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4. 08:30
영화처럼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가네시로 가즈키 (북폴리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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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개똥같은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지'


* What's the story
영화화되며 큰 인기를 끈 'Go'와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집필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2008년작'영화처럼'은 다섯 편의 영화를 계기로 펼쳐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집이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 '정무문', '프랭키와 자니', '페일 라이더', '사랑의 샘'을 모티프로 한 에피소드는 각각 소소하면서도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첫번째 단편인 '태양은 가득히'의 경우, 국내작가의 작품마냥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다. 영화를 통해 가까워진 두 소년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어른으로 만나, 또 한번 영화로 재회하는 스토리로,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국민소설이라 불릴 만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구조와도 유사하다. '용일'과 '영화' 등 캐릭터들도 한국인이며 유년기의 학교 또한 총련계로 그려진다. Anyway, 이외에도 각 영화는 적재적소에 배치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형성하는 촉매제가 되거나 혹은 그들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 My story is..
가끔 사전 정보나 지식이 없어도, 노래만 듣고 그 작곡가가 누군지 혹은 영화만 보고 그 감독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도 명확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결코 좋고 나쁨을 평가할만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 수상자이자 인기작가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이, 내게는 그랬다. 언제나처럼 그의 이름은 표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가네시로 가즈키가 돌아왔다!'란 제법 굵은 띠지까지 둘러져 있었지만. 읽을수록 금세 알 수 있는 그의 냄새(?)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니까. 사실 '경계인'으로서의 설정 자체 때문일지도?


그의 한국이름은 김성일, 가네시로 가즈키는 재일교포 3세다. 특히 나오키상의 영광을 안겨준 동시에,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며 인기를 모은 'Go'(2001)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은 마르크스 주의자이자 조총련 활동을 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조총련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는데- 국적은 한국 국적이며, 일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재일교포로서의 자아, 그 혼돈과 갈등에 대한 진솔한 고백은 특유의 스피디한 전개 속에 흥미롭게 그려졌고 그 결과,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그의 소설에서는 한국인 캐릭터도, 총련계 학교란 배경도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삶이 텍스트 속에서 살아숨쉰다. 마치 그의 소설이 아닌, 그의 삶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의 모습을 상상해볼 때면, 익숙한 얼굴이 하나 팍! 하고 나타난다. 바로 '인민루니' 정대세다. 가네시로 가즈키처럼 재일교포 3세인 정대세는 일본인이자 한국인이자 북한인이다. 무척 복잡한 아이덴티티가 아닐 수 없다. 정대세는 나고야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모두 총련계 조선학교며 대학교 또한 총련계인 조선대학교다. 또 다른 축구스타 이충성과 유도 대표였던 추성훈처럼 그에겐 복수의 선택이 가능했고, 그가 선택한 것은 J리그 그리고 북한의 국가대표였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 같다. 원더걸스를 좋아하고 불고기를 즐겨먹는 정대세도,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의 주인공처럼 격동의 사춘기를 보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우린 재일 조선인도, 재일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지. 그러니까, 음, 이런 거야. 불이 꺼지면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볼 수 있을까, 이번에는 또 어떤 등장인물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이 우리의 머리와 몸 속에서 점점 부풀잖아. 그러다 불이 완전히 꺼지면 '팡!' 하고 터져버리지. 그때 우리란 인간도 함께 터져서 없어지고, 어둠 그 자체가 되는 거야. 그 다음은 스크린에 비치는 빛에 동화되면 그만이지, 그럼 우린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등장인물이 될 수 있어. 개똥 같은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극장의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신나고 가슴이 설레는 것 아닐까? 어때, 네 생각은?" (태양은 가득히, 31p)

삼천포로 푹 빠져버렸지만.. 다시 돌아와서 소설은 여느 때와 같이 최고의 가독성을 산출해내는 빠른 전개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체가 돋보이며, 특유의 묘사력 또한 녹슬지 않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는 깨알같은 재미가 부록처럼 따라오기도 했지만, 첫번째 단편이었던 '태양은 가득히'가 제일 좋았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대감은 하락했다. 영화란 하나의 모티프가 반복해 등장해서인지 살짝 지루함도 느껴지고. 그래도 읽기 좋고, 읽기 편한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타공인 영화 마니아로서 처음에는 이 소설에 '영화'가 얼마나 잘 녹아났는가가 궁금했다면, 책을 덮은 지금은 '추억'이 이 소설의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소설 속 영화는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계기, 마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을 맡는 순간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잠시동안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존재다.

마지막 단편인 '사랑의 샘'에는 이러한 느낌과 뜻이 잘 살아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위해 '로마의 휴일' 상영회를 직접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추억들과 맞닥뜨린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했던 생각으로 이 글의 마지막을 대신하고자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추억이란 성역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어중간한 관심과 공감과 이해로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은 흙 묻은 신발로 타인의 집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굳이 들어가려 한다면, 할머니의 마음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메울 수 있을 정도의 보물을 지니고 가야한다." (사랑의 샘, 350p)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9. 7. 08:30
갈팡질팡하다가내이럴줄알았지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기호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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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나쁜 소설이지만, 갈팡질팡 하지말고 어서 읽으세요!


 * What's the story?
이기호란 흥미로운 작가가 풀어놓는 여덟편의 짧은 이야기가 수록돼있다. 최면에 걸린 청자가 여관방에서 콜걸에게 소설을 읽어준다는 독특한 설정의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로 시작해, 흙을 먹는 이가 소개해주는 친절한 레시피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을 지나,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보문고를 뒤덮은 시멘트 벽을 곡괭이로 뚫어나가는 작가의 이야기인 '수인'까지 참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들, 이기호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 My story is..
가끔 전적으로 작가를 보고 책을 고를 때가 있다. 이기호는 그런 면에서 무척이나 믿음직스런(?) 작가다. (출간일과는 무관한 순서로)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사과는 잘해요'를 먼저 읽은 나는 어느새 검색 키워드로 '이기호'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만한 스타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호호호호호호'니까 좋다! 무엇보다도 책읽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도 쉽게 쉽게, 술술 넘어갈 책이라서 더욱 좋다.


이 책의 저자, 이기호! 72년생이며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와우! (난 지역감정과는 무관한 사람이지만, 강원도 사람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척 좋아한다) 1999년 단편소설 '버니'로 데뷔, 2004년 첫번째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2006년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2009년 '사과는 잘해요'를 출간했다. 특유의 문체와 독특한 설정으로 인해 종종 박민규, 성석제와 비교된다. 두 작가와 마찬가지로 이기호도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마성의 작가다.

표제작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저 제목은 바로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허구헌 날 린치를 당하는 찌질한 소년이 주인공인데, 선배고 깡패고 동네북처럼 맞지만 그래도 쎄-보이고 싶은 참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캐릭터다. 소년은 얻어터지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쩐지 그 상관관계가 우습고도 슬프고도 재미있다.

 "쓰다보면 간간이 얼굴이 홧홧해기도 했지만, 지난번처럼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건 그래도 무언가 내 의지라는 것이, 비록 조금은 갈팡질팡했지만, 조금은 숨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쓰는 것 자체도 계속 갈팡질팡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우연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글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니.... 하고 내 마음을 다독거리기까지 했다. 순전히 내 좋을 대로, 내 맘대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p.294)

어디까지가 fact고 어디까지가 fiction인지 모호하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것은 이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매력이기도 하고. 이 단편에서 나는 '글쓰기'란 행위를 하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됐다.

나는 꽤 오랫동안 글을 읽고 써왔던 사람이자 불량 국문학도로서 '글쓰기'란 것에 대한 복잡미묘한 애증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과연 계속 써야할까,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가, 잘 쓰고 있나 같은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뇌리를 스쳤고, 그러다가도 다시 글로 돌아오는 이상한 '밀땅'을 즐겨왔다. 그래서인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수인'이다.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수인'은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고 난 후 아수라장이 된 세상이 그 배경이다. 지금 다시 읽으면,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가 떠오르며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픽션이라고 생각했던 설정이, 지금은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편 주인공은 소설가다. 그가 교보문고를 뒤덮은 25m 두께의 시멘트를 향해 곡괭이질을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신경을 오직 시멘트벽에 집중하려 애썼다.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곡괭이를 내리칠 땐 오직 곡괭이 생각만 했다. 그 자신이 마치 곡괭이의 날이 되고, 곡괭이의 자루가 된 것처럼, 곡괭이와 한 몸을 이뤄, 온몸으로 벽에 부딪쳤다. 예상보다 더 큰 시멘트 조각이 벽에서 떨어져나왔을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순가 그에겐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도, 자신이 소설가였다는 생각도, 모두 의미 없는 것들로 다가왔다. 그는 때때로 자신이 왜 벽을 파내려가고 있는지, 자신이 왜 여기 서 있는지조차,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곡괭이와 벽에 내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을 견딘 것이었다." (수인 p.220)


작가는 끊임없이 '의지'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글쓰기란 행위는 전적으로 '의지'에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선명하든 희미하든, 의지란 것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작은 곡괭이 하나로 두터운 시멘트 벽을 뚫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가 될까? 그 두꺼운 벽이 지닌 함의는 독자의 의지에 따라 수백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넘기 힘든 등단의 벽이 될 수도 있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막아버리는 온갖 구질구질한 현실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이 괴상한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하는 독자의 고충을 형상화한 것일 가능성도 있겠다.

이기호의 소설은 유쾌하고 위트있는 문체로 슬프고 씁쓸하며 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무명의 소설가라든가 찌질한 소년 같은 루저 이미지의 캐릭터, 혹은 정말 평범한 우리네 이웃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말이다. 그대신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동시에 고약한 스릴을 불러일으키는 악당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정감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단편집에는 작가로서 이기호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어, '아, 이 사람이 이런 작가구나'란 깨달음도 간간히 얻게 된다. (특히 첫번째 소설에는 머리를 망치로 가격당한 것 마냥 ''띵-'하는, 낚인 느낌마저 들지만, 그는 독자와 무척 가까운 작가임에 틀림없다)
 
갈팡질팡하다가 거의 망친 리뷰를 마치며, 이 멋진 책을 집필해낸 작가의 말로 피날레를 장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망삘(?)이 강한 이 리뷰도 제법 괜찮은 엔딩을 맞이하겠지? 아무래도 그쪽이 더 좋은 엔딩일 것 같다.

미안합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내' 이야기들을 좀 써보았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말이,
당신에게는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인류평화를 위해 장가를 갑니다.
인류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해준 여자친구에게,
전(全) 인류를 대신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평화로워진 지구에서, 또 만납시다.

- 이기호, 소설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9. 1. 07:00
두근두근내인생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애란 (창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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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뻐, 아름아.


안녕하세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긴 하지만 어디에선가 가을냄새가 나는 것도 같네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9월이에요. 제가 태어난 달이기도 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름과 가을이 맞닿아 있다는 점이 맘에 듭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책은 독서의 계절이란 가을의 문을 열기에 딱! 김애란의 신간, '두근두근 내 인생'입니다. 기대되시죠?

'두근두근 내 인생'은 6월 15일 태어났습니다. 나름 신간 축에 끼는 것 맞죠? 그동안 김애란 작가가 발표한 책은 '달려라 아비' 그리고 '침이 고인다' 단편집 두 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녀의 긴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첫 장편소설입니다. 창비 계간지에 4회에 걸쳐 연재됐으며, 그때부터 큰 사랑을 받았죠.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기 때문에 리뷰를 쓰기 전부터 너무 긴장타게 됩니다. '두근두근 내 리뷰'네요. 여러분을 위해 서문만 살짝, 데려와 봤습니다. 혹시 스포일러라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과감히 '뒤로'를 눌러주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일곱에 나를 가졌다.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내가 열여덟이 될지, 열아홉이 될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나는 무럭무럭 늙는다.
내겐 누군가의 한 시간이 하루와 같고
다른 이의 한 달이 일년쯤 된다.
이제 나는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연애만 놓고 봤을때, 저는 좀 아닌 편인 것 같은데요. 이야기의 첫 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을 읽고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뭉글뭉글 올라오더군요. 여하튼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근두근 내 인생'조로증에 걸린 17살 소년 아름이와 아름이의 부모가 주인공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시점은 철저히 아름이의 시선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아름이가 전해들은 것으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젊은시절 이야기가 무척이나 세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이죠. 노래를 부르고픈 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고민하는 소녀 엄마, 운동이고 뭐고 다 관두고 싶었던 태권도 소년 아빠의 마음과 생각을, 아름이네 부모님의 생동하는 유년기를 만날 수 있어요. 그렇게 그 나이에 맞는 고민들을 껴안은 소년소녀들은 서로를 껴안게 되고, 아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이란 주인공의 이름도 그렇게 포옹의 느낌이 묻어나서 좋았어요. 김애란 작가도 "제일 먼저 생각한 건 누군가 두 팔 벌려 나무를 안고 있는 이미지였어요. 사람이 양팔로 큰 나무를 안을 때 그 '품'을 이르는 단어? 포옹의 단위? (웃음) 같은 거. '아름답다'의 '아름'도 될 수 있지만 제겐 그 나무 이미지가 컸어요" (출처: 알라딘과의 인터뷰) 라고 답하셔서 혼자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찌찌뽕?ㅋ)


주인공 아름이는 17살, 하지만 몸은 여든살 노인과 같습니다.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빵오빠나 코폴라 감독 作 '잭'의 로빈 윌리엄스가 떠오르기도 하죠. 이야기는 아름이가 엄마, 아빠를 위한 연애소설을 쓰고자 하면서 시작됩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돌보고, 아픔을 나누었던 부모님께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참 예쁩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많은 사건이 아름이의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인간극장'이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 첫 사랑 소녀와 이메일을 주고 받기도 하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시간을 마주하고 성장해나갑니다. 

주인공 아름이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은데요.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아름이네 아빠, 엄마도 그렇고 아름이의 멘토이자 친구인 장씨 할아버지도 무척이나 사랑스럽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바로 장씨 할아버지인데요. 아름이의 이웃입니다. 장씨 할아버지는 60대의 어르신이시지만, 여전히 소년스러운 분이에요. 철부지 같기도 하고 장난꾸러기 같기도 하고, 그치만 어느새 연륜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건네주시기도 하죠. 본문 중에서 장씨 할아버지의 매력이 잔뜩 묻어나는,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살짝 데려올테니 함께 읽어보아요. 

(성금프로그램 촬영 중인 아름이네 집에 불쑥 들어와서 방송국 사람들에게 말하는 장씨 할아버지)

"아름이 쟤는 아주 나쁜 아이입니다."
"네?"
우리는 한 번 더 장씨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왜요?"
"쟤는 저를 무슨 동네 형 대하듯 하거든요. 집에서 아주 버릇없게 키운 게 틀림없습니다.
지가 무슨 진짜 내 또래인 줄 알아요."
작가누나가 예의상, 진짜 예의상 한 번 더 물었다. 대충 받아주고 어서 끝내려는 것 같았다.
"아름이가 정말 할아버지를 형처럼 대하나요?"
할아버지가 어이없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답했다.
"네."
"그럼 할아버지는 아름이를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러자 장씨 할아버지는 새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쑥스러워하면서 한 마디 했다.
"친구요..."
 
정말 (이렇게 말씀드리면 외람되지만) 귀여우신 분이시죠. 김애란 작가는 한없이 슬퍼질 수 있는 이 이야기의 요소요소에 특유의 유머감각을 십분 발휘해 독자의 감정이 강약중간약,하며 좋은 리듬을 타도록 돕습니다.


또 하나, 김애란 작가의 장점인 풍부한 어휘과 그를 바탕으로 한 생생한 묘사, 그 생기를 살리는 리듬감이 이 소설에서는 무척이나 돋보입니다. 그녀는 소설 언어가 지니는 리듬감, 호흡에 대한 질문에 자신이 "실패한 시인"이라서 더욱 말의 리듬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답니다.   


아, 그러고 보니 17살의 아름이가 과거 엄마, 아빠가 아름이를 낳았을 때랑 동갑인 것처럼 저도 지금 저를 낳으셨을 때 엄마 나이와 동갑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름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를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라고 하더군요. 잊어버린 그때의 기억을 아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구요. 제 심장과 연결돼 쿵,짝,쿵,짝 박자를 맞추어갈 작은 심장을 가진 아기라니! 새삼 신비롭습니다.

음.. 찬란한 슬픔,이란 표현 다들 아시죠?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역설'이란 수사법을 배울 때 자주 언급되는 예시인데요. '두근두근 내 인생' 속 아름이를 만나며 제가 느꼈던 감정도 '찬란한 슬픔'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이 수없이 교차되는 과정 가운데서 아름이의 두근거림에 제 두근거림이 나란히 포개어졌던- 아프면서도 기쁘고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이토록 특별한 아이, 아름이의 소설은 어떻게 됐을까요? 또 첫사랑 소녀와의 로맨스는 어땠을까요? 무수한 궁금증들은 꼭, 책 속에서 아름이에게 직접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두근두근, 설레고 떨리는 여정이시기를 기도할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31. 08:30
마왕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이사카 고타로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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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생각, 생각을 하자!

마왕, 무척이나 친숙한 제목이다. 제법 유명한 드라마에, 영화까지 다들 '원작소설인가?'란 생각을 해봄직하다. 초능력자인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야기와 독자의 상상력, 그것은 시각을 뛰어넘는다.

작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작가다. '젊은 천재'라 불릴 정도인데 제법 끄덕여질 정도. 게다가 대중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의 작품은 드라마,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를, 귀염둥이 에이타군과 서정적 매력이 돋보이는 마츠다 류헤이가 주연한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또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 원작이다.
                                      



1971년 일본 치바 현에서 태어나 도호쿠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이사카 코타로는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넘어, 인간과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해부하고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구조화하는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에 다섯번이나 노미네이트 됐으며, 두터운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인기 최고의 작가로, '러시 라이프', '사신 치바' 등의 유명한 전작이 있고 이 '마왕'이란 소설로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이끌어냈다. 법학도답게 헌법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통찰력에는 깊이가 있고, 유능한 작가답게 어려운 아젠다를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여담이지만, 네이버 작가소개를 보면 센다이시에 거주하며 집필활동 중이라던데, 이번 지진으로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라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아! 쓰다보니 또 서론이 너무 길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 사족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진다.

이제 소설을 제대로 살펴보자. 우선 주인공! 주인공은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로 평범해질 수 없는 형제. 주인공이 둘인 만큼, 이야기도 형 안도의 이야기인 '마왕''호흡'이란 제목의 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나뉜다. 사실 말이 '초'능력이지 사실, 두 형제의 초능력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슈퍼맨 같은 영웅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형 안도는 30보 정도의 거리를 두면 복화술이 가능하고, 동생 준야는 10분의 1 확률이 넘지 않으면 1로 만들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날, 안도는 TV에서 이누카이란 정치인을 보게 된다. 이누카이는 "5년 안에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내 목을 날려도 좋소!"라고 하고 사람들은 그의 묘한 자신감,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안도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지한 안도는 이누카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몇 년 후, 이누카이는 파격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그의 힘도 점점 커져간다. 그야말로 '마왕'이 되가고 있는 것이다.그 즈음, 동생 준야는 자신이 가진 초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마왕'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점령하려는 야욕의 정치가? 초능력자? 아니면 생각을 잃어가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기운일까? 이데올로기, 파시즘, 군중심리 모든 것이 거대한 회오리 속에 엉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사카 코타로는 맺음글에서 "파시즘이나 헌법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들은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품이나 장식품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에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어있다는 착각 속에 여전히 잔존하는, 아니 어쩌면 기생적으로 발전했을지 모르는 파시즘이란 '생명체'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운, 명확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간다면 세상은 바뀐다"란 책 속의 한 마디가 큰 여운을, 익숙하고도 새로운 깨달음을 남긴다. 나서서 행동하지 않더라도, 실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지도 잊지도 말자. 그것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고 민주주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