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앞두고 학교가 자습 체제로 들어선 덕에 수업도 절반으로 줄었고, 학교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몸은 훨씬 더 피로합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있어서 그럴까요. 요즘 매일 생활기록부와 에듀팟을 보고 살았더니 이젠 글자만 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 인터넷 창을 띄우고 이것저것을 뒤적이다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성교제 하다가 걸리면 퇴학'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한 시민단체에서 전국 주요 지역에 있는 354개의 공학고등학교를 조사해보니, 81%에 달하는 286개 학교가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교칙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는 이성교제로 세 번 적발될 경우에는 퇴학을 당한다는 규정이 있어 최근 남학생은 전학을 하고 여학생은 자퇴를 한 데에서 발단된 기사였습니다.
사회가 워낙에 많은 19금을 강요해서 그럴까요. 청소년들의 연애를 금기시하는 문화는 어디에서부터 나온 지 궁금합니다.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이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는 것이라면, 16세에 잠자리를 같이 한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랑이라 부르는 그분들의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요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여소(여자소개)'를 통해 이성친구를 만나고, 금세 쌍무적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같은 재단 산하에 있는 운동장 건너편 **여고에 가장 많은 여친님들이 계신 것 같고, **실고에도 꽤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여고과 **여고에도 상당수의 형수님과 제수씨들이 있는 듯합니다. 아, 공학인 **사대부고는 자급자족이 가능한지 우리 학교 아이들과는 별다른 계약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하네요.
거리에서 종종 청소년 커플을 만납니다. 교복을 입고 손을 잡은 채 그들은 친구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을 마주쳐도 손을 놓지 않고, 더 밝게 방긋 웃으며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제 여자친구예요. 예쁘죠?
그래 안녕 ^^ (마..망할 것들)
저는 청소년 때 이성교제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커플들을 만나면 부러운 생각부터 듭니다. 중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찌질이’였던 탓에 연락하는 여학생이 딱히 없었고, 그 후에는 남고를 다녔기에 주위에 이성이 없었습니다. 물론 여고의 축제에 가본 적도 있고, 학원에서 여학생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청소년들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생소한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 커플들을 만나면서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제게 그런 경험이 없었고, 또 지금 솔로여서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순수하고, 맑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차서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갈수록 계산은 늘어가기 마련입니다. 고등학생 때는 교복 색깔이 이성친구를 만나는 데 큰 장애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학생만 되어도 학교를 따지고, 사회인이 되면 직장을 따지고, 연봉을 따지고, 집안을 따지게 됩니다. 사랑은 증발하고 온갖 계산만 남는 무미건조한 관계가 됩니다. 이 사람을 가장 사랑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기에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적령기에 이 사람이 내 옆에 있고 나랑 조건이 맞으니 상호 필요에 의해 결혼하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결혼을 하는 것이 2011년의 결혼문화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청소년들의 사랑은 얼마나 순수한가요. 그들은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온전히 빠져들어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보다 맑고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요. 오히려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근데 어른들은 왜 청소년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이것은 일선 학교에 만연한 엄격한 두발규제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저희 **고등학교는 학생인권에 있어서 굉장히 민주적인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두발이나 복장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허용하는 학교는 전국에도 몇 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학생부 선생님들과 학생회 지도부가 아침마다 교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학생회 지도부 네 명이 짜고 있는 박스 안을 통과해야 했으며, 복장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명찰이나 뱃지가 없거나,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어 손가락 위로 삐져나오는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삭발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에 학생부장이셨던 선생님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학생들은 머리가 길면 딴 생각을 해요.
근데 머리가 짧아도 딴 생각은 언제나 듭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청소년의 사랑이 학생의 본분을 벗어나는 행동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청소년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기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청소년기의 공부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인식, 즉 학력과 학벌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들어가면 세상은 전쟁터이고, 다른 모두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하나로 세상을 고착시키고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비루하고 단촐한 사고인가요.
대학 교직과정에서 배웠던 교육과정의 종류 중에는 잠재적 교육과정(latent curriculum)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육기관에서 교육 대상자에게 의도적이고 공식적으로 전달하려는 공식적 교육과정과는 달리, 잠재적 교육과정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상자들이 습득하게 되는 교육과정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선생님의 체벌을 통해 배우는 폭력 같은 것을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식적 교육과정 못지않게, 혹은 더욱 교육의 대상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이 잠재적 교육과정입니다. 지금의 제게 고등학교 때 분명히 배웠던 수열이나 극한에 대한 수학 문제를 가져온다면 전혀 풀 수가 없지만, 당시 선생님들의 모범적인, 혹은 실망스러운 행동들에 대해서는 줄줄이 읊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사랑은 그들에게 강하게 작용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할 때보다 삶의 동기가, 생의 에너지가 충만한 때가 있는 지를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하며,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떨리는 학생은 수업시간에 잠시 딴 생각은 할지언정 꾸벅꾸벅 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의 에너지가 공부에 이어진다면 꼰대들이 보기에도 그것보다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남녀 간의 거리' 등을 설정한 교칙을 만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칙을 만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청소년이 '학생'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 특유의 사회적 요소들을 이유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영달을 위한, 망할 성과주의도 빼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세상을 설명하려는 오류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랑은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 통제권한이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통제해야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통제권한 밖에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육자'라면 어떻게 청소년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를 통제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어른들보단 낫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