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만든 '짝' 이라는 프로그램 많이들 보십니까? 저는 그동안 지나가다 잠시 보는 것 말고 제대로 챙겨본 적은 없었는데요, 이번에 한번 찾아 보니 재미있더군요. 기본 포맷은 여러 명의 남녀가 서로를 탐색하고 데이트하고 최종결정을 하는 기본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의 포맷이지만, 일반인들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점, 그냥 짧은 시간동안 설정된 데이트를 한다기보다 시간을 두고 합숙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는 점이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어서 더 몰입하게 되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남자 1호, 여자 1호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 것, '애정촌'이라거나 '짝'이라는 한글 이름을 붙인 것 등도 참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그런 익명성이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을 붙임으로써 좀더 객관적이고 대표성이 있는 느낌을 주어 공감대를 넓히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 우리도 모두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일 뿐이지, 라는 느낌?)
이번에 제가 찾아본 프로그램은 "애정촌 13기. 노총각·노처녀 특집 마지막회"였습니다. 굳이 노총각 노처녀 편을 찾아 본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 함께할 사람을 찾는 과정에 더 오래 있었던 선배들에게서 무언가 느끼고 배울 점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느끼고 배운 점이 있었냐고 물으신다면, 물론 그렇습니다만 오늘 말하고 싶은 주제는 "와 선배들은 역시"라는 느낌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설명해보자면 "와,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은 역시" 라는 느낌의 내용이죠.
뭐냐, 바로 여자 2호님과 관련된 러브라인이었습니다. 여자 2호님은 35살의 고등학교 교사이십니다. 이 분은 처음에 마음에 들어했던 남자 5호와 처음부터 여자 2호분을 마음에 들어했던 남자 7호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서로 호감은 느껴지는데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알기 어려운, 감정적으로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겁니다. 최종선택을 앞두고 서로의 마음을 잘 알기 어려웠던 두 분은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 동영상이 막혔나요? 아.. 이거 영상으로 보셔야 하는데 ㅠ 아쉬운대로 캡쳐로 ㅠ_ㅠ
보면서 저는 정말 오글오글 했습니다. 화끈화끈하기도 했고요. 별로 낯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두 분의 입장을 모두 너무 잘 알 것 같았고, 그래서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은 저 대화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아무래도 대화를 주도해 나가면서 눈물을 보이는 여자 2호님에게 마지막까지 대표님 모드로 부하직원을 대하듯 자기 입장을 정리하신 남자 5호님이 잘못했다고 생각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에는 틀린 게 하나 없지만 그건 자기 입장을 말하는 내용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기 입장만 말해서는 안되는 거였죠.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시지를 않습니다. 물론 믿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5호님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남자 5호님에게 여자 2호님의 행동이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뿐이지 여자 2호님이 원래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네가 한 행동이 아무래도 나에겐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네 말을 믿기가 힘들다" 혹은 "그렇게 행동하면 나한테는 의도가 있는 걸로 보인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동은 누가봐도 의도가 있는거다" 라든지 "넌 그런 의도가 있었다, 그건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너무 복잡하게 따지고 들었나요? 사실 대화라는 것은 파고들면 이렇게 복잡한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밖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그게 자기의 세계 인식이다보니,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는 일이 생깁니다. 사실은 개인의 부분적 인식일 뿐인 내용을 그게 전부인 것처럼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보통 일일히 그걸 구별해서 말하진 않잖아요? 말하자면 표현은 실제만큼 정밀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괴리에서 오는 오해가 여러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서로 잘못 없다고 하는, 사실은 서로 잘못한 싸움들이 벌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자 2호님도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라는 말을 반복하시지만, '나는 그걸 잘 못받아들이겠다'라는 남자 5호님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모습은 화면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은 남자 5호님에게 '나는 당신을 오해하게 만들만한 행동을 안했는데 당신이 오해한거다.'라고 말하는 느낌을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남자 5호님 입장에서 본인은 오해를 했는데(즉, 본인이 봤을 때는 분명 의도가 있어 보였는데), 그 행동은 오해를 하게 만들지 않았다고(의도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할만한 행동이 아니라고) 한다면 답답하시겠지요.
이처럼 무엇보다 두 분의 대화에서 안타까웠던 점은 두 분 다 서로의 마음을 잘 못 읽어준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상대방이 말하고 싶어하는 입장을 받아들여주고 그에 대해 리액션을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이 중요한 것은 인정받지 못할 때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리액션을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결국은 감정에 작용하기 위해서지요.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면 화가 납니다. 그러면 남의 말도 귀에 잘 안들어옵니다. 그러면 서로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만들고 거기서 애초에 논리가 뭐였건 관계는 끝장이 나는 거지요.(보통은 대화가 안되므로 논리도 끝장이 납니다.) 두 분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먼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인정하고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혹은 "오해해서 미안하다"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싶었던 거죠. 사실 서로가 의도한 바와 이해한 바가 달랐다면 그것은 오해이고, 거기에는 양쪽 다 크든 작든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사례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주는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여자 2호님은 상담 교육을 석사 전공하셨고 남자 5호님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분야에서 종사하시며 언변도 좋으신 분입니다. 게다가 두 분 다 살아온 시간이 짧지는 않으시고 그렇다고 특별히 더 배려심이 부족한 모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십니다. 이런 분들도 겪으시는 문제 상황이라면, 말 다했죠.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우리가 특별히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필요하지요. 그러니 못한다고 기죽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1.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고 할 것
2. 상대방의 '일반화'된 말을 표면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여자 2호와 남자 5호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후, 여자 2호는 남자 7호를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얘기를 듣고서 셰프인 남자 7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 7호 "그럼 안 풀었네."
여자 2호 "풀었어요, 우리는 안맞다."
남자 7호 "그게 푼거야? ㅎㅎ"
여자 2호 "서로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참으로, 내 마음을 케어한다는 느낌이 드는 반응 아닙니까?
(아, 개인적으로 남자 7호 이분 참 볼매셨어요.)
역시 관계에서 논리의 옳고 그름은 그 자체로는 개미눈물만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감정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필요할 수는 있겠지요. 인간에게 있어서, 단지 연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사실은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을 더해갑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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