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1. 10:00








학교가 양성하고자 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의 인간상일까요?


저는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 경력도 이제 겨우 2년차인 초보 교사입니다. 아직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르며, 아이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생 노릇인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 여기 저기 참고서를 보고 일일이 메모해 두었다가 수업시간에 자료로 활용하는 것, 그런 것이 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 교훈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근면, 정직, 성실’입니.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근면하기만 하거나 정직하기만 하고, 성실하기만 사람을 학교가 길러 내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한때 전경련에서 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업 경영자들의 모임인 전경련이 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이것은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자본의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만나는 지문이나 작품마다 해줄 얘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간혹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면서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노동탄압에 대한 예를 들거나 노동자의 권리 등을 얘기할 때면 어김없이 반박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아마도 장차 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처럼 자본의 시각에서 반박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조중동을 읽고 있습니다.

 

노동자 의식을 거세한 인간 양성

 

이것이 자본이 원하는 인간상입니다. 교육부가 어떤 의도에서 전경련의 교과서 집필을 허용하려고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노예인데 생각은 주인의 머리를 가진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은 민주시민을 양성하지 않겠다는 반교육적 교육포기 선언과 같습니다.

 

정직하기만 한 사람, 근면하기만 한 사람. 이런 교훈은 주로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가 자본이 원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내걸었던 교훈입니다. 왜 강원도의 학생들은 희망버스를 빨갱이들의 집단 선동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르바이트를 하면 반드시 최저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무노조 경영은 왜 지지할까요?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주변에서 듣고 배운 사회교육의 결과입니다.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요?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를 두고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친일 세력의 후예들이 만들어 준 국정 교과서를 열심히 가르쳐 주면 훌륭한 교사일까요? 불의한 세상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키워 주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이 될까요? 머릿속에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환경의식이 없으면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민주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민주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질 높은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학교가 길러야 할 인간상은 품행이 방정하여모범상을 받는 학생이 아닙니다. 골든벨을 울려 스타가 되는 학생은 더더욱 아닙니다. 노동자 의식을 가진 건강한 인간, 내가 누리는 작은 자유가 우연히 던져진 것이 아니라 선배들의 피땀으로 일구어 낸 소중한 가치라는 역사의식을 가진 인간, 비판능력과 주권의식을 가진 건전한 인간, 권리의식과 평등의식을 가진 그런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있어도 생각이 없는 사람을 길러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불행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직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존재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7. 08:30
반짝반짝빛나는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에쿠니 가오리 (소담출판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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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열일곱의 내게는 별다섯개

일본소설에 문외한인 분이라도 '에쿠니 가오리'란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쪼오기 어떤 책이든 프로필 사진이 딱 박힌 띠지를 두르고 있어서 그녀의 서늘한 옆모습을 본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아니라면 '냉정과 열정사이' 원작소설가라고 하면 어떠신가요? 네, 옆모습에 자신있는듯한 저 여자의 이름이 '에쿠니 가오리'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이 자랑하는 3대 여성작가이기도 하구요.


에쿠니 가오리는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여성작가입니다. 그녀는 수필가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예민한 감수성과 특별한 일상을 잘 반죽해내는 솜씨를 가진 작가로 성장했죠. 사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예민하고 사랑스러운 여성, 꼭 그녀를 닮았습니다. 특히 제가 사랑하는 주인공은 바로 이 작품, '반짝반짝 빛나는'의 쇼코입니다.

쇼코는 번역가로 일하며 알코올에 중독돼 있습니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 무츠키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에겐 남자친구가 있죠. 이상하다구요?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의 세상은 온화하고 고요하게 흘러갑니다. 조금씩 결핍이 있는 그들이기에 오히려 더 서로를 잘 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들은 마법의 사자래. 무리를 떠나서 어디선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거지. 그리고 그들은 초식성이야. 그래서, 물론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단명한다는 거야. 원래 생명력이 약한 데다 별로 먹지도 않으니까, 다들 금방 죽어버린다나 봐. 추위나 더위, 그런 요인들 때문에. 사자들은 바위 위에 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갈기는 하얗다기보다는 마치 은색처럼 아름답다는 거야."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말투로, 쇼코는 그렇게 말했다. 추위와 더위 때문에 죽어가는 초식성 사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거리고 있는데, 쇼코가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무츠키들은 은사자 같다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다.


쇼코의 눈에, 무츠키와 그의 연인 곤은 남들과는 다르지만 아름답고 연약한 은사자처럼 보입니다.


이런 느낌일까요? 후후 무튼, 열일곱살에 이 부분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은 애매한 공감이라기보다는 위로였습니다. 부족하고 약하고 남들과 다른 존재라고 해도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기뻤던 것 같아요. 소수일지도 모를 다름을 바라보는 에쿠니 가오리의 따뜻한 시선이 은색으로 빛나는, 예쁜 부분입니다.

"아버지, 은사자라고 아세요? 색소가 희미한 사잔데 은색이랍니다. 다른 사자들과 달라 따돌림을 당한대요. 그래서 멀리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한다는군요. 쇼코가 가르쳐 주었어요. 쇼코는 말이죠, 저나 곤을, 그 은사자 같다고 해요. 그 사자들은 초식성에, 몸이 약해서 빨리 죽는다는군요. 단명한 사자라니, 정말 유니크하죠, 쇼코의 발상은."

"너희들 일은 잘 모르겠다만. (…) 하지만 나한테는 며늘아기도 은사자처럼 보이는구나."라고 말하고, 또 조용히 웃었다.


왠지 웃음이 지어지는 부분이죠?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리고 스무살까지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 야자와 아이의 만화, 자우림 김윤아 씨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저와 제 친구들의 멘토였습니다. (공감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ㅋㅋㅋㅋ ) 그래서인지 그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에는 도통 손이 안 가고 소설책을 고집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게는 이야기들이 더 큰 위로가 되어줘왔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결과죠.

이 책은 워낙 유명하고,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 제가 굳이 소개드리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AGAIN 2002, 열일곱의 제 자신을 그리워하며 추억 속에서 이 책을 꺼내왔습니다. 침대 맡에서, 혹은 쇼코처럼 목욕을 즐기면서 읽고 또 읽고 훌쩍거리기도 하고 실실 웃기도 하며,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을 함께 보내준, 응원해준 멘토를 여러분께도 소개드리고 싶어서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6. 08:30


 제목에서부터 벌써 감을 잡으신 분들 있으실 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블로그 하나 추천하려고 합니다. 이 블로그는 우연히 트위터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한 번 빠지게 되면 일상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그야말로 '농약같은' 매력을 가진 포스팅들이 그득합니다. 이 블로그는 "망한 연애담"을 제보받아서 블로그 주인께서 포스팅해주시는 방식의 블로그인데요, 아주 인기가 많아서 이제 책도 곧 나오게 된다고 하네요. 이 블로그가 생긴지 꽤 초반부터 (포스팅 갯수가 얼마 많지 않았을 때부터) 쭉 이 블로그의 발전을 지켜본 저는 이 블로그를 통해 그야말로 '성공의 과정'을 보았습니다.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 (노령 싱글인을 위한 자기주도 연애 학습의 전당)
 http://www.holicatyou.com/category/%5B황망한소개팅%5D%5B황망한연애담%5D


 사실 이 블로그는 아주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나영이'가 추구하는 것과는 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아주 재미있는데,(아 물론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아닌데 ㅠ_ㅠ..그게 최우선은 못 되고 있는 현실?!) 그건 블로그 주인장님인 홀리캣슈님의 감과 편집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할 것이고, 또 여러 사람의 '경험담'이기 때문에 그 만큼 또 생생한 디테일들이 무궁무진하게 등장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망한' 연애담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웃기기도 하면서 위로도 받게 되는 따뜻한 곳이지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혹은 '아, 나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구나!' 라면서요. 

 그리고 나영이가 20대 중후반의 시각 - 연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어느 정도의 의구심을 아직 가지고 있는 - 의 성격에 가깝다면 여기는 '꼬꼬마는 자제부탁'의 분위기로 기본 30대를 넘긴 분들이 주를 이루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연애관이나 원칙도 분명히 서 계신 편이고 또 더 많은 인생경험으로 더 농도짙은 *-_-*(어머) 이야기도 가능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간혹 20대의 사연도 소개 됩니다만은) 말하자면 오빠 형 언니 누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마음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들을 수 있는 곳이랄까요.


 그런데 사실, 이번에 이 블로그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한 포스팅 때문인데요, "흥한 연애담은 배알꼴려서 올리기 싫어요"라고 일갈하시며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을 보여주던 블로그가, 참여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슬슬 여러 입장의 사연들이 올라오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한 사연에서 '도대체 그 사람 뭐야? ㅠ_ㅠ'라고 여겼던 입장이 되보신 분들이 '사실 그건 이래서에요 ㅠ_ㅠ' 라고 "웃을 수 만은 없었던" 감상평을 제보하시곤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사연, "집착의 수렁" http://www.holicatyou.com/608 이었습니다.

 사연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 제보하신 분이 단지 그런 행동을 했던 부분을 제외하면 실은 아주 멀쩡하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될 거에요. 보통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만났네'라고 끝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그러는 데도 원인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비단 '이상한'범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연애의 많은 부분에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나한테 있는 걸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해도 '괴물같은 행동'은 나쁘죠. 그건 분명 괴물이고, 나쁜 거니까 그 상태대로 계속 있으면 안돼요. 그의 '괴물같은 행동'에 상처받는 우리도 물론 가여워요, 무시할 수 없는 피해에요. 하지만 그런 나쁜 행동을 하는 그 본인도 가엽습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하게끔 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또 무서운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면 누구라도, 그런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그 나쁜 행동은 미워하되, 그 연약한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하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사실 분노하는 마음은 젊은이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저도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에 분노하는 자가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사회문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계층엔 언제나 '학생'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때로, 그 분노가 향해야하는 대상을 정확히 인지할 만큼 젊은이들이 노련한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들어왔을 때는 더욱, 그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나하는 우려도 가지게 되고요.

 그러니 참.
 알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수록 인간사는 측은지심으로 귀결해야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쉽지도 않고, 자칫하면 결국 내 상처는 치유할 바가 없어진다는 위험도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저 언제나처럼, 지향점은 거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사랑"하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4. 08:30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됩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을 할 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들이 학교를 떠날 것이며, 그 빈자리는 새로운 1학년들이 채우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방학식, 졸업식, 입학식 행사도 이어지겠지요. 


저는 이런 의식들이 싫습니다. 이런 행사는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을 합니다. 행사가 시작하면 저는 슬그머니 대열의 맨 뒤로 빠집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제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저는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합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는 강의석 씨처럼 국군의 날에 알몸 시위를 할 배짱도, 총 대신 감옥을 택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습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 하는 의식이 사무치게 싫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 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조회는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왜 아직도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을까요.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변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와 같은 이슈에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일까요.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았습니다.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립니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의 앞에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안락한 삶’을 향해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짓무르도록 답습합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은 그 나이에서만 겪을 수 있는 ‘구체적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진정한 교섭을 이룰 수 없었고, 부모 세대가 욕망하는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과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 됩니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존재감 확인,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불쌍합니다. 엎드려 자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느껴집니다.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온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이 느껴집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합니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조회는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독도를 제 땅이라 우기는 ‘쪽발이’들과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청산에 살고 싶다 말하며, 홍진에 묻힌 분네들을 조롱했으니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 17:27
자기만의방(세계문학전집13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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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누고픈 이야기라 급 포스팅을 합니다.
당황스러우셨더라도 즐거이 반겨주세요.


바로 이 분의 목소리를 전해드리려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내 숙모님 메리 비턴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려고 말 타러 나갔다가 낙마하여 죽었습니다. 내가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당시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한 변호사의 편지가 우편함에 떨어졌으며 그것을 열어보고 내게 매년 500파운드가 지급되도록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둘 - 투표권과 돈 - 중에서 돈이 더 무한히 중요해 보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지요. 그전까지 나는 신문사에 잡다한 일자리를 구걸하고 여기에다 원숭이 쇼를 기고하고 저기에다 결혼식 취재 기사를 쓰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쳐줌으로써 몇 파운드를 벌었지요. 그러한 일이 1918년 이전의 여성들에게 개방된 주된 일거리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알 테니 그 일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돈을 벌어 그 돈에만 의존해서 사는 어려움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애를 써보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지금도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 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항상 부득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고 또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 - 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 - 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숙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10실링짜리 지폐를 바꿀 때마다 그 녹과 부식된 부분들은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두려움과 쓰라림도 사라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 자유와 평등, 해방 등의 패러다임을 가로지르는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있는 주장이었지요. 당시 여성들은 제한된 경험, 인습, 통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으니 말그대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백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간에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실 - 그것이 사실이므로 - 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칠 것입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선구자들이었던 무명 시인들의 삶에서 자기 생명을 이끌어내며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작업 없이, 우리 편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녀가 다시 태어날 때 그녀가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겠다는 결단 없이, 그녀가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위해 일한다면 그녀가 출현하리라는 것과, 비록 가난한 무명인의 처지에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자기만의 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참고로 본문 중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울프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로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으나 기회가 없었던 '여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난 스릉님의 포스팅에서도, 또 제가 얼마 전에 소개드렸던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비슷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단지 이름과 얼굴만 다를 뿐이죠.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들에게 울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의 감상도 궁금하네요.

제게 큰 가르침과 용기를 주었던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큰 울림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30. 08:30
유홍준의국보순례
카테고리 역사/문화 > 문화일반
지은이 유홍준 (눌와, 2011년)
상세보기

별점평 : ★★★★★
한줄평 : 설명집이 아니라 이야기 같아 좋아요!

여러분, 제가 부득이하게 휴재를 했었죠? 죄송해요! 정말 빡세게 열심히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잘 보듬어주시와요! 무튼 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번 주의 책, 바로 '유홍준의 국보순례'입니다. 유홍준이란 이름, 모두 친근하시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중고딩의 필독서인데다가 얼마 전에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셔서 대단한 입담을 자랑하셨지요.

 

그가 왔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께서 '여러분'에 등장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문화재에 대해서 습자지만큼이나 얄팍한 지식을 갖고 있어요. 유물 관련 국사 문제는 여지없이 틀려버리곤 했죠. '우와, 아름답다!'라거나 '이렇게 정교하다니, 대박!'이라며 입을 헤-벌리고 감상은 잘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설명이나 부담스런 참고사항이 아니라 조금 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문화재 그 자체'를 바라보는 '유홍준의 국보순례'가 술술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칼럼들을 엮어낸 책이라 조선일보 사이트에서 검사하시면 바로 접하실 수 있어요. 제 기억에 남는 많은 유물들 중에 '백자 넥타이 술병'이 있는데, 조선일보에서 발췌한 부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이다. 제주병(祭酒甁)은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순백자를 사용했지만 연회용 술병에는 술맛을 돋우기 위해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그림이 단연 많다. 그러나 아마도 사대부들이 사용했을 술병에는 매화나 난초가 품위 있게 그려져 있고, 청초한 가을 풀꽃(秋草紋)을 아주 운치 있게 그려 넣은 멋쟁이도 있다. 그림 대신 목숨 수(壽)자나 복 복(福)자를 써 넣기도 했는데 거두절미하고 술 주(酒)자 하나만 쓴 것도 있다.

그런 중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백자 끈 무늬 병'(보물 1060호)이 있다. 이는 옛날엔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무늬로 표현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에 있는 15세기 백자 가마터에서는 술잔 받침에 이태백의 '술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네'(待酒不至)라는 오언절구가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술병에 푸른 끈 동여매고/ 술 사러 가서는 왜 이리 늦기만 하나/ 산꽃이 나를 향해 피어 있으니/ 참으로 술 한 잔 들이켜기 좋은 때로다."

이 술잔 받침과 쌍을 이루면 딱 알맞을 술병이다. 특히 무늬를 갈색의 철화(鐵畵) 안료로 그려서 마치 노끈이 달린 것처럼 실감이 난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한국인 특유의 멋과 유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남대 교수 시절, 시험문제로 "한국미를 대표하는 도자기 한 점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라고 출제했더니 인문대생은 달항아리를, 미대생은 이 끈무늬 병을 많이 골랐다. 그 중 한 학생은 유물명칭은 잘 모르겠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샘(선생님), 저는 백자 넥타이 병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맞았다! 이 끈무늬가 갖는 조형효과는 바로 넥타이와 같은 것이다.

이 병은 안목 높은 수장가였던 고(故) 서재식 전 한국플라스틱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소장품 중 이 한 점만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신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유홍준 국보순례 칼럼' http://j.mp/vBy8kS )

 
굉장히 멋진 문화재죠! 사실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갓 쓰고 글 짓는 선비님들의 모습을 떠올리기 쉬운데, 멋과 낭만 그리고 위트를 아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도 보여주니까요- 그래서 무척이나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유홍준 교수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곁들여져서 더더욱 재미지게 읽었던 것 같아요.

저처럼 문화재 감상은 잘하지만 딱딱한 교양서엔 체하시는 분들, 스토리 텔링이 곁들여진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은 분들, 혹은 유홍준 교수님의 무릎팍 도사를 감명깊게 보신 분들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9. 08:40



  오늘은 저의 긴 말 없이. 청춘 종합 선물세트같은 명작,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만화 <허니와 클로버>의 마지막 장면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만화로 된 작품이라 글로만 전해드리면 원작의 감동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글로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읽지 않은 분도 마음껏 상상하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혹 기회가 되는 분은 꼭 한번 원작으로 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도쿄로 상경한 성실한 미대생 다케모토는, 작고 갸냘픈 동급생 하구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집니다. 하구미는 요정 같이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대작들을 서슴없이 만들어내는 천재 소녀입니다. 만들어 내는 작품의 크기 만큼 요리 솜씨도 대범해서 재료는 통으로 쓰고, 맛은 먹기 힘들만큼 달콤한 요리들을 만들어 내곤 했지요. (그레이트 후르츠 밥이라던지, 사과에 벌꿀을 주르르 얹은 통사과 카레찜이라던지 하는...) 냄새만으로도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그 음식들은 매번 다케모토를 비롯한 남자 선배, 동기들을 고생시키곤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보낸 많은 시간 동안, 다케모토는 하구미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가 되지만 결국 그녀에게 사랑받거나, 선택받지는 못합니다. 여러가지 사건을 뒤로 하고, 미대를 졸업한 다케모토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꽃잎이 그야말로 굉장한 기세로, 종이 꽃가루처럼 흩날려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도쿄에서의 지난 5년 전부가, 꿈 속에 있는 듯한 나날이었다. 3평 플러스 부엌 1.5평. 욕실 없음. 대학까지 걸어서 10분. 지은 지 28년, 집세 3만 4천엔. 아침 햇살이 눈부신, 동향. 나는 오늘 이곳을 나간다.

  역으로 향하는 강변 길에서 그녀를 보았다. 이젠 단골이 된 그 빵 가게에서, 평소처럼 빵을 사 가지고, 그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재활치료를 하고 캔버스를 마주하고. 이 거리에서 그녀의 일상은 계속된다.
  작별 인사는 어젯밤 다 했으니, 이젠 말을 걸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말을 걸면 안 돼. 그래서 그저 묵묵히 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지금 말을 걸었다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말거야. 널 곤란하게 만들고 말거야.

 눈에 익은 강가 풍경과 너와, 모든 것이 봄볕에 물들어 핀으로 꽂은 그리운 사진처럼, 그저 그저 한 없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하구미를 그대로 지나쳐 보낸 다케모토는 혼자 열차에 올라 앉아 있다가, 차창 밖에서 자신을 찾으며 달려오는 하구미를 보게 됩니다. 황급히 열차 밖으로 나간 다케모토는 만나서 다행이라며 울먹이는 하구미가 내민 무언가를 받아 듭니다. 그리고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리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꼭 한번 안아 주고는 기차의 안과 밖으로 헤어집니다. 

 그리고 기차에서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쯤, 다케모토는 하구미가 준 보따리를 풀어 봅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식빵 한 봉지를 통채로 쌓아 만든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그녀답다고 생각하며, 도대체 이건 뭘로 만든 거야? 라고 속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클로버들이 꿀과 함께 발라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클로버의 꽃말처럼. 세상 모든, 세상 모든 행복을 당신에게. 그리고 드디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의미에 대한 다케모토의 독백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첫눈에 반한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강인함이, 연약함이, 모든 것이,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 왔다. 당신은 누구?(나는 누구지?)하고.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 여자 아이.

 - 나는 내내 생각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의미는 있을까 하고.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인가 하고. 이제는 알겠다. 의미는 있다.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구미, 난, 널 좋아하길 잘 했어.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추억이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네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가 있고, 단 하나의 뭔가를 찾던 그 기적같은 나날은, 언제까지고 달콤한 아픔과 함께 가슴 속의 먼 곳에서 영원히 그립게 빙글빙글 돌 것이다.



 저는 가슴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러분 듣기엔 어떠세요?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8. 08:30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보면 
비슷한 풍의 노래를 더 듣고 싶다고 생각이 될 때가 있어요.



http://www.tastekid.com/



취향을 분석하여 새로운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책,게임이나 작가 등을 찾을 수 있는 tastekid입니다.


키워드에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넣으면
상당히 옛날 가수까지 나와요.
모르는 가수가 상당 부분이어서 찾는 재미도 있어요.









예를 들면 Smog라는 밴드가 좋은데 그런 풍의 노래를 더 듣고 싶다, 그런 류의 밴드를 더 알고 싶다면

tastekid에서 smog를 넣고 suggest를 클릭,

그러면 저 아래에 결과들이 주욱 나와요.

그 중에 하나를 클릭하면 아래 그림처럼 창이 뜨고 대표곡이 유투브로 나와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음악을 들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한번 이용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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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7. 20:03

 

 주드 로가 낭송합니다 Poker Face




 



주드로 나이를 먹을 수록 어째 점점 더 익살스러워 지는 것 같고... 
뭔가 제2의 조지 클루니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유머감각 넘치고 잘생겼는데 뭔가 나쁜 바람끼 많은 하지만 매너 좋은 남자여서 끌리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 전부를 걸고 싶진 않은 그런 가벼운 남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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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7. 08:30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에 따라 학부 법학과가 무너진 현재, 문과 계열에서 가장 상위(대입성적 기준)에 있는 학과는 경영학과입니다.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만 해도 문과계열에서는 고려대학교의 ‘경영학과’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제외한 연고대의 모든 학과에 합격할 수 있는 학생들이 온다고 하니 이른바 경영불패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영학과는 비즈니스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또 그 인재들이 다시 모교에 투자하면서 점점 그 성장세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영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자본’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들의 천박함도 커지는 듯합니다. 그저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높고 화려한 건물들을 지은다고, 대기업에 많이 입사시킨다고 해서 ‘Greatness’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대학에서 철학을 복수전공 했습니다. 간혹 복수전공으로 뭘 하고 있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철학이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의 90%가 이렇게 반응하고는 했습니다.




대체 왜?




1학년 2학기에는 철학과의 필수이수과목인 ‘형이상학’을 들었었습니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들을까 싶은 이 과목의 수강정원은 무려 2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의 첫 날에는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싸인을 받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A폭격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강생 좌석표를 보니 학번대가 1700~1800대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습니다. 경영학과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학기 내내 음악을 듣고, 떠들고, 스포츠 신문을 봤습니다. 대학교 1학년의 어린 마음에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안면이 있었던 경영학과 1학년 친구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네 학과 사람들은 왜 A 주는 수업에 몰려다녀?



친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응, 우리는 복수전공할 필요가 없잖아.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이 경영학이지만, 다른 나라에는 학부 과정에 경영학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학에 관심이 있는 경우 학부에서 다른 전공을 공부한 후에 MBA같은 경영관련 대학원을 통해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러한 과정을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경영학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영학은 역사가 오래 된 학문이 아니기에 다른 사회과학에 많은 부분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경영학’이라는 학문만의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현상을 분석하여 요약한 성격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뒤적이게 되는 사전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하게 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가치를 제공하기는 어려운 학문입니다. 회계나 재무와 같이 기술적인 분야는 좀 낫습니다만 전략을 세우고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경영학의 나머지 분야들은 그야말로 표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일견 미래지향적으로 보이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으로는 지금까지 성공한 회사들의 리스크 대처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있지만, 앞으로 회사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경영학이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기업에 적용하게 되면 새로운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세가 된 전략을 답습하는 것이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낡은 것’이라 볼 수 있는 경영 이론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통찰력입니다. 현재 사회의 현상들을 통해 중요한 가치와 트렌드를 뽑아 낼 수 있는 귀납적 통찰이나 새로운 가치나 트렌드,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창의력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경영학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영학 전공 평점 4.0에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해외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공모전까지 여러 번 휩쓴 인재들을 독시하는 대기업이, 왜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창의력 있는 인재가 없다고 툴툴거리는지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경영학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리더십’입니다. 저희 학교의 많은 학생들도 ‘리더’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더 구체적으로는 ‘CEO'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경영학과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CEO도 좋고 리더도 다 좋지만 리더십은 그 성격상 기본적으로 허영을 깔고 시작한다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리더라는 자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일 뿐 아니라, 그 욕망 자체가 위계의 끝단을 소실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경영서적은 온통 거대기업 총수의 관점에서 경영을 논합니다. 트랜디하게는 스티브 잡스를, 격조 있게는 잭 웰치를, 가깝게는 이건희가 되어보면서 독자들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판타지를 소비합니다. 왜 세계 최고의 구멍가게를 경영하는 책은 나오지 않을까요? 왜 세계 최고의 중간관리자를 지향하는 지침서는 나오지 않는 걸까요?



경영학과가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취업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업에서는 경영학과 학생을 선호할까요. 저는 기업 인사담당자도 아니고, 인사관리와 같은 과목을 들어본 적도 없어서 왜 기업에서 경영학과 학생들을 선호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영학과에서 배우는 많은 과목들은 일개 사원이 아닌 CEO나 쓸 법한 이야기가 많고 4년의 시간이나 들여서 배워야 할 만큼 깊이가 깊지도 않습니다.




혹시 경영학과 학생들이 기업에 더 필요한 지식을 갖춘 인재라서가 아니라, 기업에 더욱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호되는 것은 아닐까요? 경영학과 학생들은 기업 중심의 인적자원관리와 노사관계론을 들으며 노동의 기업적 측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가를 배워놓고 통제 당하는 꼴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교과서에 써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영학과 출신들은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경영학과 과목으로는 창의력이나 통찰력을 기르기 힘들다지만, 오히려 창의력 없는 사람이 기업입장에서는 명령에 잘 따르고 맡은 일만을 묵묵히 해내는, 이상적인 인재상일지도 모릅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사회학, 심리학, 인문학 등의 과목을 복수전공 해야 합니다. 그들의 학문에는 휴머니즘과 인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생각해봅니다. 미국의 블룸버그와 같은 경제뉴스 방송에서는 '생각보다 위기가 심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태로 수십만의 시민들이 자신의 집을 잃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경영학에서는 사랑도, 희망도, 낭만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돈을 버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냉혈한 조직 속에서 발전이 가능한가요. 무능한 사람을 아무런 대책 없이 낙오시키는 시스템이 우리 모두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요. 유능한 사람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현실 자본주의는 과연 정상적인가요.



기술은 좋지만, 인간다움을 상실한 수만 명의 경영학 전공 대학생들이 매년 사회로 쏟아집니다. 그들은 기업의 관리자가 되고, 언젠가는 CEO가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가변비용'에 속하는 직원들의 월급을 삭감함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실업자가, 그렇게 비정규직이 늘어났던 지난 10년 아니었던가요.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지만,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노동인구의 4%에 불과합니다. 일본도 6%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체 노동인구의 58%가 비정규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잘못 배워왔습니다. 못된 폐습만 배워 와서, '구조조정'을 마치 선진기법인 양 신주 단지 모시듯 했습니다.



쩌면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국민의 비율이 70%인 나라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은 60%, 유럽은 30-50% 정도의 국민이 자본주의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어설프게 자본주의를 배웠고, 그런 과정에서 못된 관행만 수입되어 이젠 자본주의의 뿌리인 '노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살아가는 방식의 질서를 정하고, 시행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인데 경영학은 왜 사랑을, 희망을, 휴머니즘을 노래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 학교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 없이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로’ 경영학과를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경영학과야 말로 방향이 없다면 이도저도 되지 않을 학문입니다. 여러 경영학의 갈래들 중에 어떤 쪽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지,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지 미리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분야에 가장 도움이 되는 다른 전공을 선택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영학에 올인하고 싶다면 회계/세법/재무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아 두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제일 유용할 것입니다. 이 분야는 손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활용도도 높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적어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창업을 하기 위해 경영학과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많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경영학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경영학이라는 이름 앞에는 '대기업'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이나 새로운 창업인을 위한 지식은 경영학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경영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인기학과에 왔다는 자만심에 빠져, 경영학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따라가기 보다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여 자신과 경영학이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