도 살 수 없는 물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전교조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0. 08:30


 지난 포스팅에서 개인적으로 이별이 아픈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말해보았습니다. 그 네 가지란,

하나는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과 쌓은 우정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이별의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지난 사랑의 시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이었어요.

(지난 포스팅이 보고 싶으시면 여기 →http://libertyanddiversity.tistory.com/entry/20-이별이-힘든-네-가지-이유-1부 )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슬프지만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견딜만한 일이었는데요.

 좀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혼자서 회복해야만 하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먼저 네 번째의 이유는 연애가 끝나면서 받은 상처가 자신이 가치 없기 때문에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된 경우를 말하는 건데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라는 생각이 들면 자연히 ‘내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세상 일은 그럴 만 하니까 그렇게 일어난다는 생각이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하기 쉬운 오해로, 내가 가치가 없어서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일이 일어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패턴의 행동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유도했을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반응을 하기 쉽게 내가 상대에게
잘못 행동한 것뿐이지 자신이 가치가 없어서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행동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상황이 극단적일수록 겪기 쉬운 아픔인 것 같습니다. 가령 모르고 한동안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양다리 중 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결혼은 나 말고 다른 쪽 사람과 하더라는 사례가 있다고 해 보아요. (일전에 소개해드린 블로그에서만 보아도 의외로 많더라구요) 그러면 충격과 공포 속에서 ‘나는 선택할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우선 들 것이고, 사귀는 내내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던 건, 내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뤄져도 좋은 사람이라서 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거기다가 결혼한 후에도 ‘그냥 만나자’며 전화가 온다면?? ‘나는 가볍게 그냥 만나도 되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사실 잘못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가해자의 잘못이 무척 큰 건데도, 상황에서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참 억울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그런 행동들을 계속 받아주거나 했다면 나를 함부로 대하도록 허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내가 잘못 행동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앞서 말했듯 잘못 행동한 거지 내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없는 것처럼 행동한 걸 수는 있지만요.

 

 혹은 이 정도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상처는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했는데 결국 잘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랑했는데도 결국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게 못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게 되겠지요. 거기에는 분명 원인이 있겠으나, 그 원인이 전부 자신 의 잘못인 것은 아닙니다. 혹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해도 그게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근거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생각이 오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요.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이 부분도 친한 친구들이 조금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들이 특히 잘하는 것인데요,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할 때 네가 아까웠네, 넌 아주 매력 있는 여자네, 그 남자는 너를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네, 세상의 반은 남자네 등등의 위로를 퍼부어주는 것이죠. 그렇다고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 아니지만 이때는 좀 더 과장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 때 중요한 건 사실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거든요. (사실 인식은 나중에 친구 마음이 회복되고 난 다음에 해도 되니까요.) 그러면 친구들의 말이 혹 과장되거나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도 그것을 과장하고 거짓말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자존감을 되찾게 됩니다. 아, 이렇게까지 해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구나. 이런 거죠.
(근데 재밌는 건 남자들은 영 다르더군요? 물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요... 여자들은 칭찬을 해주는데 남자들은 욕을 하더라구요. 병신 니가 그렇지. 꼴 좋다. 마시고 죽어. 뭐 이런? 그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혹시 그래서 남자들은 실연의 상처를 잘 회복 못하는 겁니까??)

 

 부가적인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네 번째 이유도, 그것은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혼자서 생각하기 어려우면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나니까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이별이 아픈 세 번째 이유는 지난 사랑의 시간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연애를 했지만 상대가 나를 과연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사랑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 혹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오글거리며 표현해보자면 “정말 날 사랑하긴 했니?”의 아픔이랄까요?

 

 이런 아픔은 이별의 과정에서 지난 시간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 만한 일이 있었을때나(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폭언을 한다든가 무성의해지는 등 갑자기 바뀐 언행이나 태도로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알고 보니 그 동안 나를 속인 점이 있다 등), 혹은 연애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서 충분히 애정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경우 등에서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혹은 마지막까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느끼는 아픔 입니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게 괴로운 이유는 함께 했던 시간을 통째로 부정당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변해버렸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이 되어 버리는 거지요. 이 와중에 네 번째 이유인 자존감에 상처입는 아픔이 섞여 들어가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네 번째 이유에서 들었던 양다리의 사례는 세 번째 이유를 겪게 되는 상황도 될 수 있겠습니다. 혹은 상대방이 이별을 막으려는 노력에 너무 소극적이라던가 하는 경우에도 이런 아픔을 가지게 될 수 있고요. 하지만 사례를 얘기하면서도 같은 경우라도 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아픔을 느끼기 쉬울 테니까요.

 

  그래서 이게 여러분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아픔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괴로움이었습니다. 차라리 사랑이 끝났다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행복하다는 느낌을 끝내 받지 못하거나 행복하다고 믿었던 기억이 통째로 속은 기억으로 바뀌어버린 채 관계가 끝나는 것은, 그것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에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그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헤어진 후 그를 믿을 수 있게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보통은 각자의 아픔 때문에 더 이상 교류가 없기 마련이라서요.

 

 그래서 이별 후에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오직 자신만의 일이 되는 것이라 그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혼자 내 마음과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헤어진 후 너를 정말 사랑했노라는 고백도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사람의 마음보다 믿기 어려운 걸 보면 이 아픔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납득할 때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으로, 그렇기에 아무 도움 없이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 아픔일 수도 있다고요. 그 기억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밖에 없다면 그 순간에는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었다고 믿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것이 다소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다시 관계를 시작하려는 게 아닌 한 그 사실을 오해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좀 무뎌져서 그런지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니면 또 어떤가 라는 생각도 시간을 좀 가지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마음은 좀 아프지만,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앞으로 더 이상 볼일이 없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는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과 우정을 쌓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놓고 보니 좋은 이별이란 사랑이 다 할 때까지 사랑하고, 헤어진 후에도 우정을 유지하려고 시도해 보며, 비록 헤어졌지만 나도 상대방도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지난 시간동안은 분명 사랑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연애의 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난 이별은 이 조건에 상당히 많이 부합하는 이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에서의 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끝까지 함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하지만 워낙 서로를 마음 아프게 하거나 잘못한 일이 별로 없었던 사이였던 데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었던 사이어서, 혹시 그 차이가 좁혀지지는 않을까 하고 꽤 시간을 가지고 노력해보았지만 그러는 중에 사랑의 감정이 다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은 더는 노력할 여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때에는 최대한 상대방이 자존감에 상처받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며 이별의 말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아까웠거든요. 그 사람 역시 다시는 저 만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었지요.

 

 이별 후 결국 친구로 남았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셨기에 오래 우정을 쌓을 시간은 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귀기 전에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 해 주었고 결국 사귀게 되었을 때는 제가 진심으로 잘됐다고 축하해주었어요. 그 분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 분이고, 저도 그분의 여자 친구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축하 이후로 서로 굳이 연락은 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짧은 와중에도 충분히 우정을 느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이분과의 이별에서 아픔이 적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거나 배려하기가 더 힘들어지니까요.

 

 너무 아픈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노랫말은 그래서인가 봅니다. 그래서 공지영 작가는 딸에게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하라고 했는가보아요.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는 연애를 하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연애는 언제 다시 하게 될까요? ...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9. 08:30



안녕하세요, 월요일의 H입니다.


오늘은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gonzales 곤잘레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어요. 







곤잘레스의 여러 앨범 중에서 solo piano 앨범이 좋은 건
생생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건반의 마찰음이라던가 약간은 뭉게져 있는 피아노 소리가 좋아서 - 
그리고 너무 서정적이지 않아서 입니다.  








앨범 solo piano의 첫 번째 트랙 Gogol의 라이브 버젼이에요. Gogol은 사랑해 파리의 사운드 트랙으로도 삽입되었습니다. 
이 공연 영상이 저작권으로 많이 삭제 되어서, 
공연 도중에 관객들과 피아노로 함께 노는 곤잘레스의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이 보이지 않다는게 아쉬울 따름!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케스트라 보다는 바이올린 솔로, 피아노 솔로 와 같이 하나의 악기로만 되어 있는 곡을 좋아하는데 
의외로 클래식 쪽에서 찾기가 힘들고요...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바로 이 곤잘레스! 얼굴이 느끼해도 괜찮아! 머리가 부담스러워도 좋다! 라고 발견한 이후로 줄곧 플레이 리스트에 탑재되어 있는 앨범 입니다.  





해외에서는 일렉트로 앨범으로 유명한 것 같아요. 피아노 앨범으로 먼저 접해서 그런지 아 이런 사운드 만드는 것에도 관심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아이 패드 CF 삽입곡- Chilly Gonzales라는 이름으로 낸 앨범 - 을 들어보시면 알 것 같아요. 






가끔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첼로- 와 같이 실생활에서 조금은 거리감 있는 악기들이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곤잘레스!를 추천합니다. : )


기분 좋은 월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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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8. 08:30

2011학년도가 끝나갑니다. 다음 주면 저희 학교도 겨울방학을 합니다. 파란만장했던 2011년, 저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1교무실의 교무부로 내려와 많은 업무를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담임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 지금 해내야 할 일이 명확한 것이 업무라면, 담임의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니까요. 몸은 작년보다 올해가 더 힘들고, 평균 퇴근시간도 훨씬 늦어졌지만, 신경을 쓰거나 골몰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는 훨씬 덜합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를 가득 채운 이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 제 아이들은 하나도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괜히 부담임을 맡은 3학년 4반에 기웃거리고는 했습니다. 제가 아무때나 들어가도 이상하게 여겨지 않았던 1학년 3반 아이들과 달리, 3학년 4반 아이들은 묻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생각해보면 작년 우리 반 부담임이셨던 전 선생님도 수업이나 행사가 아니면 우리 반에 들어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한 작년 우리 반 애들을 보면 뭔가 찌릿하고, 내것을 뺏겨버린 것만 같아서 아쉬운 기분이 종종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봅니다.

 

학교엔 꼭 담임이 필요한가요? 왜 담임은 있어야 하나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이라 일컫는 교육, 즉 제도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담임선생님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기억에 남는 담임선생님 한 분쯤은 있을테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그때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은 담임선생님 한 분쯤도 있을 것입니다. 담임이 없는 학교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벌이는 오류 중 하나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기준으로 학교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교들은 세상의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특징을 지닙니다. 그것을 일반화시켜 생각해 버리는 일은 언제나 몰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대학교에는 담임이 없습니다. 지도교수라는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 분은 담임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그분이 학생에게 영향을 끼칠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성인으로서의 대학생들은 스스로 모든 행동에 책임을 갖고 행동합니다. 조회나 종례가 없는 대신, 공지사항을 놓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며,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집니다. 공부를 잘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사회적 압박이지 결코 누군가의 으름장이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대학같이 될 수 있을까요?

 

‘담임결정론’이 있습니다. 한 해의 운세는 학기 초에 배정되는 담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담임은 대한민국 학생의 1년 행복을 좌우합니다. 1년이 저당 잡히기는 학생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 증후군’이 학교를 떠돕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특히 원로교사분들은 담임을 서로 안 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몇 년에 한 번은 꼭 담임을 맡는다는 것을 학교 내규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출퇴근 부담이 없고, 승진도 자유롭고, 방학이 있고, 퇴근 시간이 빠른 것과 같이 ‘좋은 직장’의 조건만을 따지는 선생님의 ‘자질’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담임을 맡으면 담임 수당이 더해집니다. 기피 원인은 담임이 되면 겪는 잡일과 행정 업무 때문입니다. 교과를 지도해야 하는 것은 다른 선생님과 마찬가지지만 더 일찍 출근해야 하고 공문 처리도 많이 해야 하며, 아이들에게 신경쓰면서 겪는 심적인 부담도 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하는 좋은 선생님일수록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학교를 경험한 수많은 학생 출신 국민들이 증명하듯, 담임에 따라 학교생활이 좌우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비민주적,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교육도 이제 점차 교육에 대한 학생의 주체적인 선택권이 보장되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어 교과목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쪽으로 교육과정이 수정되어가고 있습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과목을 배우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는 점점 더 민주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불평하는 '야간강제학습'이나 '체벌'은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말대꾸'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받는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다면 담임제도는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본질적으로 담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관리의 책임'에 있습니다. 관리대상으로서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관료제 체제하의 중간단계로서 담임이라는 위치를 설정해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식으로 하면 소대장이 될 것이고, 회사식으로 말하면 과장이나 부장이 될 것입니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학교당국의 지침을 전달하고, 감독하고, 통제합니다. 말썽은 부리지 않는지, 싸우진 않는지, 다친 이는 없는지 보살피는 것 역시 담임의 몫입니다. 이것은 학교를 하나의 관료체제로 보는 것입니다.

 

즉, 국가의 목적(근대 국민의 양성)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는 효율적인 통제와 작동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조직이 필요한 것이고 그 최일선에 담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수의 대상(학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필요한 존재가 바로 담임입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학생을 관리의 대상,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조직은 군대조직과도 같습니다. 시스템과 목적이 다를 뿐 작동원리는 비슷합니다. 효율적인 관리라는 미명 하에 담임의 전권행사, 횡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잘되면 신경써주는 일이 되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억압하는 일, 강제하는 일이 되기 일쑤입니다.

 

담임이 통제의 책임을 지는 한은, 학생과 교사간의 평등한 관계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교사가 무조건 옳고, 학생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권력과 폭력, 점수와 기록의 이름으로 가능할 뿐이지 그외의 능동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키기는 힘듭니다. 미성숙한 존재라고 하여 학생에게 주체적인 판단권을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중, 고등학생이라고 눈코입을 다 닫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만큼 책임있는 판단을 위해 학생 스스로가 좀 더 노력하게 해주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학생 육성의 목적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고분고분하며 순응적인 학생을 길러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말대꾸하는 학생을 반기지 않습니다. 무한경쟁에 적응할 수 있는 학생을 기르기보다는 패배를 용인할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시키는 일에 군소리 없이 따라주는 벙어리 국민을 키워내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치열한 대학입시와 자리잡기 싸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키워낸 학생들이 그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쟁을 없애야 한다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 행동이 없기에 어른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목적삼고 계획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여야 하는지 제도상으로 정한다는 것은 분명 이견이 있을 일이지만, 그 방향성 자체는 대한민국 자체가 동의해도 좋을 일입니다. 왜 교사는 노예를 키워내야 하나요?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체제순응적인 노예를 키워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국 담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 어떤 식의 교육이 미래 한국에 필요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담임이 학생의 권리를 대신하여 행사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학부모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실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태어날 리 없습니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이론적으로 합의를 끌어내봤자, 우리 앞에 서있는 거대한 괴물인 입시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돈만 잘 벌면 오케이, 앞에서는 모두 깨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잘가면 그까짓 인권 따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들이 있는 한 그 어떤 논의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를 바꾸자 라는 말을 대학을 좀 더 보내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같은 배를 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몇몇 어른들과, 미성숙한 존재를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남겨두려는 몇몇 집단들의 해묵은 사고방식에 대해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담임이 사리지게 되면서 겪게 될 교사권력의 공백과, 교사가 단지 점수만을 부여하는 점수기계로 전락할 가능성, 인성교육마저 학교에 떠맡기려는 고전적 교육관 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검되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한 관료제 중간기구로서의 학교가 일정한 국가통제를 벗어나게 되면서 얻게될 혼란 역시 예상되는 일입니다. 결국, 교육의 문제도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서 한발짝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애정결핍이 일상화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테두리를 걷어내는 일이, 즉 담임제를 없애는 것이 그들을 더욱 외로움으로 밀어넣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돈을 벌기 바빠서 가정일조차 경쟁적으로 하는 부모님 밑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담임은 어쩌면 가장 믿을만한 어른일지도 모릅니다. 그 관계는 다만 점수를 주고 말고의 관계를 떠나, 서로에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갖는 매우 기초적인 인간관계의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학생 스스로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목적의식 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그들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고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만 시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학교를 오지 않든, 수업을 땡땡이치든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학생 자신이 비바람 앞에 홀로 서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놔두는 것입이다. 패배의 책임도, 좌절의 책임도 모두 학생에게 일임하고 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4. 08:30
비틀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지은이 헌터 데이비스 (북스캔,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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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All about 비틀즈

종종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은 환경적, 유전적 영향을 받습니다. 외식 갈 때마다 아빠차에서 들려오던 김현철의 '달의 몰락'이나 리알토의 'Monday Morning 5:19' 같은 곡들은 오늘날의 제게 무척이나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막상 그 시절 그 세대의 젊은이가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딥퍼플, 비틀즈, 이글스에 열광하셨던 아빠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저는 '우리 처음 만난 날' 코너에서도 여러번 말씀드렸듯이 Rock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 첫 시작은 '비틀즈'였습니다. 이 잔망스런 오빠들, 레전드 중 레전드죠! 그만큼 비틀즈에 대한 서적도 무척이나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전설'이나 '천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그들이었어요. 아마 히어로물은 이미 많이 접했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많은 책들은 그저 모두가 아는 정보를 짜깁기한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헌터 데이비스의 '비틀즈'는 달랐습니다.


1968년 초판이 나온 '더 비틀즈'는 '공인 비틀즈 평전'이라 불리는 작품입니다. 멤버들이 직접 공인했기 때문이죠. 두둥! 땡기시죠!

 

저자는 바로 이 분! 기자로 활동했던 헌터 데이비스는 18개월 동안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와 함께 붙어다니며 그들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지인들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지난 2003년,  초판 발행 후 35년 만에 재판된 '비틀즈'에는 일부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비틀즈 멤버들은 모두 그 나이 또래 다른 수백만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엘비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 모두 학교의 모든 교실과 동네의 모든 거리마다 그룹들이 뛰쳐나와 노래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리버풀에서는 스키플 그룹이 줄ㅇ을 이어 나오는 밤샘 댄스 파티가 수백 개씩 열렸다. 처음으로 음악이 음악인만의 것이 아닌 시대, 그 누구든지 연주하고 노래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어다. 그것은 원숭이에게 그림붓을 쥐어준 것과 비슷했다. 그중에 누군가는 언젠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도 있을 것이었다.

그 열광이 시작될 무렵, 존 레논에게는 기타 한 대도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에게 기타를 한 대 얻기는 했지만 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돌려주었다. 문득 줄리아가 밴조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존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녀는 존에게 10파운드짜리 중고 기타를 사주었다. ‘품질 보장, 갈라지지 않음’이라고 씌어 있는 물건이었다. 존은 여기저기 기타를 배우러 돌아다녔지만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다.

비틀즈 또한 엘비스로부터 큰 영향과 영감을 받았다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막상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니니 반갑고도 신기한 이야기죠! 이렇듯 멤버들의 탄생부터 유년기, 성격과 관계, 결성과 해체까지 큼직큼직한 사건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비틀즈의 팬이라면 바이블처럼 아낄만한 책입니다.

 

요런 깜찍한 휴가 사진도 있어요! 뭔가 동네 노는 오빠들 포스를 팍팍 풍기지만.. 그리운 비틀즈 흐항흐항 보고싶어요!

투어를 중단한 비틀즈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1956년부터 1966년까지 10년 동안 그들은 단순히 공동체적 생활이 아닌, 완전히 서로 동일한 생활을 해왔다. 그들은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였고 함께 음반 작업을 했지만, 개인으로서 이제 각자의 일을 찾아야 할 시간이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조지가 가장 먼저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투어를 중단한 다음달인 1966년 9월 조지는 아내와 함께 인도에 갔다.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비틀즈와 관계없는 자신만의 진지한 관심사를 찾았다. (중략)

조지의 종교적 열정은 점점 커졌지만 존은 오래지 않아 자신은 연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배우라는 사람들도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과 폴은 결국 다시 탐색에 나섰다. 그들은 스물다섯 살의 백만장자로 아직 은퇴는 고려하지 않고 있었지만, 대학 같은 곳에서 받은 정형화된 교육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적?감정적인 나이는 벌써 백 살은 된 것 같았다. 결국 약물이 등장했다. 마약을 통해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략)

마약으로 그들의 음악 활동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이제 영화 등의 일이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비틀즈는 다시 모여 그들의 가장 야심찬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작품에는 약물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반영될 것이었다. 이 작품이 바로 앨범 《페퍼 상사의 고독한 마음 클럽 밴드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였다.

비틀즈도 당시 마약에.. 사실 몇년전 매카트니가 직접 마약 복용사실을 인정하기도 했어요. 우리들에게는 '아이앰쌤'의 사랑스런 OST로 기억되는 'Lucy in the Sky with the Diamonds'도 대문자로 표시한 그대로 마약류인 LSD의 영향을 받은 곡이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지만 사랑스럽고 몽실몽실한 곡 분위기가 약에 취해서.. 이 점이 늘 충격적이에요. (노래에 약 탔나? 했더니 진짜였어..) 무튼 마리화나, 헤로인까지 섭렵했던 그들은 심각한 중독은 아니었기에 금방 빠져나왔다고 해요. 멤버별로 차이도 있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저 옷부터가.. 영 ㅋㅋㅋㅋ 무튼 저는 격한 팬심에 눈 똥그랗게 뜨고 정독에 정독을 하거나 통곡을 하며 코를 팽팽 풀어대며 읽기도 했습니다만.. 그냥 비틀즈에 리를빗 관심이 있는 분이라도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으실만한 재미있는 평전입니다. 주옥같은 명곡들을 bgm 삼아 훌훌 읽어보세요! 압박스런 페이지수에 당황하셨던 초반과는 달리 너무 빨리 읽어버리실지도 몰라요!
 
그냥 가기 아쉬워서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노래 중 2곡을 선정했습니다. 유툽 영상 클릭하기 망설이시는거 다 알아요! 하지만 한번 눌러보세요~ 이 오빠들이 아주 노래에 약을 타가지고 ㅋㅋㅋ 수십년이 지나도 유통기한이 끊기지가 않네요 ㅋㅋㅋ 좋습니다, 정말!



'Help!'에 이어지는 곡은 약빨고.. 아니 ㅋㅋㅋㅋ 약탄 곡!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입니다! 루씨야! 쌤아즈씨!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3. 08:30

 여러분은 첫 break-up의 감정을 기억하십니까? 반드시 그게 처음 해본 연애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처음으로 온 마음을 쏟아 형성했던 관계가 깨졌을 때, 그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깨진 것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막막함이 더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가장 힘든 이별은 첫 이별인 것 같아요.

 그런데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 보고 난 후, 모든 이별이 다 똑같이 아픈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이별은 잘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그러면 연애를 거듭할수록 점점 아픈 게 덜해지느냐 하면 또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고요. 그러다보니 이별 후 슬픔이라는 감정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궁금하더군요. 어떤 원리로 아프게 되는 것이고 왜 매번 다르게 될까?

 “이별의 슬픔”이라는 아주 감성적인 소재에다가 분석을 틀을 들이대는 것은 사실 무척 산통 깨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이라는 감정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슬픔이면서 그것 자체가 실체라서요. 그렇기에 그 감정은 주로 문학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장황해지기 십상일 텐데, 그러다 보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별의 슬픔을 본질에 가깝게 담기 위해서는 차라리 문학적인 언어들을 그릇으로 사용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결정을 하나 하나 떼어내서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한번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때로 분석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실용적인 목적? 그야 그 아픔에서 조금 더 잘 벗어나 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여러모로 life must go on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뜬금없이 왜 이별을 극복할까? 라고 의문을 가지는 예리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네, 그렇습니다. 드디어 고백하는데 사실 저는 몇달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 <나영이>의 원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때는, 연애 에세이를 쓰겠다면서 연애를 중단하다니, 갓대밋.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라며 머리를 쥐어뜯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급박한 상황에서 뭐라도 붙잡고 탓해보고픈 '그냥 하는 말'일 뿐 사실 그 연애가 끝난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연애 중 가장 잘 헤어진 연애였거든요. 헤어지는 게 옳은 결정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특별히 많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혹 다음에 이별하게 된대도 이 이별처럼 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별을 경험하고 나니 지금까지 경험했던 이별과 이번에 경험한 이별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것은 일반적인 차원의 얘기는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 느끼고 생각했던 것에 해당하는 내용이에요. 보통 이런 것을 자세히 생각하는 사람은 제 주변에 많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사용하려면 이런 저런 감정들을 캐 물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 때 너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이니, 이런 것이니 저런 것이니?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니?'라고 묻는 것은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런 걸 물을만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는 오래된 친구들은 그나마 '일반적인' 연애 패턴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_- 제가 제일 일반적이에요. 아마 개성 강한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이렇게 됐나봐요...(아, 아니 막상 친구들은 생각이 다를지도?!)

 
아, 사설이 너무 길었어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이별이 아픈 이유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과 쌓은 우정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이별의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지난 사랑의 시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누구나 공감하기 쉬우시리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꽤 포괄적인 상황을 의미할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그 중에 가장 힘든 경우는 사랑이 남았으나 지속할 수 없는 경우 같습니다. 그것은 한 쪽의 사랑이 끝났기 때문일수도 있고 양 쪽의 사랑이 다 남아있으나 도저히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여기에 자신이 잘못한 일이 눈에 들어오는 시기가 더해지면 더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워 지는 것 같아요. 혹은 타인이 잘못한 일이 들어와서 원망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겠네요. 그리고 사랑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받는 것을 더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도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은 사랑은 쌍방이 다 하였으나 사랑하던 감정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에서 느끼는 아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모든 상황을 통칭하여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실연의 아픔에 해당하는 요소들이지요. 

 사실 사랑이 끝났다는 것에 의아해 하실 분은 잘 없겠지만, 남자친구와의 ‘우정’에 의아해 하시는 분들 있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연애를 할 때, 남자친구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일상을 함께하는 연애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구속하는 유형은 결코 아닙니다만) 그게 아니라도, 남자친구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여도 솔직하게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금방(다른 ‘친구’들에 비해) 마음을 열고 믿게 된다는 뜻인데요, 그렇게 형성된 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요하거나 소소한 순간들에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별을 맞았을 때 저는 사랑이 끝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정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기를 무수히 시도하곤 했는데, 그건 참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더군요.

 

                   상기의 이유 때문입니다. 젤 친한 친구였잖아요 ㅠ_ㅠ 마음이 정리되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요? 


 어쨌든 몇 번의 연애 끝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슬프지만 견딜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면 그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잃어버린다는 것 자체는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 그 아픔은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 그것이 끝난다고 하면, 한결 견디기 쉬운 법이니까요. 게다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훨씬 회복하기가 쉽고요.

 

 그리고 이제 좀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내용이 많이 길어지니 이건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 설명할께요. :)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1. 10:00








학교가 양성하고자 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의 인간상일까요?


저는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 경력도 이제 겨우 2년차인 초보 교사입니다. 아직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르며, 아이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생 노릇인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 여기 저기 참고서를 보고 일일이 메모해 두었다가 수업시간에 자료로 활용하는 것, 그런 것이 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 교훈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근면, 정직, 성실’입니.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근면하기만 하거나 정직하기만 하고, 성실하기만 사람을 학교가 길러 내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한때 전경련에서 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업 경영자들의 모임인 전경련이 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이것은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자본의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만나는 지문이나 작품마다 해줄 얘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간혹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면서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노동탄압에 대한 예를 들거나 노동자의 권리 등을 얘기할 때면 어김없이 반박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아마도 장차 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처럼 자본의 시각에서 반박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조중동을 읽고 있습니다.

 

노동자 의식을 거세한 인간 양성

 

이것이 자본이 원하는 인간상입니다. 교육부가 어떤 의도에서 전경련의 교과서 집필을 허용하려고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노예인데 생각은 주인의 머리를 가진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은 민주시민을 양성하지 않겠다는 반교육적 교육포기 선언과 같습니다.

 

정직하기만 한 사람, 근면하기만 한 사람. 이런 교훈은 주로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가 자본이 원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내걸었던 교훈입니다. 왜 강원도의 학생들은 희망버스를 빨갱이들의 집단 선동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르바이트를 하면 반드시 최저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무노조 경영은 왜 지지할까요?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주변에서 듣고 배운 사회교육의 결과입니다.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요?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를 두고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친일 세력의 후예들이 만들어 준 국정 교과서를 열심히 가르쳐 주면 훌륭한 교사일까요? 불의한 세상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키워 주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이 될까요? 머릿속에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환경의식이 없으면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민주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민주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질 높은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학교가 길러야 할 인간상은 품행이 방정하여모범상을 받는 학생이 아닙니다. 골든벨을 울려 스타가 되는 학생은 더더욱 아닙니다. 노동자 의식을 가진 건강한 인간, 내가 누리는 작은 자유가 우연히 던져진 것이 아니라 선배들의 피땀으로 일구어 낸 소중한 가치라는 역사의식을 가진 인간, 비판능력과 주권의식을 가진 건전한 인간, 권리의식과 평등의식을 가진 그런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있어도 생각이 없는 사람을 길러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불행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직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존재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