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6. 08:30




지금은 모든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국정 교과서로 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국어 교과서 (하)권에는 관동별곡이라는 공포의 단원이 있습니다. 강호에 병이 깊거나 말거나, 천산만낙에 아니 비친 곳이 있거나 말거나, 제 아무리 성실한 학생도 졸지 않고는 못 지나치는 곳입니다. 그래도 저는 고등학교 때 이 단원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가 느꼈던 즐거움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실력도 경험도 모자란 초보교사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잡설도 섞어주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6시간 만에 관동별곡을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단 한 순간 아이들의 눈이 빛나는 순간이 있었으니, 정철이 경포대에 들러 홍장 고사를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이겠다 싶어 강릉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홍장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려 하니, 아이들이 킥킥 거리면서 웃습니다.

 

 


"기생? 그거 걸레 아닌가요?"

 









저는 정색을 하며 두 가지 부분에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첫째, 기생은 오늘날의 성노동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 둘째, 걸레라는 말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기생은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계층이었다는 점, 상대하는 이들의 격에 맞게 가무, 시, 서, 화, 재능과 지조, 의협 등의 덕목을 모두 지녀야 했다는 점, 어릴 때부터 수 년 간 교육을 받아야만 기생이 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해서 퇴출되었다는 점 등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좋아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몇 개 써주고, 그녀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과 방대한 지식, 예술적 감각에 대해 얘기해주었더니 아이들은 기생이 당시의 식자층이었다는 데에는 일정 부분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에이 그래도 아무나 하고 막 하면 걸레잖아요."

 




저는 그 아이에게 반문했습니다.






"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은 또다시 킥킥대기 시작합니다.

 

 


"이성에 관심이 많고, 성욕을 느끼는 건 누구나 당연한 거야. 그건 어른이나 너희 같은 청소년이나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인류 사회가 이어져 내려오고, 종족이 보존되어온 원인이기도 해. 식욕이나 수면욕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성욕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거 아냐? 너희들 집에서 야동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니? 청소년의 성욕이 억압되는 것처럼 여성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여자들 보고 걸레라고 하는데, 그럼 하는 건 여자 혼자 해? 누구랑 하는데?"

 

 

 

"...남자요.. "

 

 


"그럼 너희들 성 경험 많은 남자한테도 걸레라고 불러? 대단한 정력가라 생각하고, 매력 있고 능력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때는 영웅처럼 치켜세우고, 우상처럼 모시지 않아? 다른 게 뭔데? 남자는 그래도 되고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있어?"

 




"......"

 






 

 

가장 맑고, 가장 순수하고, 때가 덜 타야 하는 17세의 아이들조차 걸레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대단히 폭력적인 기호입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어에는 수많은 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예의를 갖출 때엔 '신사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하면서 욕할 때는 '년놈'이라 합니다.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는 '성수여자고등학교'이지만 우리 학교는 '성수남자고등학교'가 아닌 '성수고등학교'입니다. '미혼모'라는 말은 있지만 '미혼부'라는 말은 없으며, 흔히 쓰는 '미망인'이라는 말은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습니다. 남성이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는데도, 외화 번역 자막에 남성은 반말로, 여성은 존댓말로 표현하는 것도 성차별입니다.

 


여성의 짧은 치마가 성범죄를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우습습니다. 요즘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데 여성들에게 그런 조언을 해야 할까요. 왜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할까요. 누가 여성들을 그렇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나요. 무엇이 조두순을, 강호순을 낳았나요.







 

여성들이 밤길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성으로부터의 위협'을 배제하면 말입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신체의 자유가 있고, 당연히 밤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가 있는데, 그들은 왜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성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남성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법은 어떤 형사사건에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주의할 것을 당부하지는 않는데, 유독 성범죄에만은 다른 잣대를 적용합니다.

 

밤길이 위험하니까 다니지 말라든지, 혹은 성범죄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라든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밤에 다니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든 아예 발가벗고 다니든(비록 경범죄에 속하더라도)가도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누가 건들지 않으면 얼어 죽지 않는 한 피해를 당할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행동은 항상 정갈해야 하며, 웃음을 함부로 흘리면 안 되고,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 심지어 남편에게 맞더라도 애들을 생각해서 이혼하면 안 되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을 따르며, 심지어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고까지 합니다. 칠거지악과 같은 반인륜적인 테제가 오랜 시간 사회의 지배적 질서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 가끔은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괜히 헛바람이나 겉멋이 든 것이 아니라, 먹물이 가득 차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리 높여 외치거나 앞장서서 구호를 선창할 만큼의 용기와 배짱은 없지만,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불합리에 고통 받지 않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세상이 오기를 원합니다. 여성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공간적 범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이너리티였던 인간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마초 집단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는 남자들만 있는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비난의 눈초리와 동정의 시선뿐이었습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남자가 되어서 여자 편만 드느냐고 난리법석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열린 사람들은 남자는 페미니스트로서 한계가 있다는 염려를 보냅니다.






 

남자편 여자편 니편 내편을 가르는 일차원적 사고에는 굳이 응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남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한 발 물러설 것을 충고하는 이들과는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난 남자야. 그래서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외면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가해자, 공모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생겨난 자기방어기제가 아닐까요. 혹은 남성이라는 사회적 수혜자로서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껴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제게 여성문제는 타자의 문제, 외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의 문제며 제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바둑알을 뺏고 뺏기는 싸움입니다. 다섯 개의 바둑알 중에 내가 세 개를 가지면 상대는 두 개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하나를 양보한다면, 상대는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양성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남성)는 사회적으로, 또 사적으로 분명 여성에 비해 상대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리다 낙심하지만,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남성의 그것보다 조금 더 좁습니다. 오죽하면 남자인 것도 스펙이라고 할까요.

 







남성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기회와 유리한 조건을 누리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사적으로 어머니, 누이, 아내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가면서도,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게 여성문제는 당신들의 문제라며 밀어내는 것은 정당할까요. 적어도 사회정의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성 일반은 여성 일반에 대해 사회적 강자임이 분명합니다. 노동자로 일하는 남성 최씨가 사장인 여성 김씨보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해도 그것은 성의 차이가 아닌 계급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표방하는 남성들은 이러한 착각 때문에 부르주아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여성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하고는 합니다.

 

남성도 때로는 피해자라고, 왜 남자를 적으로 만드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일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성 역시 여성과 똑같이 손해를 보고 똑같이 피해를 입는다는 식의 뉘앙스라면 곤란합니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피해자라면 꼬랑꼬랑한 유교문화원의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가부장제 사수에 열심일까요? 문제는 한국의 여성들이 모든 남자를 적으로 보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억압에 반대해 싸우는 여성주의자들이 다른 운동가들에 비해 너무 평화적이고 온건한 것에 있습니다. 가부장제를 온몸 바쳐 사수하려 하는 남성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라고 여성에게 말하는 이는 정치학에 문외한이거나 고도의 사기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성억압체제가 남성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남성도 궁극적으로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남성성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 행복, 감격의 순간들을 박탈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요된 남성성 안에서 남성들은 과연 행복한가요.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무슨 사내자식이 이렇게 약해 빠졌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야. 이런 말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질적으로 여성스러운 남성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남성들을 억압하는 말입니다. 여자끼리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풍경은 자연스럽지만, 남자끼리라면 어떨까요. 한 집 건너 커피전문점이 있는 번화가에서도 남자 둘이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하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보통의 '어른' 남자들은 폭탄주를 몇 잔 들이키고 뇌가 마비되어야만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솔한 대화란 철저히 형님-동생, 선배-후배의 위계가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남성에게 요구되는 '남성적' 사회성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권위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즐거움, 육아의 기쁨, 수평적 대화에서 오는 정신적 교감을 빼앗아갑니다. 남성이 누리는 가부장적 특혜는 사실 이러한 손실의 이면입니다.

 







저는 남자로서 여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가 근본적으로 양성에게 정의롭기 때문에 여성주의를 지지합니다.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남성인 저는 여성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성적 이해와 그것을 토대로 한 의사소통 및 연대는 어떤 인간 사이에든 충분히 가능합니다.

 

잘나가는 기업의 사장님이 노동자들의 문화를 내면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론을 읽고 감명 받은 상무님이 노동자 편에 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28세의 남성인 저는 주저 없이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