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9. 20:20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스'를 보기 전까진 배트맨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인정할게요. 더군다나 영화판 배트맨 시리즈는 제가 유치원생 꼬꼬마였을 시절에 유치한 설정 탓에 흥행에 한 번 크게 실패하고 더이상 제작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화판 역시 그다지 재미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 번 뿌리내린 선입견은 쉽게 바뀌기 힘든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걸... 4년 전에 갑자기 크리스찬 베일에게 잠깐 빠져 그의 출연작을 훑어보던 저는 (저는 이런 불순한 의도로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라고) 앞에서 말한 '배트맨 비긴스'를 보고 생각을 아주 고쳐먹게 되었어요. 그동안 배트맨을 어린애들 영화로만 생각해 온 제가 바보스럽게 느껴져, 누군가에게 사과라도 하고 싶어졌었죠. 근데 누구한테 사과를 해야하나..







   

-빨리 사과해!
-사..사과하겠습니다!
-필요없어!
-?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저는, 영화의 원작인 만화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연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그 책의 제목이 뭔지, 우리나라에 나와있기는 한건지 알 수 없어 그저 궁금증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작년에 서점에 들러 만화책 코너를 둘러보다 이 책을 발견했지 뭐예요. 수년동안 저를 애타게 했던 그 만화는 바로.. '배트맨 이어 원Batman year one'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명 만화가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와 데이비드 마주켈리david mazzucchelli가 함께 그린
'배트맨: 이어 원'의 표지입니다. 1987년작이구요.
우리나라에는 민음사 산하의 '세미콜론'에서 2008년 말에 같은 제목과 표지로 출간되었습니다.
세미콜론에서 배트맨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속속 나오고 있으니 모아보아도 괜찮을 것 같군요!












 

작가 중 한 명인 프랭크 밀러의 사진입니다.
'300','씬시티','다크나이트 리턴즈' 등으로 유명한 작가죠.
'배트맨: 이어 원'은 1986년부터 시작된 그의 배트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사진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최근에는 영화감독으로도 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피릿spirit'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고 합니다.




 

 

만화는 영화 '배트맨 비긴스'처럼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웨인그룹의 백만장자 아버지 밑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해온 브루스는 부모와 함께 오페라를 보고 오던 길에 총을 든 강도의 손에 부모를 잃습니다. (영화에서는 저택 옆 동굴에서 날아든 박쥐 때문에 공포증이 생긴 어린 브루스가, 부모와 오페레타 '박쥐'를 보다가 두려움에 칭얼거려 함께 극장을 빠져나오다 강도를 만난 것으로 되어있죠.) 그 후 12년간 도시를 떠나 무예를 익히던 브루스가 고담시티로 돌아오면서 만화는 시작되지요.










부모를 잃었을 당시를 회상하는 브루스
브루스는 타락한 고담시티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그토록 두려워 했던 박쥐가 되기로 합니다.  







브루스는 부모가 살해당한 기억 때문인지 자신은 결코 살인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배트맨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더라도 살인만은 피하려고 하죠. 또한 자신을 추적해온 경찰이 고양이를 쏘아 죽이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손봐주는 등, 약간은 소년과 같은 모습도 보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어렸을 적에 자기 탓으로 부모를 잃어버린 충격 때문에 정신적 성장이 소년시절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은 오래 전부터 나왔었죠. 그래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로빈과 친구처럼 활약할 수 있는 것이라구요. 

아무튼 작품 속에서 배트맨은 초반의 어설픈 모습에서 벗어나 점점 더 치밀한 공작을 수행할 내공을 쌓아갑니다. 마침내는 고담시티의 부패한 경찰청장과 마피아 일당을 응징하게 되죠. 하지만 이건 혼자 이루어 낸 건 아닙니다.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정보원으로 그를 돕는 충직한 집사 알프레드, '생계형 히어로' 캣우먼으로 등장한셀리나 카일, 그리고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고든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런 성과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불량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힘겨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배트맨
발에 채이고 텔레비전으로 맞고.. 좀 안쓰럽습니다. 







작품이 영화와 다른 점 중 한 가지는, 영화에선 그 내적 갈등이 삭제되었던 고든 경감의 이야기가 꽤 비중있게 다뤄진다는 점입니다. 영화에서는 고담 시티의 무능한 경찰 시스템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고든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지만, 만화에서는 그의 가정사와 인간적인(?) 갈등 역시 엿볼 수 있습니다. 만화는 브루스의 귀환과 고담 경찰청에 부임한 고든의 모습으로 시작되는데요, 시카고에서 막 고담으로 온 지 몇 시간도 안돼서 고든은 동료 경관의 나사빠진 언행에 질리고 맙니다. 이 멍청이 동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고담 경찰은 사실 그 지역 마피아와 결탁하고 있어 이미 도시 치안을 다스릴 능력을 잃은 유명무실한 집단이에요. 고든은 이런 경찰 시스템을 개혁하고자 고군분투 하지만, 소위 '높으신 분들' 눈에는 이 고지식한 새내기 경관이 맘에 들 리가 없죠. 그래서 고든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담 경찰로부터 갖가지 협박과 린치를 당합니다.

 고든의 사생활 역시 그들에게 고든을 협박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작중에서 고든은 함께 일하던 미모의 여경사에게 잠깐 한 눈을 팔아 적잖이 마음고생을 합니다. 고든에겐 이미 임신한 부인, 바바라가 있거든요. 그런데도 고든은 직장에서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주는 여경사 에센에게 마음을 주고, 또 그것을 윗선에 들키고 말죠. 경찰국 간부들은 이것을 빌미로 고든을 협박하지만, 그가 바바라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음으로써 갈등은 일단락 됩니다. 비록 고든은 아내와 함께 정신과 의사에게서 관계 개선 상담을 받아야 했지만요.   











동료 경관의 음모로 느닷없이 습격을 받은 고든 경감.
그는 나중에 이걸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줍니다. 성깔 있어요, 이 아저씨.










불륜을 저질러 편치않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든. 바바라가 정말정말 너그럽게 봐 준 덕분에 그는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 사람은 아내한테 정말 잘해야 해요.








 이렇듯 고든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서브 플롯으로 자리함으로써 작품은 브루스 웨인의 원맨쑈에 그치지 않고 그 재미를 더합니다. 고든과 배트맨이 알게 모르게 힘을 합쳐 썩은 경찰청장을 응징하고 지역 마피아 두목을 처단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이 고담 시티를 지키는 히어로 콤비같아 흥미진진합니다. 처음에는 고든이 배트맨을 코스튬 입고 설치는 범죄자 정도로 여겨 수사를 시작하지만(이 수사과정에서 그는 에센이 가져다준 정보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물론 브루스가 플레이보이 재벌 2세 코스프레를 해 정체가 탄로 날 위기를 넘기지만요.) 나중에는 그를 동료로 인정합니다. 만화는 청장으로 승진한 고든이 배트맨을 기다리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 여기서 조커의 등장이 암시됩니다. 이건 영화에서도 그렇죠. 







 


여유로운 담배 한 모금.
고든은 승진도 하고 마피아도 때려잡고 가정도 지켰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배트맨:이어 원'이지만, 어쩐지 배트맨보단 고든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요. 사실상 이 이야기는 고담시티에서 새로이 등장한 두 영웅의 눈물겨운 생존기가 서로 얽힌 구조를 갖고 있어요. 배트맨뿐만 아니라 고든 역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거죠. 프랭크 밀러와 데이비드 마주켈리는 길지 않은 분량 속에 그들의 성격, 과거, 몇몇 어설픈 면모들을 잘 나타내, 고담시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황당무계한 가면 히어로 얘기의 배경이 아닌, 정말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구린내나는 도시의 모습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물론 배트맨의 탄생 계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 것도 큰 장점이고, 한국어 번역이 비교적 매끄러운 것도 작품의 재미를 떨어뜨리지 않은 요인이 됩니다.(브이 포 벤데타는.. 안그래도 어려운 글을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게 해놓아서 거슬리는 부분이 좀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큰 장점은 커버 디자인이 멋져서 책장에 꽂아놓으면 간지..가 납니다.ㅋㅋ 길지 않은 이야기니 일독을 권합니다! 
고든과 배트맨의 다정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포스팅을 마칠까 합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을 통해 또 만나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