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3. 05:30


스릉님의 포스팅입니다. http://libertyanddiversity.tistory.com/entry/예비-대학생에게-당부하고-싶은-것
요기에 댓글을 열심히 달아주셨던 쥬빌리님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쥬빌리님께 가장 드리고픈 말이지만, 다른 분들도 들어주시고 보충하거나 반박해주시면 더욱 좋겠기에 따로 포스팅을 해 봅니다.


  댓글로 논의하기에는 불편한 부분도 있고, 또 댓글로 하면 너무 길어져 읽기 불편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포스팅 올립니다. ㅎㅎ 그런데 사실 쥬빌리님이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포인트를 지금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서 제가 옳게 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ㅠ_ㅠ 괜히 제 입장만 또 반복하고 있는건 아닐지 걱정인데요; 일단 저는 우리가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답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을 신선놀음이라 생각하는 것은 사실도 아니며 위험하다는 것이 제가 해명하고픈 바이구요.

우선 인문학을 신선놀음이라고 표현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잘 읽었습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그게 생계유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경제적 자살)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유복한 집안의 자제이거나 생계를 내팽개쳐야만 할 수 있다는 말에서는 제가 권한 내용에 대해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깊이 전공을 하겠다면야 어렵겠지만, 모두가 전공자 수준으로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는 사실 없거든요. 아마 "인문학을 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서로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 말은 '생계를 팽개치고 인문학을 깊이 전공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은 하든지 인문학적 마인드를 키우라'는 뜻이었어요. 사실 대학생 시절이 그러기에 가장 좋은 때고요.

또한 애초에 제가 경계하고 싶었던 부분은 '신선놀음'이라는 표현이 주는 부정적 뉘앙스였습니다. 신선놀음은 아무 근심걱정 없이 즐겁고 평안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필수적인 게 아니라 '유희'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표현 아니겠습니까? 경제적으로 걱정 없는 사람이어야 하기 쉬운 학문이라고 해서, 그것 자체가 즐겁고 평안하게 지내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거지요. 단지 유희도 아니고요. 인간의 본질과 더 나은 인간과 현실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사유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인문학이 돈벌이로 직결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세상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하기 쉬운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해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역시 위험하고요. 누구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내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을 선택하려면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서는 힘듭니다.

물론 취업에 직결되지 않는 학문이라는 점은 사실이고, 많은 인문학도의 고민입니다. 열정이 있어도 마음놓고 그 공부를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은 안타깝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 관련 진로를 기피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는 그렇게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인문학 자체를 기피하게 되면 안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해야한다는 생각도 안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는 "행동하지 못할바엔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의미없다"고는 생각 안해요.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야 아주 조금의 행동으로라도 이어지지 않겠어요?(물론 생각에 그치기 보다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훨씬 더 좋지만요)

그리고 인문학이 이미 결정된 무언가를 그저 전달하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인 공부들은 물론 정해져 있는 것들을 배우지만 제 생각에 그건 사유의 틀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감을 잡기 위해 배우는 기초공사지 인문학의 본질도 궁극적 목적도 아니에요. 만약 이미 결정된 것들을 전달하려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인문학자들이 부유했다는 점이 부정적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요. 현실적인 고통 없이 나온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일테니까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한 가지 사유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는거구요.

그리고 제가 하는 말이 경험에서 나온 말인걸까 궁금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해 없기를, 저도 직업 전선에 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저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져 보았다는 뜻이지요. 그런 사람으로서 짧게나마 경험한 사회는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적정한 수입에 안정된 직장이 물론 중요했습니다. 직업 전선에 나가기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가 본 후에는 더욱 그게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픈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자기 앞가림을 하라는 말씀은 백번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죄다 철없는 짓이라는 말에는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가치를 존중하되,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 드린 것 기억하시죠? 생계 유지도 하고, 가치에 대한 고민도 해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렇기에 더욱 만약 인문학은 그저 신선놀음,이라고 생각하면 그쪽에는 손이 가지 않을 것 아닙니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거나 그걸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게 사실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을 안하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또 답 주신 내용 중에서 고전을 읽는 것보다 현실적 삶에 집중하라고 권한다고 하셨지요? 저도 경험에서 얻는 깨달음이 얼마나 생생하고 힘을 가지는지 느꼈기 때문에 현실적 삶이 주는 교훈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전을 읽는 것이 주는 교훈은 또 다른 차원의 것이지요. 인용하신 '지하로부터의 수기'같은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으려면 참 험난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계몽과 이성의 우상화, 이상화에 대한 고발을 고민하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잔혹성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왜 나쁘지요?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환상을 깨어서 충분히 가슴 아프고 괴로울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고, 그 부분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게 인간 본질의 전부도 결코 아니지 않겠습니까? 거기서부터 또 새롭게 해야하는 고민과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우리를 더 좋은 인간이 되도록 단련시켜 줄 것입니다. 쥬빌리님이 찾고자 하는 절대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혹은 그것을 찾고 싶어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한 고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인문학이 행동을 요청한다고 하신 말씀이 참 훌륭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을 하려고 계획하시는 건 더 훌륭하시고요. 사복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도 저는 정말 훌륭한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향해 행동할지 모르고 행동하는 건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물론 쥬빌리님이 무엇을 향해 행동할지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이 앞으로도 영원하진 않을 가능성은 꽤 높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고민의 과정이 수반되겠지요. 무엇을 행동할지 알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걸 도와주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의 의지를 가지신 쥬빌리님이 어떤 것을 향해 행동을 하면 좋을지도 반드시 고민하셨으면 좋겠다는 뜻이고요.

지난번 댓글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잘 전달 못한 것 같다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무엇보다도 조금 더 나이많은 사람의 훈계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가 그럴 입장도 아니고요. 제 생각도 완성되지 않은 생각이고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옳은 말도 아닐 겁니다. 다만 쥬빌리님과 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렸고, 혹은 다르다고 오해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래도 만약 다른 생각이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게 우리 서로에게 자기를 돌아볼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쥬빌리님의 댓글에 해명도 하고 의문도 던져보았습니다. 제 답에 대해 또 답을 해 주신다면 그것도 반가울 것이고, 읽고서 한번 생각만 더 해 주신대도 충분하겠습니다.


앞으로 쥬빌리님의 대학생활이 알차게 채워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2. 08:30


 SBS에서 만든 '짝' 이라는 프로그램 많이들 보십니까? 저는 그동안 지나가다 잠시 보는 것 말고 제대로 챙겨본 적은 없었는데요, 이번에 한번 찾아 보니 재미있더군요. 기본 포맷은 여러 명의 남녀가 서로를 탐색하고 데이트하고 최종결정을 하는 기본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의 포맷이지만, 일반인들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점, 그냥 짧은 시간동안 설정된 데이트를 한다기보다 시간을 두고 합숙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는 점이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어서 더 몰입하게 되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남자 1호, 여자 1호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 것, '애정촌'이라거나 '짝'이라는 한글 이름을 붙인 것 등도 참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그런 익명성이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을 붙임으로써 좀더 객관적이고 대표성이 있는 느낌을 주어 공감대를 넓히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 우리도 모두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일 뿐이지, 라는 느낌?)

 이번에 제가 찾아본 프로그램은 "애정촌 13기. 노총각·노처녀 특집 마지막회"였습니다. 굳이 노총각 노처녀 편을 찾아 본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 함께할 사람을 찾는 과정에 더 오래 있었던 선배들에게서 무언가 느끼고 배울 점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느끼고 배운 점이 있었냐고 물으신다면, 물론 그렇습니다만 오늘 말하고 싶은 주제는 "와 선배들은 역시"라는 느낌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설명해보자면 "와,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은 역시" 라는 느낌의 내용이죠.

 뭐냐, 바로 여자 2호님과 관련된 러브라인이었습니다. 여자 2호님은 35살의 고등학교 교사이십니다. 이 분은 처음에 마음에 들어했던 남자 5호와 처음부터 여자 2호분을 마음에 들어했던 남자 7호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쁘시죠? 목소리도 좋으시더군요.


 


 남자 5호분도 역시 무척 매력적인 분입니다. 참가자 중 나이가 가장 많으셨지만 첫인상 선택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으실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계시고, 광고일을 하시는 분답게 예술적 재능도 있으시고 센스도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조금씩은 호감을 가졌던 여자 2호분과 남자 5호분이 완전히 서로에게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던 대화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남자 5호님에겐 오토바이를 타는 취미가 있는데, 그분에게 그건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젊지만은 않은 나이셨던 만큼, 그런 취미가 나쁘게 비칠까봐 고민도 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여자 2호님이 남자 5호님에게 "오토바이는 위험해요"라고 말을 하신겁니다.

 결국 서로 호감은 느껴지는데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알기 어려운, 감정적으로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겁니다. 최종선택을 앞두고 서로의 마음을 잘 알기 어려웠던 두 분은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 동영상이 막혔나요? 아.. 이거 영상으로 보셔야 하는데 ㅠ 아쉬운대로 캡쳐로 ㅠ_ㅠ


 
 요약하면 대화의 요는 "오토바이는 위험해요"라고 말한 이유는 그냥 자신이 느끼는 바에 대한 표현이었을 뿐 오토바이를 타기 싫다는 뜻도 아니고 남자 2호에게 호감이 있거나 없음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없는 말이었다,는 것이 여자 2호님의 입장 변론이었습니다. 반면 남자 5호님은 그건 의도가 있어보이는 행동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아마 편집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것을 납득시키려고 주장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왜 의도가 없는 사람이 의도가 있어보이는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 5호분이 주장도 강하시고 말씀도 잘 하시는 편이었기 때문에 여자 2호분은 본인의 입장을 다 잘 설명못하신 채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완전히 서로에 대한 호감을 거기서 끝내시게 되었던 거지요.

 보면서 저는 정말 오글오글 했습니다. 화끈화끈하기도 했고요. 별로 낯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두 분의 입장을 모두 너무 잘 알 것 같았고, 그래서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은 저 대화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아무래도 대화를 주도해 나가면서 눈물을 보이는 여자 2호님에게 마지막까지 대표님 모드로 부하직원을 대하듯 자기 입장을 정리하신 남자 5호님이 잘못했다고 생각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에는 틀린 게 하나 없지만 그건 자기 입장을 말하는 내용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기 입장만 말해서는 안되는 거였죠.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시지를 않습니다. 물론 믿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5호님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남자 5호님에게 여자 2호님의 행동이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뿐이지 여자 2호님이 원래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네가 한 행동이 아무래도 나에겐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네 말을 믿기가 힘들다" 혹은 "그렇게 행동하면 나한테는 의도가 있는 걸로 보인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동은 누가봐도 의도가 있는거다" 라든지 "넌 그런 의도가 있었다, 그건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너무 복잡하게 따지고 들었나요? 사실 대화라는 것은 파고들면 이렇게 복잡한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밖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그게 자기의 세계 인식이다보니,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는 일이 생깁니다. 사실은 개인의 부분적 인식일 뿐인 내용을 그게 전부인 것처럼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보통 일일히 그걸 구별해서 말하진 않잖아요? 말하자면 표현은 실제만큼 정밀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괴리에서 오는 오해가 여러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서로 잘못 없다고 하는, 사실은 서로 잘못한 싸움들이 벌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자 2호님도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라는 말을 반복하시지만, '나는 그걸 잘 못받아들이겠다'라는 남자 5호님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모습은 화면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은 남자 5호님에게 '나는 당신을 오해하게 만들만한 행동을 안했는데 당신이 오해한거다.'라고 말하는 느낌을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남자 5호님 입장에서 본인은 오해를 했는데(즉, 본인이 봤을 때는 분명 의도가 있어 보였는데), 그 행동은 오해를 하게 만들지 않았다고(의도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할만한 행동이 아니라고) 한다면 답답하시겠지요. 

 이처럼 무엇보다 두 분의 대화에서 안타까웠던 점은 두 분 다 서로의 마음을 잘 못 읽어준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상대방이 말하고 싶어하는 입장을 받아들여주고 그에 대해 리액션을 해 주는 것 말합니다. 인정이 중요한 것은 인정받지 못할 때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리액션을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결국은 감정에 작용하기 위해서지요.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면 화가 납니다. 그러면 남의 말도 귀에 잘 안들어옵니다. 그러면 서로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만들고 거기서 애초에 논리가 뭐였건 관계는 끝장이 나는 거지요.(보통은 대화가 안되므로 논리도 끝장이 납니다.) 두 분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먼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인정하고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혹은 "오해해서 미안하다"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싶었던 거죠. 사실 서로가 의도한 바와 이해한 바가 달랐다면 그것은 오해이고, 거기에는 양쪽 다 크든 작든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사례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주는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여자 2호님은 상담 교육을 석사 전공하셨고 남자 5호님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분야에서 종사하시며 언변도 좋으신 분입니다. 게다가 두 분 다 살아온 시간이 짧지는 않으시고 그렇다고 특별히 더 배려심이 부족한 모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십니다. 이런 분들도 겪으시는 문제 상황이라면, 말 다했죠.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우리가 특별히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필요하지요. 그러니 못한다고 기죽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1.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고 할 것
 2. 상대방의 '일반화'된 말을 표면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여자 2호와 남자 5호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후, 여자 2호는 남자 7호를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얘기를 듣고서 셰프인 남자 7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 7호 "그럼 안 풀었네."
여자 2호 "풀었어요, 우리는 안맞다."
남자 7호 "그게 푼거야? ㅎㅎ"
여자 2호 "서로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참으로, 내 마음을 케어한다는 느낌이 드는 반응 아닙니까? 
(아, 개인적으로 남자 7호 이분 참 볼매셨어요.)

역시 관계에서 논리의 옳고 그름은 그 자체로는 개미눈물만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감정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필요할 수는 있겠지요. 인간에게 있어서, 단지 연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사실은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을 더해갑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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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재  (10) 2011.11.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0. 08:30





학교라는 곳에 출퇴근을 하고, 교무실에 제 책상이 생기고, ‘선생님’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들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경험도 실력도 없는 초보 교사 주제에 나름대로 개똥철학은 어찌나 고루한지, 누가 옆에서 뭐라 하든 말든 아직까지는 마이 웨이를 걷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교사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니, 올해 제 나이를 감안하면 저는 반평생 동안 이 일을 희망한 셈입니다. 하지만 2년쯤 뒹굴어 보니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제가 그리던 이상과 학교 현장의 괴리 또한 생각보다 컸습니다. 수업을 잘 하고, 아이들과 공감대를 나누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 이상으로 찾아오는 업무 외적 스트레스도 많았고, 학교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선배 교사와의 갈등에, 학부모와의 관계에, 경직된 조직 사회에서 느끼는 답답함 등등. 아직 저는 사회화가 덜 되었음을, 아직 치기 어린 낭만에 젖어있는 철부지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2년이었습니다.

 

지난 두 해 동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때로는 따뜻한 부모처럼, 때로는 장난끼 많은 친구처럼, 때로는 엄한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자세를 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귀가 얇은 편이 아닌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조언 저 충고에 고민하다보니 정작 제가 꿈꿔오고, 제가 그려왔던 저만의 학급 경영 계획은 하나도 시도해 보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의 편에 설 것인가, 학생들을 제압하고 카리스마 있게 통제하길 원하는 학교 관리자들의 구미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2년이 지나갔고, 이제 2011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3월은 초임 교사였던 제게 수많은 선배 선생님들께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달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들이 많았지만, 일관되고 공통된 요지는 ‘애들을 잡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사가 카리스마가 있어야 애들한테 말이 먹히고, 수업도 듣는다는 것이 요지였고, 3월에 고생을 하면 일 년이 편하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월에 애들을 잡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많이 때리고, 많이 혼내고, 많이 벌 줘서, 무서운 이미지를 심어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네네, 하면서 예스맨처럼 굴었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사실 매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표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학생이 느끼기에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어디 사랑일 수가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성폭력 가해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귀여워서 그랬다.’

 

한국 교육, 특히 중등교육, 또 특히 남고, 다시 한 번 특히 지방 사립고에는 군사문화와 체벌과 같은 육체훈육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쥐20’씩이나 개최하고, 스마트폰 수출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사회 구성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몽둥이찜질을 널리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어느 계급사회든 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훈육의 장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만큼 간단명료하면서도 효과만점인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이런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일본, 대만, 중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매’라는 약까지 강제로 투여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삐딱거린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약간이라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고개를 15도 숙이는 대신 5도 정도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는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기억에 새기게 됩니다. 불복종은 당장 큰 통증을 몰고 온다는 등식을 몸으로 잘 기억할 수 있게 말입니다.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가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 것일까요. 곤장을 치게 하여 ‘문제 있는’ 이를 반주검으로 만들고 이 장면을 보는 이들을 다 겁에 떨게 만드는 전근대적 행위가 수업 때에 하도 재미없어 잡담하거나 딴 일을 하는 아이에게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것이 정말 교육적인 행위란 말인가요.

 

실컷 두들겨 맞은 뒤에는 따뜻한 것처럼 보이는 서슬 퍼런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수야, 너는 이러다가 좋은 대학 못가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단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너의 부모의 희망을 다 꺾고 말야. 정말 그러고 싶니? 정신 차려! 이렇게 이야기하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영수의 신분상승 심리를 자극시킵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철수가 아무리 국영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된다고 해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말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이제 길어야 10년~15년 사이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구꼴통 세력이 정권을 잡고 지금의 정책이 반복ㆍ심화된다면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빈민촌과 할렘가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엔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너는 그래도 너의 부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하고 싶지 않니? 마약밀수갱에 들어가서 총 맞아 죽을 마음 없지? 그러니 공부나 좀 해!

 






교실에서의 체벌 관행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을 꺾고 저항하려는 용기를 말살시키는 것이 1단계, 겁이 나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2단계, 그리고 이를 통해 말 잘 듣고 반항하지 않는 황국 신민을 길러내는 것이 3단계, 이와 같은 단계가 당시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친일파 출신의 교육 관료와 함께, 이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이 전부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례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유지’를 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 (따귀 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할,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할 것입니다. 학교-군대-직장으로 이어지는 조직 사회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체벌문화가 사회를 좀먹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메커니즘의 선봉장이 되어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모름지리 교사라면, 무엇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실력도 없고, 경험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풋내기 선생에 불과하지만,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저는 두 개의 별명으로 불립니다. 첫째는 ‘마구마구’이며, 둘째는 ‘호구’입니다. ‘마구마구’라는 별명은 제가 즐겨하는 야구 게임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호구’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호구입니다. 학생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벌도 주지 않고, 매도 들지 않으니, 호구는 분명 호구입니다.

 

물론 저는 저 별명이 싫습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학생들에게 저런 류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교사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제가 옳다고 믿는 교사상을 바꿀 생각은 그보다 더욱 없습니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교사, 무서워하는 교사, 말 잘 듣는 교사, 수업 열심히 듣는 교사, 그런 교사가 되는 법은 간단합니다. 학생을 괴롭히면 됩니다. 벌을 주고, 때리면 됩니다.

 

선배 선생님들은 호구인 제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한 놈만 잡아서 제대로 조져버리라고요. 그럼 소문이 나서 애들이 함부로 못 대한다고요.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적절한’ 체벌을 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화가 나서 때리는 감정적인 체벌은 허용할 수 없지만,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어린 시절 잘못된 길로 접어들거나 방황을 할 때 엄한 매로 정신을 차린 추억을 되새기면서 스승의 고마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체벌은 정당한 것일까요?


저는 체벌에 반대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화를 참기가 힘듭니다. 사람들 사이에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단은 들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비판을 할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도 체벌 찬성론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체벌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폭력사회로 만든 가장 큰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맞고 자랐습니다. 지금 성인이 된 사회의 구성원 중에 자라면서 선생님에게 한 대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전 국민이 맞으면서 자라는 사회가 폭력적이지 않은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유럽이나 일본, 미국의 학생들은 체벌 없는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 청소년들은 매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유럽 각국과 일본에서 체벌은 불법입니다. 미국 대다수의 주에서 체벌은 불법이며, 일부 허용되는 주에서도 체벌을 하려면 부모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도록 하는 곳이 많습니다. 심지어 학생이 체벌을 거부할 경우 정학 등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곳도 있습니다. 최근 많은 부모들이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면서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내지만 외국에서 맞으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우수하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뒤처진다고 볼 근거는 더욱 없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아이들보다 못하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지도 못하면서 매를 들어야 하나요. 일제강점기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조선 놈들은 맞아야 말을 들어” 하면서 매질을 했다는 아픈 기억을 꺼내지 않더라도, 체벌을 앞세우는 교육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때리면서 교육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교사가 체벌을 할 때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순전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를 든다고 가정해봅시다. 체벌의 수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적절한 정도라고 해봅시다. 선생님들은 개인적 편차 없이 일정한 경우에만 매를 때려서, 학생들도 어떤 짓을 하면 맞게 되는지 예상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세상에는 맞을 만한 짓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동료가 맞는 것을 보면서, ‘저 녀석은 그런 짓을 했으니까 맞는 게 당연해’라고 방관하게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나서게 되지 않을까요. 만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더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맞을 짓을 한 놈은 때려도 된다’는 생각만큼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생각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매에 내성이 생기는 만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요. ‘잘못했으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준 어른들의 잘못을 비판한다면 잘못 짚은 것일까요.






 

체벌의 큰 문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사가 몸소 남을 때려도 된다는 것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권위의 발현'입니다. 교사의 권위로서 학생을 때리는 이 '생생한' 행위는 학생들에게 몸소 '권위'와 '권력'에 대한 시범 장면이 됩니다. 즉, 권력이 있다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무려 12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빵셔틀'이라는 용어는 새롭지만, 과거에도 '시다바리' '꼬붕' 등의 명칭으로 강자에게 굴복당하는 약자는 체벌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이는 마치 교사-일진-평민-빵셔틀의 피라미드 구조와도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행위'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을 너무나 쉽게 무시하는 곳이 그 동안의 학교였습니다. 그런 선생들을 보고 애들이 '아 나도 힘이 있으면 나보다 약한 사람들 때려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리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요? 통계적으로도 가정폭력이 있는 집의 학생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학생들의 폭력성은 불안한 가정사 외에도 부모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남을 때리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큽니다.

 

체벌 찬성 측의 주요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벌 금지가 교권의 축소 혹은 침해를 야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체벌이 문제 학생을 계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학급 통제가 학생 인권에 우선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위의 논리를 소급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릅니다. 체벌에 의해 유지되는 교사의 권위는 정당한가요? 체벌에 의한 교화가 교육적이라 할 수 있나요?

 

분명 체벌은 학생을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신체적ㆍ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의 청소년에게 체벌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체벌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학생은 자신의 행동을 시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한 물리적 제재를 가할수록 학생이 받는 신체적, 정신적 상흔은 커지며, 체벌과 폭력의 구분 또한 모호해집니다.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어떤 사유를 가지든, 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체벌에 있어 보편타당한 규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폭력에 가까운 체벌을 상습적으로 동원하는 교사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은 소수의 범법자로부터 다수의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체벌 금지 법안 역시 체벌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학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체벌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성의 문제를 잠정적으로 드러냅니다. 진짜 핵심은 학생을 때려야 하는가, 때리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교사로 하여금 체벌을 가능하게 하는, 체벌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 사회에서 가해지는 폭력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학교에서의 체벌을 당연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고, 이 때 형성된 인식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폭력적 자극에 대한 사회 전반의 역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가해지는 체벌은 체벌의 대상이 되는 학생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그 외의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복합적인 파급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폭력적 순환 구조의 재생산 과정에서 학생은 집단 내에서 상급자를 상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때문에 체벌(권위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이 익숙한 문화에서 성장한 인간은 사회의 또 다른 억압기제를 수용하고 내면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그렇듯 현실이 당위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체벌에 의해서만 계도되는 학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는 무력합니다. 폭력이 당연한 사회에서 체벌 금지가 현실적이지 못한 조치라는 비난에 앞서, 학교 교육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금지는 공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됩니다.




체벌은 교사의 ‘폭력적 권위’를 내세울 뿐, 지금 교육현장에 절실한 ‘도덕적 권위’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는 일종의 허구입니다. 교사가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체벌을 행사할 때, 요즘 학생들은 더 이상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체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따른 응당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교사의 심기를 잘못 건드린 대가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체벌은 교육적 목표 외에도 '교권의 확립'이라는 추가적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체벌이 허용되어 왔던 것은 '교육적 선도' 와 '교권 확립'이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즉, 교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교사가 학생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무기가 없다면, 교육적 선도가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휘자(commander)로서의 교사가 아닌, 친구이자 동료(company)로서의 교사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월등하게 교육적 선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입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아동들에게 어느 쪽이 더 그들의 잠재성을 북돋워줄 지는 명백합니다.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말로 타일러 가르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만약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더 우월하다고 입증된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기관은 상당히 살벌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군대는 즉각 '가혹행위'를 부활시킬 것이고, 초중고 학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교육에 체벌을 도입할 것입니다. 하지만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그리도 우월한가요? 성장기 아이들에게, 체벌을 통한 효과가 그것으로 인한 역효과를 무시할 정도로 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둔갑한 폭력, 그것은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탄의 매입니다. 몸에 새겨진 폭력성은 절대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랑의 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께 깊이 감사하고 지금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라면서 맞은 매 중에서 한 번이라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매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모든 매는 예외 없이 감정이 섞인 매였습니다.

 

세상에 '맞을 짓'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한 폭력의 정당화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차라리 저는 평생을 호구로 남기를 자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7. 08:00

야구 룰은 정말 골때리는게 많다.
축구에서의 '업사이드' 정도 되는 룰이 온 사방에 널려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야구 룰에 대해서 설명해보려 한다.
이른바 포스아웃과 태그아웃이다.

0. Base (루)

야구는 영어로 Baseball이다.
Base?
아니 빠따로 공을 치는 스포츤데 왜 빠따볼이라고 안하고 베이스볼이라고 하는거지?
그 이유는 Base가 야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1루,2루,3루. 그리고 주심앞의 홈 베이스.
타자의 목표는 결코 빠따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다.
1루, 2루 그리고 3루를 거쳐 홈에 들어와서 점수를 내는 것이 타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구는 빠따볼이 아니라 Base 볼인 것이다.

1. 태그아웃과 포스아웃

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는 웹툰을 하나 발견해서 설명 대신 퍼온다.
솔직히 이 웹툰보다 더 자세하고 쉽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사실 나도 이 웹툰보고 포스아웃과 태그아웃을 이해했다.
그러니 이거 보시면 된다.
<출처: 다음 스포츠 이우의 야구수첩>



이거 보고도 이해 안된다면 뭐.. 답이없다.
나도 이해했으니까.

이번주 포스팅은 굉장히 장문의 포스팅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친절한 웹툰 덕에 정말 허무하게도 끝나버렸다.
날로 먹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위해 보너스 코너를 첨부한다.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은 바로 구질에 관한 내용이었다.
패스트볼, 커브볼, 슬라이더, 체인지업에 관한 '충분히' 자세한 설명이었다고 생각 하는 바,
뽀나쓰로 문제를 몇개 내보려 한다.
다음 움짤들의 구질을 맞춰 주시면 된다.
단, 야구 올드비 임이 명백한 스릉 님, faker 님은 답을 내시면 안됩니다.

Q1) 다음은 어떤 구질일까요?



Q2) 다음은 어떤 구질일까요?


Q3)다음은 어떤 구질일까요?


Q4)다음은 어떤 구질일까요?


스릉님과 faker님을 위한 고급문제) 다음은 어떤 구질일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7. 07:00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일류입니다. 학부모들이 날밤을 지새워가며 좋은 학군에 자식들을 보내려 노력하는 진풍경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내 자식은 벗어나게 하려고' 입니다. 현장의 교사나 정부를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열정은 부모님들 못지않게 대단합니다. 국민 모두가 '일류대학'을 목표로 시간과 돈,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를 향한 교육열'. 이 말만큼 한국 교육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열기 속에 우리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20년 가까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오는 동안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상과 관련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단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들어왔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공부 못하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좋은 대학 못 나오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는 말입니다.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가 요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들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어떤 세상과 마주치더라도 진정 살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주어진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 기능적인 사람이 되라며,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서열화 기준을 그대로 내면화하여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향하여 매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배울 기회를 놓칩니다. '자아 발견' 내지 '자아 재발견'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수가 높아 사회적으로 성과를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순간 우리는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역시 나는 위대해!'하고 자위하며 '가짜 자아'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내면은 공허해집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나 가족, 회사가 원하는 모습이지 결코 진정으로 내면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면이 말하는 대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율적이며 책임성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모두를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 명예나 권력이라는 외적 잣대는 그야말로 부차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기준을 잣대로 하는 차별은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개성과 소질들이 더불어 존재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 출발점은 '자아 발견'일 것입니다.




학교 현장의 교육 평가방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현재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의 평가를 도입하더라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고, 사교육 문제와 교육 양극화 현상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입시지옥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에서 언급한 '주체적인 삶을 사는 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교육평가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곧 학교 전체의 문제이고, 교육 현장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그 뿌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교육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선발의 기능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 평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려면,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선발의 기능만이 강조되어 온갖 교육문제의 폐단이 생긴 것이라면, 선발의 기능을 제거 혹은 감소시키면 됩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대학평준화'를 주장합니다.




초중
고를 막론하고 중등교육에서 대부분의 시험 문제는 점수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 점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점을 맞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몇 등을 했느냐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장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깨우칠 아이들의 미래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은 어두울 것입니다. 제대로 된 독서 한 번 하지 못한 채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것에서는 교육적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내신 등급과 수능 등급, 사교육 문제, 석차 서열화, 명문대 입학 등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너무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높은 성적, 높은 석차에 대한 강박이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습니다.하지만 현재의 대학서열체제 하에서 교육평가는 서열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 해결 방법은 대학서열체제를 엎어버리는 것뿐입니다.




학벌체제는 대학교육에서도 파행을 낳습니다.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기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이미 자신은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자괴감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최근 대학가에 뜨거운 학구열이 불고 있지만, 그것은 학문 탐구의 장이 아닌 취업 학원으로서의 대학의 모습입니다. 향학열은 찾아보기 힘들고, '공부'가 아닌 '학점 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학문 경쟁력이 없는 국가에서 국가 경쟁력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몇 년 전 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이후의 인생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가 난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평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너무 심해서 ‘평준화’ 하면 다들 하향평준화를 이야기하고 평준화가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양 이야기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는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류 대학과 삼류 대학이라는 구분이 겉으로는 교육에만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부조리와 경쟁력 저하의 원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분야에서 특화될 수 있도록 하려면 서열화를 없애야만 합니다.




대학서열화, 고교등급제, 본고사부활, 기여입학제 등을 주장하는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시장에서 나오는 결과란 다양성이 아닌 독점이었습니다. 교육기회의 독점이고, 사교육의 독점이고, 학벌의 독점이고, 그것이 곧 부의 독점이 되며 신분의 독점이 되어왔습니다. 경쟁이란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서열화되어 있지만,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쟁을 통해서 교육의 효율성을 창출한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쟁이 아닌, 획일적인 시험 경쟁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평준화는 현실성 없는 공허한 외침이 아닙니다. 고교 평준화 체제처럼 대학 평준화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유럽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최부국 중 하나인 핀란드도,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프랑스도 대학 평준화 체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고교등급제와 비평준화체제(정확한 표현은 고교서열화 체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신봉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일부 명문대를 제외하면 평준화 체제에 가까운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 재생산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교육 불평등이 곧 계급 불평등으로 심화되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학 평준화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줄세우기를 위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의 중등교육에서는 현행 국영수와 같은 도구교과 대신 문학, 역사, 철학을 가르치는 인문소양 교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는 것에 더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6. 08:30
엄마를부탁해(교보문고30주년기념특별도서양장본+친필사인)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신경숙 (창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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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엄마 말고 그녀


오늘 제가 소개드릴 책은.. 너무 유명하죠? 그래서 사실 쓸까말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소설이라면 오만상을 찌푸리는 동생녀석이 읽어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이렇게 오늘의 주인공으로 모시게 되었답니다. '엄마를 부탁해'란 제목부터 사실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뭔가 가슴찡한 이야기는 웬만하면 좀 피하고 싶어하거든요. 그래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며칠 전 아마존 닷컴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문학, 픽션 부문 베스트10에 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경숙 작가님도 무지 좋아해서.. 결국 책장을 펼쳤습니다. (그 전에 신경숙 님의 이야기를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살짝!)


올해 봄, 한 미국의 교수가 미국 라디오 방송에 나와 '엄마를 부탁해'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죠. '김치냄새 나는 크리넥스 소설'이라며 엄마가 불행한 이유가 남편이나 자식들 탓이란 것은 미국 문화와 맞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비평보다는 비난에 가까워 저조차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요. 그 교수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눈물과 희생 속에 세워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나봅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이 더더욱 필요했던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으흐흐. 여러분께도 추천! 우리 모두 효도합시다! (급마무리ㅋ)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란 의미심장한 첫 구절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지하철 역에서 실종된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진짜 엄마의 삶과 욕망,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가족들의 여정을 그립니다.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의 이름 '박소녀'가 아닌 '엄마'로만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책은 무척이나 일관성있게, 꾸준하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감싸안는 엄마 말고 꿈도 있고 두근거리는 사랑도 있던 한 인간의 삶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나는 엄마처럼 못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언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엄마를 부탁해' 262p)


아이들 챙기느라 꽃단장 한번 제대로 못 해보신 엄마도 예전에는 깔끔떨던 소녀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삶을 조금씩 삼켜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삶의 조각들을 자양분 삼아 성장해가는 것은 아닌지.. 사실, 무조건적으로 삶을 내어주고 희생을 불사하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요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신세대 어머니들도 많으시니 '엄마는 부탁해'에 공감하는 세대는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점에서 더더욱 기억해야할 그분들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탔던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네 나이와 같다는 것을 너는 아프게 깨달았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 275p)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하지만 '한 세계 그 자체'였던 '엄마. 당신을 태초부터 품었던 그녀의 자궁, 그 동그란 세계에서 태어나 그녀의 삶을 딛고 성장한 우리의 삶. 이 소설의 의미 있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한 줄 몰랐던 '엄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유의미하고 고마운 책이었어요.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엄마를 부탁해' 작가의 말 중에서)


어떤 구절보다도 긴 여운을 남기는 '작가의 말'이죠? 단순히 어머니의 정을 이야기하고 우리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5. 08:30



사랑한다는 말 앞에는 항상 지금은,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순간에 피었다 사라지는 꽃처럼 원래 그런 것이다.
오래 지속되는 사랑은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 아니라
어제 핀 꽃이 지고, 오늘 다시 새롭게 꽃이 피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마음은 어제의 마음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피어난 마음이다.
그러니 당신은 어제의 사랑이 오늘 피어나지 않았다고
지난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았으면 한다.

비록 오늘은 꽃이 피지 않았고
앞으로 더 이상 그 꽃은 피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제와 이전날에 피었던 꽃이
살아 숨쉬는 생명으로 진정성을 가졌던 일만은 사실이지 않은지.

사랑이 끝났다는 것은 무척 가슴아픈 일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의 사랑이 끝난 일 때문에,
우리의 지난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 휴재 공고를 하며 올린 '새로운 시도'입니다. 그 동안의 글이 너무 분석, 설명 위주의 글이었던 것 같아서 조금은 감성적인 쪽으로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비슷한 내용을 건의해주시기도 했고요. 애초에 '칼럼'이 아니라 '에세이'로 이 코너를 소개한 것도 이런 분야의 글을 염두에 두었기도 했기 때문인데요, 출처가 없는 것은, 제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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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5. 07:50



대입 시험 전국 수석이 불문과와 물리학과에 진학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은 곧 법학과와 의예과로 바뀌었고, 현재에는 경영학과와 의예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 인사 담당자의 투덜거림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취업난이 시작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등록금은 연 천만원을 호가하고, 빚을 지는 대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인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경영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이제 사실상 취업전문 기술학교로 변했습니다. 새내기 때부터 '공부'가 아닌 '학점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공모전에 참가하고, 자비를 들여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스펙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 평가받고, 취업을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되지만, 대학이 취업학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모습을 띠는데 일조하게 된 개인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대신 밥벌이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화된 분야(의학, 법학, 공학 등)가 아닌 이상 인문계열과 사회과학계열의 학생들이 전공을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
다. 입사 원서 기준에 상경계열이 버젓이 적혀 있는 경영불패의 현실, 토익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영어광풍의 현실,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일어설 수 없는 무한경쟁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한 개인이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을 위해 바친다고 해서 그 개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개개인을 탓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없고 바람직하며 우리가 그것에 대해 눈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물질욕과 소비욕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은 대학 말고도 많습니다. 인생 선배로 살아온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들여다 봐도 몇십 년 후에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군집은 출신 대학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착하고 선량한 많은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양 알고 있습니다. 



론 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에 비해 대학에 가게 되면 유예기간이 연장되고, 학내 분위기에 맞춰가다 보면 고졸 취업자에 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합니다. 명문대에 들어간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혜택을 보기도 합니다. 적당히 놀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며, 선택할 수 있는 길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한정해 주기 때문에 안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학을 오긴 왔습니다. 이제 본인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대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난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기업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착각합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기업의 입맛에 맞추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업들은 창의적인 인재, 능동적인 인재,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인재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대학생 인재란 대부분 인력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찌보면 일회용품에 비견될 지 모르는 이 인력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학교들이 많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기업에 얼마나 취업했는가가 대학의 성적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공부하는 대표적인 학문인 경영학 전공에 토익 만점 받는 것 말고는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대학은 학문의 장입니다. 그것도 넓디 넓은 광장입니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학은 끊임없이 심연을 채우고, 그 위에 튼튼한 토대를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끝없는 심연만큼이나, 인간의 관심은 전방위적이고 그 깊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안정적인 토대는 사실 대학이라는 곳이 유일합니다.



런데 이런 곳을 단지 실용이란 명목 하에 기업 군대의 이병 양성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학문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용적 자세가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학문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참고서, 똑같은 선생들한테 12년을 썩었습니다. 그렇게 12년을 썩다가 대학에 오면 갑자기 탄성한계를 넘어버린 용수철 마냥 맥이 탁 풀려버립니다. 대학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정한 학습형태를 강요하지도 않고, 일정한 학문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즉 선택의 다양함이라는 자유의 본질적인 특성이 구현됩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12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년 동안 선택과 판단, 그리고  책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일단 매우 난감하게 느껴지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처음으로 접하는 판타스틱한 상황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다시 시류에 휩
쓸려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서야 닥쳤는데, 해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그 거룩한 기업이 원하는 인력으로 만들어 버리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닐까요. 대학을 가는 이유가 좋은 직장,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너무 허무한 것 아닐까요.



대학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합대학 같은 경우에는 정말 수많은 교수들이 있고, 학과가 있고, 강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끌리는 수업을 찾아가서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학습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학에는 수학의 정석 같은 바이블이 없습니다. 배울 것도 전방위적이지만, 배우는 방법도 전방위적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은 언제나 책과 씨름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씨름을 하며, 끊임없이 교수들과 피드백을 갖고, 그것을 현실에 비추어 보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딩 때 참고서를 외우듯이 대학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점점 고도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학부생 수준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학 공부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 말이 학과공부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님은 다들 이해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굳이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본적인 문제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즉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학에서 필히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확실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은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고하느냐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상황에서 판단을 하려면 사고가 깊어야 하고, 사고가 깊으려면 몸과 머리로 많이 섭취하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또한 주체적으로 판단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고를 어떻게 하면 깊게 하고, 자신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따위의 문제는 부단히 의심하고 생각하며,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보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으며, 기껏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업 군대의 이병이 되는 것이며, 피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기업 군대의 이병 되었더니 상병 꺾이기도 전에 강제 전역을 당해야 하며, 강제 전역을 당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기업의 이병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을까요.



이것은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으로 환원해서 생각한다고 해결책이 찾아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적 존재이고 이 문제 역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것을 당연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지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갚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한테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대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이야기 하고, 많이 듣는 것, 무엇보다 많이 생각하는 것이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린 자세로 세상을 대하되,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확고히 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다면, 감히 성공한 대학생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자,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4. 16:36

아래 사용한 이미지들은 임의대로 검색 및 불펌을 한 결과 얻은 것들입니다.
소중한 사진들을 공개해주신 각 신문사 사진기자님들 및 블로거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사진의 주인장들께서는 부디 노여워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올해 프로야구는 최초로 600만 관중을 돌파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몇 년 사이에 야구장에 부쩍 여성관중이 많아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젊은 꽃미남 선수들의 활약 역시 큰 공헌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정리해보았습니다.

8개 구단의 꽃미남 야구스타!

 

실력과 외모를 모두 갖춘 젊은 선수들을
팀별로 투,타 부문에서 각각 한 명씩 골라 16명을 꼽아보았습니다.

 

 

1. 삼성 라이온즈 투수 정인욱





2010년에 데뷔한 정인욱 선수는 올해 31경기에 등판해 80이닝을 던지며

6승 2패, 평균자책점 2.25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에 공헌한 정인욱 선수, 참 잘생겼죠?

 





2. 삼성 라이온즈 타자 조동찬






2002년에 데뷔한 조동찬 선수는 2011년 85경기에 출장하며

타율 0.216, 홈런 4개, 25타점으로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즌이 진행되어 갈수록 페이스가 올라가는 전형적인 '슬로 스타터'인데,

매년 시즌 초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기대한 만큼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0년에 타율 0.292, 홈런 9개, 51타점과 도루 33개를 기록할 정도로

5툴 플레이어의 포텐셜을 갖춘 선수답게 곧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3. 롯데 자이언츠 투수 고원준








2010년 넥센 히어로즈에서 데뷔한 고원준 선수는

신인 첫 해에 빼어난 피칭을 보여주며 올해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올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시즌 후반 체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얼굴만큼 깔끔한 피칭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입니다.

올 시즌에는 9승 7패, 평균 자책점 4.19를 기록했으며 152와 2/3이닝의 많은 이닝을 소화해

롯데 불펜의 과부하를 덜어주었습니다.






4. 롯데 자이언츠 타자 황재균






필자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너 황재균 닮았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때문에 홍성흔 전준우 등의 미남들을 과감히 탈락시키고,

황재균 선수를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미남으로 선정했습니다.

고원준 선수와 마찬가지로 ‘믿고 쓰는 넥센표’ 선수이며,

올 시즌 많은 실책을 기록하는 불명예도 떠안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놀라운 수비를 보며주며 내년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011 시즌에는 타율 0.289, 12홈런, 68타점, 12도루를 기록했습니다.

 

 




5. SK 와이번스 투수 김광현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실력도 좋은, 떠오르는 일본 킬러 김광현 선수입니다.

지난 2010년에 너무 잘 던진 탓일까요?

올해에는 부상 탓에 조금 부진한 모습을 보여 많은 여성팬들을 아쉽게 했습니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 ‘잘 노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2010년 성적은 17승 7패, 평균자책점 2.37이었습니다.

올해 성적은.....김광현의 이름값을 고려해 올리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 고고!

 




 

6. SK 와이번스 타자 최정






‘소년장사’로 불리는 최정입니다.

20세가 되기 전 두 자리 수 홈런을 기록한 역대 4번째 타자로도 유명합니다.

두산 김동주와 함께 손목 힘이 가장 좋은 타자로 알려져 있고,

기복 없이 꾸준한 공수주로 SK의 3루를 지켜주는 ‘보물’입니다.

올해 타율 0.310, 20홈런, 75타점을 기록했으며,

현재 6년 연속 두 자리 수 홈런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7. 기아 타이거즈 투수 심동섭






잘 알려진 한화의 거물신인 유창식이 광주일고 2학년일 때,

당시 3학년으로서 광주일고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심동섭 선수입니다.

올 시즌 자신의 포텐을 터뜨리기 시작해 매우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올해 57경기에 등판해 3승 1패 7홀드 2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2.77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8. 기아 타이거즈 타자 이범호






프로야구 선수 중 유일하게 이름에 ‘꽃’이 들어가는 이범호 선수입니다.

‘꽃범호’로 더 유명한 이범호 선수는 일본 진출 후 부진한 성적을 거두다

올해 한국으로 돌아와 기아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올 시즌 타율 0.302, 17홈런, 77타점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며

많은 한화팬들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쭉 잘생긴 모습으로 남아주길 기대합니다.

 





9. 두산 베어스 투수 이현호






2011년 신인선수 중, 데뷔 전 가장 유명세를 탔던 선수입니다.

필자의 사촌동생과 같은 고등학교(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온 덕에 필자와도 각별한 사이입니다.

고교 시절 ‘싸움닭’이라 불리며 과감한 몸쪽 승부와 불같은 직구를 던졌던 선수입니다.

프로에 와서도 신인 선수 중 홀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며 기대를 모았으나,

팀에서는 내년 시즌을 바라보며 조금 더 담금질을 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2012년은 이현호 선수의 해가 되길 기대합니다.

 





10. 두산 베어스 타자 정수빈






‘수빈어린이’라는 별명답게 오밀조밀하고 애교 있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서면 누구보다도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플레이를 해냅니다.

장차 이종욱의 뒤를 잇는, 어쩌면 능가할지도 모르는 슈퍼 외야수가 되리라는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공수주에 모두 능하며 주루 센스가 좋고 상황에 맞는 영리한 플레이를 잘 해냅니다.

올 시즌에는 타율 0.285에 31도루를 기록한 두산 육상부의 차기대권주자입니다.

 





11. 한화 이글스 투수 안영명






전 엘지의 레전드 포수인 김동수와의 한판승부로 자신의 배짱을 과시했던

한화 이글스의 미남 투수 안영명 선수입니다.

올해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성적을 볼 때

내년에는 화려한 재기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남산초-천안북일중-천안북일고-한화의 라인을 탄 성골 출신이기도 합니다.

 





12. 한화 이글스 타자 오선진






오선진 선수는 타 팀에 비해 다소 허약한 팀내 경쟁상대들 덕분에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많은 기회를 잡았었습니다.

하지만 늘 2%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다 올해 한상훈 선수와 이대수 선수가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자 잠시 벤치로 물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연관검색어에 ‘잘생긴 야구선수’라는 검색어가 등재된 만큼,

곧 ‘얼굴값’을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13. 엘지 트윈스 투수 박현준






올 시즌 초 엘지 트윈스의 돌풍을 이끌었던 신예 잠수함 박현준 선수입니다.

국내 최고의 언더포크를 앞세워 봄까지 마운드를 평정했으나,

역시 부상의 늪을 피해가지 못하고 쓸쓸히 경기장을 떠났습니다.

시즌 초 다승 선두를 달렸던 박현준 선수의 부진과 함께

엘지 트윈스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엘지 팬들에게는 올해 가장 아쉬웠던 선수가 아닐까 합니다.

얼굴은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거친 남자’가 더 어울릴 성 싶네요.

 





14. 엘지 트윈스 타자 이대형






프로야구 최고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이대형 선수입니다.

제 후배 중에서도 야구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이 꽤 많은데,

엘지 경기를 가면 외야부터 찾아간다고 합니다.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대형 선수의 허벅지를 보며 침을 흘린다고 하네요.

슈퍼소닉,이라는 별명답게 아주 빠른 발을 가지고 있으며,

올해에는 번트 타격뿐만 아니라 장타에도 눈을 뜬 것 같아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네요.

 

 



15. 넥센 히어로즈 투수 심수창






많은 남성팬들이 감사하는 선수입니다.

올해 이런 글들이 부쩍 많이 보였습니다.

‘제 여친이 야구를 싫어했는데, 심수창 선수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그만큼 얼굴 하나만큼은 연예계에 갖다 두어도 빠지지 않을만큼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 선수입니다.

올 시즌 18연패를 탈출하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는데요,

내년에는 18연승을 기대해보겠습니다.

 

 




16. 넥센 히어로즈 타자 김민성






필자를 닮은 황재균 선수가 넥센을 떠나 롯데로 올 때,

반대로 롯데에서 넥센으로 온 선수입니다.

롯데 팬들 사이에서 ‘재간둥이’로 불리며

공수주에서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출장 기회가 보장될 것으로 기대되는만큼,

눈부신 기량 향상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여성팬들에게는 눈요기를!

2012년 프로야구 700만 관중 돌파를 기원합니다.

 

스릉이었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1. 07:04






수능을 마친 고3은 말년병장, 방학한 초딩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잉여로운 존재에 속합니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몇 주, 혹은 몇 달간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이 족속들은 하루 24시간을 놀고먹는 데 투자합니다. 수능 보기 전에는 불안해하면서 놀았지만 이제는 그 최소한의 불안마저도 털어버리고 펑펑 놉니다. 수능을 잘 본 학생이든 못 본 학생이든 맘놓고 놀아제끼는 점에서는 요플레를 먹을 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뚜껑부터 핥는다는 만인평등사상이 떠오릅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수능에만 올인하고 그 외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개탄스러운 한국 교육 현실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들입니다. 수능이 끝나도 고등학교 교육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끝이 아니지만, 수능을 마친 고3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대다수의 학교가 단축수업을 실시하며 그마저도 수업을 안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무단 결석생이나 무단 조퇴생이 대거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고3들의 잉여스러움에 대한 지적이 여러 분야에서 터져나오면서 학교 차원에서 문화탐방을 하거나 영화관람을 하는 등의 다양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뻘짓이나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수능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수능 이후에도 적성검사, 논술, 면접 등 각종 '시험'들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수험생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의 수많은 아해들을 포함한 70만 수험생들은 그딴 건 나중에나 신경 쓸 문제라며 일단은 노는 것이 지상과제인 양 행동을 합니다.






거센 바람을 등지고 인생의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선 고3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수능 채점지를 손에 쥐고 울고 있나요? 앞으로의 일들은 나 몰라라 뒤로하고 잠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나요? 그대들에게 고합니다. 훌훌 털고 당장 떠날 것을요. 지금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을 탈출할 기회는 남은 일생 동안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곧 있을 점수발표에 연연해 반 답답함과 반 홀가분함으로 어영부영 날짜를 세고 있기엔, 피시방이나 당구장, 노래방에 갇혀 소비적인 문화에 집착하며 또 다른 쳇바퀴를 돌고 있기엔, 고3의 피 끓는 청춘과 두 달 남짓 남은 학창시절의 추억거리가 아깝지 않은가요.







 

물론 일상을 탈출한 뒤에 즐기는 시간들이 일상에서의 그것과 똑같다면 곤란합니다. 그동안 묶여있고 매여 있었던 이 도시를 떠나 넓은 대자연을 앞에 두고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골똘히,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삶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어른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받던 보호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할 결정들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부모님, 선생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은 듣되, 자신의 생각과 그분들의 생각이 다르거든 자신의 생각대로 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른들 말씀 들어 나쁠 건 없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어른들의 말씀대로만 행동할 것은 아니지 않나요. 이미 여러분들은 20년 가까이 말 잘 듣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기대에 맞춰드렸으니 이제부터는 그들의 기대를 조금씩 거부해보길 권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자라는 것입니다.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진 자기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권합니다.




 






독립은 자신이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독립하길 권합니다. 20년 동안 부모님 아래에서 먹고 자고 다 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해나가야 합니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그 돈을 전부 벌 수는 없지만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를 바랍니다. 기숙사비든, 하숙비든, 자기만의 공간은 자기 돈으로 시작해 채워나갈 것을 권합니다. 과외도 좋고 알바도 좋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게 되면 정신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입니다.





 

꿈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토익점수를 높이고 어학연수를 가고 스펙을 쌓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꿈이 아니라 목표입니다. 여러분 말고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미 무리의 병정개미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말하는 꿈은, 정말 대책 없어 보일 만큼 낭만적인 그런 꿈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 행복의 총량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차별 없고 부조리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이런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아주 조금 움직일 수도 있는 그런 초대형의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노 요코가 말했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요.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슴에 간직하고 끊임없이 꿈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저는 우리 소중한 고3 학생들이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년 동안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세상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