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4. 08:30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을 얼마나, 혹은 단 한명이라도 가지고 계시나요? 자신의 보여준다는 것은 연애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오늘은 참고가 될 만한 사회심리학 연구를 짤막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야 연애가 깊어진다

 연애 단계를 다룬 연구 중에는 루이스(R. A. Lewis)의 6단계가 있습니다. 이는 첫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6단계로 나눈 것인데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으며 도움될 만한 것은 무엇인지 한번 살펴 보려 합니다.

1단계는 유사성의 인지 입니다. 이는 가치관, 지위, 흥미, 관심 등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심, 흥미, 의견이며 이 단계에서 사람들이 본래 성격을 드러내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이때 성격은 그리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단계는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가 이루어집니다. '자기 제시'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나 물질적인 보수 등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는 행위다. 사람들은 대게 거짓된 자기를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감추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조정합니다. 즉 이 단계에서는 굳이 자신의 본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바람직한 성격을 가졌으리라 생각하며 상대의 언행에서 진짜 성격을 짐작하는 데 그치게 됩니다.

2단계는 좋은 관계의 구축입니다. 1단계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두 사람이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요, 보통 첫 만남이 있는 후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을 상대가 허락하는 순간부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시작되지만 아직 헌신하는 사이는 아닌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단계는 자기 개시의 단계입니다. 2단계의 만남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개시(self-disclosure)'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보통 자신에 관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자기 개시'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 제시처럼 인상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상대방과 좀 더 친밀한 관계로 진전시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열고 보여준다는 뜻이지요.

친밀한 관계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개시가 필요합니다. 자기개시가 없으면 형식적인 관계에서 발전하기 힘듭니다. 연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정색을 하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가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혹은 행동으로 은근슬쩍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의할 점은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처음부터 모두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개시란 교제가 어느 정도 진전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4단계는 역할취득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맡은 역할에 충실해지다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는 두 사람 사이에 전혀 유사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끼리는 서로 유사성을 인지 한 후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기서 역할 분담을 잘못하면 결혼 후 괴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결혼 전에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는 말은 이 단계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5단계는 역할 적합 입니다. 두 사람간에 암묵적으로 역할 분담이 결정되면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는 군요. 분담된 역할에 대해 서로 동의하면 연애는 다음 단계로 진전됩니다.

6단계는 결정 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하나의 단위로 행동하는 단계에 이르러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결혼하게 되는 거죠. 물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군요.


reference. (일전에도 본 일 있는) 이철우 <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루이스의 연애 6단계에 따르면 '형식적인' 관계와 '깊은' 관계를 가르는 경계가 바로 '자기 개시'의 유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이 내용에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3단계의 요지는 평소 저의 생각과 비슷한 것 같았어요. 제가 초창기 포스팅에서 '연애'가 좋은 이유는 '진짜 나'가 드러나서 자기를 인식하고 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린 적 있죠? 사회심리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연애는 '자기 개시'가 이루어져서 자기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좋은 것만을 보여주어 즐겁기만 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고 진한'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 역시 '자기 개시'를 통해 어느 정도 진전된 단계에 이른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 ㅎㅎ 

 '친밀한 관계' 중 특수한 형태인 것이 연애가 아닐까 합니다. 이 말인즉, 연애관계에 해당되는 어떤 원칙들은 다른 친밀한 관계에도 공유,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 개시' 역시 그런 개념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우정 관계의 깊이도 자기개시의 유무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거든요.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추가적인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의문은 이 원칙이 반드시 유효할까? 라는 것입니다.
 자기 개시 없이도 깊은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만약 누구에게도 자기 개시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자기 개시가 너무나 괴로운 일인 사람이라면 어떨까?
 만약 자기 개시 없이도 깊은 관계가 성립한다면, 그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나요?



 추가적인 의문이 남아있지만, 우선은 Happy Valentine입니다. :D
 오늘 하루 설레는 계획 있으신가요?
 혼자이든 함께이든 오늘 하루는 우리 두근두근한 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2. 7. 08:30

 저는 결혼식에 가는 게 좋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양한 것이 결혼식마다 드러나는 것도, 특히 - 그 부부와 집안이 어떤 가치관을 추구하느냐가 드러나는 - 주례사를 듣는 것도 좋습니다. 결혼식마다 주례사에 들어가는 내용이 생각보다 천차만별인 점이 아주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어디를 가든 공통적인 얘기는 상대방의 결점을 감싸라는 얘기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지난 여러 연애들이 결점을 감싸지 못해 헤어졌습니다. 그러니 백년해로하기 바라는 부부에게 마땅히 옳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애에도 어느 정도의 경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해야 할 과제를 마친 것처럼 든든하고 기쁘지만. 그야말로 이제 '어느 정도'의 경험은 겪었다할만한 상황이 오면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부터도 이별을 계속 겪는 것이, 맞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인지 아니면 내 그릇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인 건지 혹은 둘 다인건지.

 어느 쪽이든 오늘은 무척 기분이 묘하였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으니 아마 이 결혼식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새삼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고 그 생소하고 낯선 느낌이 어렴풋이 낯익었습니다.


 그리고 외로웠습니다. 

 

 지금 혼자인 이 시간 때문이 아니라,
 혹시 영영 당신을 만나지 못할까봐 무척.


 아마 우리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마음은 더욱 쉽게 우리 가까이 찾아올테죠.



 그러나 조금 침착해져봅니다.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자신의 상황에서 사람을 만날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면, ‘만나는 일’이 생기기 위해 그 이상 무엇을 더 노력할 수 있는 걸까요? 노력해볼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사실 그건 노력에 비례해서 반드시 성과가 나오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더 늘려보고, 내가 원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주로 더 찾아보는 것 등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the one을 만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조바심을 낸다한들 "만나기 위해"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인사대천명. 다만 결국 내가 원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함께 만들어 갈 서로를 찾고 싶은 거라면, 지금은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빨리 만들어 가는 것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마침내 너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그 때엔 부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만나기까지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더라도, 
내 소울 메이트.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이 식장 여기저기의 꽃들을 조금씩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혼식의 꽃은 그렇게 나누어 가져가서 행운을 얻어가는 거라네요.




  결혼식장에서 가져온 바로 그 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일생의 메이트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가기를 기원합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s : 우리 블로그에 알찬 답글을 달아주셨던 직업현자님이 일생의 메이트를 만나 3월 3일에 백년가약을 맺으신대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 
        우리 모두 함께 축하하고 그 기운 좀 나눠받아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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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24. 08:30


1.

 빼도박도 못하게 이제 신년이군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시나요?





2.

일요일 포스팅을 담당하시는 스릉님이 번호매겨 포스팅하신 포맷이 무척 좋아서 저도 따라해보아요.

저는 원래 요 포맷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기쓸 때 이렇게 번호매기는 포맷을 자주 쓰는데요, 그래선지 저번 일요일 포스팅은 이전의 포스팅보다 좀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전의 포스팅이 제복입은 느낌이었다면 이번 포스팅은 캐쥬얼해서 더 진솔한 느낌이랄까? 어떤 게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어요. 특히 저는 제복입은 사람을 좋아...

이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도 좀 더 친근한 느낌 받으신다면 좋겠네요ㅎㅎ


3.

저는 제사 음식을 무척 좋아하는데

올해는 너무 간이 짜서 슬펐어요 T-T ...

그래도 약과랑 한과랑 곶감 등은 잔뜩 챙겼어요  호호.


4.

명절이란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례 가족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지만서도 
올해는 이런 생각 해봅니다.

모두 성인이고 모두 싱글일 때 친구들끼리 한 집에 모이는 겁니다. 잘 아는 사람 몇이 주축은 되겠지만 각자의 지인이나 손님들도 함께 모여서 잘 모르는 사람끼리도 모여보는거죠.
그리고는 전도 부치고 송편도 빚고 제사 음식 만들어서 제사도 지내보고
각자 한 해의 운을 빌면서
끝나고는 제사 음식 나눠먹으면서 정치얘기든 일상 얘기든, 혹은 화투를 치든 술을 마시든, 명절 특선 TV를 같이 보든 뭣하면 윷놀이를 하든지 뭐든지 간에

고렇게 모여 놀아도 재밌겠다.


4.

하긴 그러면 일가친척들은 또 언제 만납니까.


5.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바꿀 수 없는 본질적인 나, 내가 사랑하는 나 자신을 타인들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 부분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다수의 타인으로 하여금 당신이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6.


새해에는 <여러분>의 필진들이 한번 모여보려고 요래조래 시도를 해보고 있는데요
전 필진 현 필진 관계없이 한번이라도 흔적을 남겨주셨던 분들과 모이려는 건데,

과연 만날 수 있을지? 

해를 거듭할 수록, 모임의 인원이 많을 수록, 만나기는 어려워지지만
어려운 만남 하게 된다면 후기 올릴께요 :D


7.


올해도 우리 힘 내보아요.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7. 08:30

 여러분 혹시 영화 <러브레터>(1995)를 기억하십니까?

 질문을 던질 때만 해도, '기억 못하실리가!' 라는 생각으로 한 말인데 벌써 17년 전 영화군요? 모르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기억하는 분이 틀림없이 더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혹 영
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 영화의 '오겡끼데스까'의 장면만은 알고 계실 거에요. 그 장면은 영화보더 더 유명하고 인기를 끈 장면이면서, 영화 내에서는 한 명의 히로인인 히로코의 감정 클라이막스 장면이기도 한 중요한 씬입니다만,  사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연정'의 주인공은 또 다른 히로인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아닌가 합니다. 


                                                             봐요, 히로코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서 보여주는 "매우 뜸들이는 연정"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지막 씬에 도달하기 전까지 여자 이츠키 그녀는 남자 이츠키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알지 못합니다. 주변의 추궁에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일관하죠. 중학생 때 반 아이들의 짖궂은 놀림에 그녀가 울자 그가 클라스메이트를 때렸을 때부터 우리는 다 알겠든데... 

 그렇지만 그녀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감정을 그녀보단 분명히 알고는 있었던 그도 도대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요즘의 우리들이라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어!'라고 말할만한 행동들 뿐이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새학기 첫날,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성과 이름이 같은 두 어린 남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쉽게 잊을 수는 없죠. 이때부터 필연적으로 둘은 서로를 의식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쓰기 때문에 혈연이 아닌 남녀가 이름이 같다면 놀림당하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저 때는 가장 철없다는 중학생 시절 아니겠습니까?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두 남녀는 결국 아이들의 장난으로 도서위원일을 함께 맡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거의 일을 하지 않기 일쑤. 그리고 이상한 장난을 치곤 합니다.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히로코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건 우리도 미처 몰랐겠다! 싶은 강도의 어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가 그녀를 충분히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였을까요? 놀랍게도 아닙니다. 왜냐면 그녀와 닮은 히로코를 본 순간, 여자에게 쑥맥인 그가 첫눈에 반했다,며 고백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는 환상이 가진 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진실하고 강력한 감정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거죠.

 그러나 계속 그 정도 범위에서 그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에게 약간은 심술을 부리지만, 뭘 더 어쩌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신경을 쓰고 있을 뿐, 뭔가 잘해준다거나 사귀자고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죠. 감정이 표현될 때 해소되는 것이라면, 이 감정은 끝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연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그가 그녀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자, 그는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전하지만, 그녀는 그게 러브레터인지 알지 못한 채 또 수 년이 흐르고 맙니다. 그 러브레터란 것도 걸작인 것이 그녀의 이름을 적은 독서카드 뒤에 그린 그녀의 초상화이거든요. 우회와 지연을 더하고 더한 엄청난 지연이죠.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뜸을 들인 그 마음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수신인에게 도착합니다. 온 러닝타임동안,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이후부터 그는 죽고 그녀만 남아 살아가고 있을 때까지의 시간 동안, 뜸들이며 무르익은 그 감정은, 어린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척이나 큰 감흥으로 터지게 됩니다.

 만약 그 마음이 더 일찍 그녀에게 전해졌다면? 
 그녀가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발견을 했거나, 혹은 아예 그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고백했다면?
 과연 영화는 지금 같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그 "뜸들임"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그 영화가 담고 있는 그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무척 매료되면서도 꽤나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만으로 족했던, 뭔가를 더 바라지도 않거나, 감히 바라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만 담아둔 마음을 오래오래 유지했던 '순정어린' 때는 언제가 마지막이였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만약 이게 현재의 우리들에게 들려진 얘기라면  아마 그가 친구를 때린 그 포인트에서 이미 '요거는 사랑이구만'이라며 잽싸게 그 포인트를 찍어내서 그 감정들을 모두 해부해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너 나 좋아하니?'라고 도발적으로 말한다던가, 키스부터 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는 나랑 사귀자, 느니 하면서 말이죠. 

 우리가 더 이상 그런 순정어린 사랑을 하지 않게 된 건 우리가 더 이상 중학생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17년 전과 지금의 사회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라진 탓이 있지 않을까요? 빨리 빨리, 어서 결론을 내자, 라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혹은 이제는 무언가를 진득하니 안고 가기보다는 욕망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어 빨리빨리 해소해 버려야 하는 문화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뭔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해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원인을 찾자면 이것저것이 될 수 있겠지만 요는 문화 자체가 즉각적이고 빠른 방향으로 변화했고 연애 문화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중학생도 저런 순정어린 사랑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 변화를 두고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순정어린 사랑이 반드시 더 좋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조건 회귀하자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생각일 수 있죠.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야하는 합당하고 현명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천천히, 은은히, 뜸들이는' 사랑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위상 혹은 유의미한 지점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소개팅이나 선처럼 애초에 어떤 목적을 가진(조건이 맞으면 함께 한다는 식의) 만남을 주로 하고 있는 요즈음이라 그런지, 조금은 저 순수한 사랑이 그립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족했던, 오래오래 그 감정을 가슴 속에서 숙성시켰던 그런 때가. 그래서 쉽게 변하지 않았던 마음이라는 것이. 사랑이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연모의 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감정도 비교적 빨리 타오르고 빨리 식는 지금의 문화에서
오랜 시간 뜸을 들였을 때 감정이 더 깊어진다는 것은 예전의 사랑이 주는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진득하게 사랑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은 욕망을 절제해 가면서 말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S.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7. 08:30

 


 



 언젠가 '문과 여자와 공대 남자가 어울리는 이유'라는 포스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어요. 어린 나이에는 내가 아는 세계를 나보다 잘 아는 '문과' 오빠들에게 끌리지만 내가 머리가 크고 눈이 넓어지게 되면 그 '오빠'의 한계가 언젠가는 드러나버리고 그러면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대남자는? 내가 영원히 잘 모를 세계이므로 그가 어려운 공식과 원리를 설명하면 "어머 오빠 대단해"를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쉽게 그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게되고(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많은 트러블이 없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문과 여자'의 심리에 무척 공감했습니다. 사실 많은 여자들이 배우자의 조건으로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꼽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 반드시 많이 아는 것만 존경할 부분이 되는 건 아니지만 - "잘 아는 남자"에게 가지는 호감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저 포스팅을 접했을 때는 특히 "문과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갈증같은 것이 무척 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뜨끔했어요. 그럴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문과 남자를 만나려고 하는 생각이 틀린 걸까?

 그에 대한 답과는 별개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의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닮은 사람이 좋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좋을까?

 서로 다른 사람이 끌린다는 말도 있고, 공통점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다기보다는 둘 다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끌릴 수 있죠. 그 다른 점/닮은 점이 끌림의 이유일 수도 있고, 또 그와는 상관 없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우선, 여기서 닮은 것과 다른 것은 소소한 부분보다는 큰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을까, 아니면 문과 여자와 이과 남자처럼 "그 세계를 모르지만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제목 보셨겠지요?


 이것은 질문입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3. 08:30
 
 여러분 안녕하세요? 토끼고양이입니다. 신년 첫 포스팅에서 인사드려요. 올해는 싱글인 여러분 모두 좋은 인연 만나서 진하고 아름다운 연애 하시길 기원하고 커플인 분들은 지금 그 사랑 더욱더 열정적으로 깊어지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면서, 이것저것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실 것 같아요. 게다가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면서, 점점 연애에 대해서 주저하게 되는 부분들도 많아지실 것 같아요.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따지게 되는 것도 많아지고요? 

 그러면서 우리는 연애라는 것이 가지는 가장 순수한 본질에 대해 잊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본질만으로는 현실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따질 것은 따져야 합니다만, 그래도 본질이 전도된다면 그것은 이미 연애가 아닐 수도 있겠지요. 슬슬 현실적인 부분도 생각해야 하는 때이기는 하나, 신년을 맞이하여 오늘은 본질에 한번 집중해 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연애의 순수한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일단은 분명 진한 연애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일 텐데요. 그런
 연애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역시 이 시를 빼 놓을수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고, "진짜 연애"를 욕심내게 만드는, 문정희 시인의 <딸아 연애를 해라>를 소개합니다.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있던 신사임당의 우아한 그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길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서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길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 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어우.. 옮기고 나니 시가 쏟아내는 에너지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입니다. 군데군데는 너무 열정적이라서 어우 이건 too much하진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간혹 있네요 ㅎㅎ 신사임당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표현에 집착하기 보다는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이 시의 액면 그대로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어른의 전 존재"로 한다는 "야성의 생명성"을 가진 "연애"에요. 그 부분은 이 시가 비록 "딸"에게 말하는 내용이나 "아들"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의 내용만으로도 이미 야성의 생명성을 가진 듯한 느낌이 참으로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애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주체로 온전히 살아가기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다간 사람도, 살다 갈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마 인간은 절반 (혹은 그 이상을) 현실에 담그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야성의 생명성"이란 영적 체험에 가까운 경험인가 싶기도 하고요.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네요. 그런 성숙한 연애라면 분명, 일생의 사랑이 될 것 같기는 하다만, 과연 현재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만큼 어른이기는 할까요?

@_@ 어질어질.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안에 연애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는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은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겠죠. 저 경지에 비록 이르지 못했더라도, 혹은 영영 못하더라도 다만 배우면 좋을 것은 저 주체적인 에너지가 아닐까요? 비록 온전하지 않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주체적이고 용감하게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다시 한번 바라겠습니다.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7. 13:08

 

 

 요즘 나라 일에 워낙 굵직한 사건들이 많죠.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덜 핫한 이슈가 되었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 역시 한 주 전만 해도 꽤나 논란 속에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조례안이 상정되면서부터 그 내용과 통과여부를 놓고 지지층과 반지지층의 설전이 눈에 띄었는데요, 사실 상대적으로 덜하다 뿐이지 사안 자체에서는 이 조례안이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이후에 논란이 더욱 커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회의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서 재심의도 거론되고... 재심의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지지층과 반지지층의 시위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군요.

 

 힘겹게 통과하고도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조례안의 주요 내용을 여러분도 많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논란이 되는 주요 내용은 동성애와 임신·출산에 따른 차별 금지, 교내 집회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보장 등의 내용입니다. 이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부분은 역시 동성애와 임신 출산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인 것 같습니다. 이 조례안이 동성애나 임신 출산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으음. 그 논리구조도 모르겠는 바는 아닙니다. 어떤 상황을 터부시하지 않고 그것도 가능한 상황이며 다른 상황과 똑같이 대우받는 상황이라고 여긴다면 그 상황에 거부감이 없으니까 그걸 멀리하려하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입장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벌로(차별로) 겁을 주면 그 내용을 피하려고 하는 효과는 분명 있겠지만 그건 너무 해당사항이 없는 다수의 입장만 고려하는 내용이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 무섭기까지 해요. 임신 출산을 하거나 동성애 성향을 가지지 않은(혹은 가졌다고 티내지 않는) 다수 학생들이 그런 내용에 해당되지 않기 위해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소수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게 말입니다. 혹은 차별받는 소수 학생이 다수의 해당 내용으로 돌아서게 만드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대되는 효과라는 게 참 애매합니다. 이미 임신 출산한 학생이 그런 일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동성애 성향을 지닌 학생이 자기 성적 성향을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요? 제가 동성애 성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후자의 질문은 정말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반드시 이성애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그게 살아가기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위험이 없으니까, 혹은 소수자가 아니니까 더 편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근본적으로 피하고 터부시해야할 이유는 뭘까요? 솔직히 말하면 저에겐 그 조례안의 내용이 좀 새삼스럽기까지 했어요. 읭? 그럼 여태까진 차별해도 되는 거였어? 라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그리고 특히나 동성애 차별금지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얘기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반감을 사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저에게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의견이 있는 분은 저에게 귀띔 좀 해주세요. 그런데 제가 체감하고 있는 옳고 그름과는 달리 막상 생각을 시작하니 이 판단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더군요. 애초에 동성애라는 개념에 대해서 차별금지 찬성입장과 반대입장의 전제나 정의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차별금지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도 그 내용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파고들수록 혼란스러워져서 그 부분은 좀 더 생각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제가 차별금지를 지지하는 동성애란 같은 성을 사랑하는 성적 지향을 말합니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적 성향의 한 종류이고, 어떤 성을 대상으로 하느냐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개념이에요. 대상으로 하는 성이 다른 것은 저에게 별다른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하고 각자를 성장시키는 동성연애가 있다면 저는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고 좋아할 거에요. 하지만 무분별한 성관계나 도구적인 관계가 성행하는 동성연애가 있다면, 그런 이성연애와 마찬가지로 싫어할 거에요. 그렇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지 말고 차별해야 한다면 그것에는 쉽게 찬성할 수 없어요. 물론 싫어하는 연애가 한 쪽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일어났다든지 속아서 일어났다든지 피해가 너무 강력하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제제와 처벌을 도입하는 데 찬성할 수 있지만, (결국 어디까지를 한 주체의 자유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일까요?) 그래도 인권을 보장하지 말자는 부분은 매우 조심스러울 것 같습니다. 사형수에게도 인권이 있잖아요.

 

 어쨌든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평소 동성애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얼마나 성행했었나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에서 혹시 동성애자에요? 라고 묻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나는 이성을 엄청 좋아합니다. 라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진짜로 성적 성향을 궁금해 하는 질문이라기 보단 “에이, 아니죠?”라며 웃어넘길 준비를 하고 있는 질문 같달까요. ‘오해’자체가 웃음의 포인트가 아니냐는 생각도 하실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오해가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오해하거나 하는 장면이 등장해서 거기서도 사람들이 웃게 된다면 그건 웃음 포인트가 오해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언제나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경우만이 웃음거리가 된다면, 동성애 자체가 웃음거리인 양 여겨질 수 있으니까요. 문제가 이런 차별이 너무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모른다잖아요. 저도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잡이들이 불편함을 토로하는 말을 들을 때 ‘어머 그렇게까지 불편할 게 있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그저 왼손잡이도 이러할진데 비유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동성연애자는 얼마나 불편함을 느낄까 싶습니다. 사실 나영이부터도-최대한 그런 편견을 배제하려 노력은 했지만-이성애의 연애를 중심으로 해서 쓰이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혹시 그로인해 마음 상하게 만들 만한 글은 없었나? 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지지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건, 인간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지지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상대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랑을 지지합니다. 이 논란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포함하여 계속되었다는 점이 또 조금 슬펐어요.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이라는 말은 크리스마스의 모토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여튼 저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지지합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래보아요. 이제 새해에 인사드리겠군요. 여러분 모두 연말 마무리 잘 하시길. Happy New Year!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0. 08:30


 지난 포스팅에서 개인적으로 이별이 아픈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말해보았습니다. 그 네 가지란,

하나는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과 쌓은 우정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이별의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지난 사랑의 시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이었어요.

(지난 포스팅이 보고 싶으시면 여기 →http://libertyanddiversity.tistory.com/entry/20-이별이-힘든-네-가지-이유-1부 )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슬프지만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견딜만한 일이었는데요.

 좀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혼자서 회복해야만 하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먼저 네 번째의 이유는 연애가 끝나면서 받은 상처가 자신이 가치 없기 때문에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된 경우를 말하는 건데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라는 생각이 들면 자연히 ‘내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세상 일은 그럴 만 하니까 그렇게 일어난다는 생각이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하기 쉬운 오해로, 내가 가치가 없어서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일이 일어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패턴의 행동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유도했을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반응을 하기 쉽게 내가 상대에게
잘못 행동한 것뿐이지 자신이 가치가 없어서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행동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상황이 극단적일수록 겪기 쉬운 아픔인 것 같습니다. 가령 모르고 한동안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양다리 중 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결혼은 나 말고 다른 쪽 사람과 하더라는 사례가 있다고 해 보아요. (일전에 소개해드린 블로그에서만 보아도 의외로 많더라구요) 그러면 충격과 공포 속에서 ‘나는 선택할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우선 들 것이고, 사귀는 내내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던 건, 내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뤄져도 좋은 사람이라서 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거기다가 결혼한 후에도 ‘그냥 만나자’며 전화가 온다면?? ‘나는 가볍게 그냥 만나도 되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사실 잘못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가해자의 잘못이 무척 큰 건데도, 상황에서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참 억울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그런 행동들을 계속 받아주거나 했다면 나를 함부로 대하도록 허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내가 잘못 행동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앞서 말했듯 잘못 행동한 거지 내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없는 것처럼 행동한 걸 수는 있지만요.

 

 혹은 이 정도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상처는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했는데 결국 잘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랑했는데도 결국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게 못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게 되겠지요. 거기에는 분명 원인이 있겠으나, 그 원인이 전부 자신 의 잘못인 것은 아닙니다. 혹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해도 그게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근거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생각이 오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요.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이 부분도 친한 친구들이 조금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들이 특히 잘하는 것인데요,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할 때 네가 아까웠네, 넌 아주 매력 있는 여자네, 그 남자는 너를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네, 세상의 반은 남자네 등등의 위로를 퍼부어주는 것이죠. 그렇다고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 아니지만 이때는 좀 더 과장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 때 중요한 건 사실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거든요. (사실 인식은 나중에 친구 마음이 회복되고 난 다음에 해도 되니까요.) 그러면 친구들의 말이 혹 과장되거나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도 그것을 과장하고 거짓말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자존감을 되찾게 됩니다. 아, 이렇게까지 해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구나. 이런 거죠.
(근데 재밌는 건 남자들은 영 다르더군요? 물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요... 여자들은 칭찬을 해주는데 남자들은 욕을 하더라구요. 병신 니가 그렇지. 꼴 좋다. 마시고 죽어. 뭐 이런? 그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혹시 그래서 남자들은 실연의 상처를 잘 회복 못하는 겁니까??)

 

 부가적인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네 번째 이유도, 그것은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혼자서 생각하기 어려우면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나니까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이별이 아픈 세 번째 이유는 지난 사랑의 시간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연애를 했지만 상대가 나를 과연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사랑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 혹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오글거리며 표현해보자면 “정말 날 사랑하긴 했니?”의 아픔이랄까요?

 

 이런 아픔은 이별의 과정에서 지난 시간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 만한 일이 있었을때나(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폭언을 한다든가 무성의해지는 등 갑자기 바뀐 언행이나 태도로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알고 보니 그 동안 나를 속인 점이 있다 등), 혹은 연애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서 충분히 애정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경우 등에서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혹은 마지막까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느끼는 아픔 입니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게 괴로운 이유는 함께 했던 시간을 통째로 부정당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변해버렸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이 되어 버리는 거지요. 이 와중에 네 번째 이유인 자존감에 상처입는 아픔이 섞여 들어가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네 번째 이유에서 들었던 양다리의 사례는 세 번째 이유를 겪게 되는 상황도 될 수 있겠습니다. 혹은 상대방이 이별을 막으려는 노력에 너무 소극적이라던가 하는 경우에도 이런 아픔을 가지게 될 수 있고요. 하지만 사례를 얘기하면서도 같은 경우라도 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아픔을 느끼기 쉬울 테니까요.

 

  그래서 이게 여러분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아픔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괴로움이었습니다. 차라리 사랑이 끝났다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행복하다는 느낌을 끝내 받지 못하거나 행복하다고 믿었던 기억이 통째로 속은 기억으로 바뀌어버린 채 관계가 끝나는 것은, 그것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에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그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헤어진 후 그를 믿을 수 있게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보통은 각자의 아픔 때문에 더 이상 교류가 없기 마련이라서요.

 

 그래서 이별 후에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오직 자신만의 일이 되는 것이라 그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혼자 내 마음과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헤어진 후 너를 정말 사랑했노라는 고백도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사람의 마음보다 믿기 어려운 걸 보면 이 아픔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납득할 때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으로, 그렇기에 아무 도움 없이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 아픔일 수도 있다고요. 그 기억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밖에 없다면 그 순간에는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었다고 믿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것이 다소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다시 관계를 시작하려는 게 아닌 한 그 사실을 오해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좀 무뎌져서 그런지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니면 또 어떤가 라는 생각도 시간을 좀 가지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마음은 좀 아프지만,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앞으로 더 이상 볼일이 없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는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과 우정을 쌓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놓고 보니 좋은 이별이란 사랑이 다 할 때까지 사랑하고, 헤어진 후에도 우정을 유지하려고 시도해 보며, 비록 헤어졌지만 나도 상대방도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지난 시간동안은 분명 사랑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연애의 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난 이별은 이 조건에 상당히 많이 부합하는 이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에서의 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끝까지 함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하지만 워낙 서로를 마음 아프게 하거나 잘못한 일이 별로 없었던 사이였던 데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었던 사이어서, 혹시 그 차이가 좁혀지지는 않을까 하고 꽤 시간을 가지고 노력해보았지만 그러는 중에 사랑의 감정이 다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은 더는 노력할 여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때에는 최대한 상대방이 자존감에 상처받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며 이별의 말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아까웠거든요. 그 사람 역시 다시는 저 만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었지요.

 

 이별 후 결국 친구로 남았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셨기에 오래 우정을 쌓을 시간은 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귀기 전에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 해 주었고 결국 사귀게 되었을 때는 제가 진심으로 잘됐다고 축하해주었어요. 그 분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 분이고, 저도 그분의 여자 친구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축하 이후로 서로 굳이 연락은 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짧은 와중에도 충분히 우정을 느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이분과의 이별에서 아픔이 적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거나 배려하기가 더 힘들어지니까요.

 

 너무 아픈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노랫말은 그래서인가 봅니다. 그래서 공지영 작가는 딸에게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하라고 했는가보아요.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는 연애를 하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연애는 언제 다시 하게 될까요? ...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3. 08:30

 여러분은 첫 break-up의 감정을 기억하십니까? 반드시 그게 처음 해본 연애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처음으로 온 마음을 쏟아 형성했던 관계가 깨졌을 때, 그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깨진 것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막막함이 더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가장 힘든 이별은 첫 이별인 것 같아요.

 그런데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 보고 난 후, 모든 이별이 다 똑같이 아픈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이별은 잘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그러면 연애를 거듭할수록 점점 아픈 게 덜해지느냐 하면 또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고요. 그러다보니 이별 후 슬픔이라는 감정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궁금하더군요. 어떤 원리로 아프게 되는 것이고 왜 매번 다르게 될까?

 “이별의 슬픔”이라는 아주 감성적인 소재에다가 분석을 틀을 들이대는 것은 사실 무척 산통 깨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이라는 감정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슬픔이면서 그것 자체가 실체라서요. 그렇기에 그 감정은 주로 문학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장황해지기 십상일 텐데, 그러다 보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별의 슬픔을 본질에 가깝게 담기 위해서는 차라리 문학적인 언어들을 그릇으로 사용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결정을 하나 하나 떼어내서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한번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때로 분석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실용적인 목적? 그야 그 아픔에서 조금 더 잘 벗어나 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여러모로 life must go on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뜬금없이 왜 이별을 극복할까? 라고 의문을 가지는 예리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네, 그렇습니다. 드디어 고백하는데 사실 저는 몇달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 <나영이>의 원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때는, 연애 에세이를 쓰겠다면서 연애를 중단하다니, 갓대밋.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라며 머리를 쥐어뜯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급박한 상황에서 뭐라도 붙잡고 탓해보고픈 '그냥 하는 말'일 뿐 사실 그 연애가 끝난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연애 중 가장 잘 헤어진 연애였거든요. 헤어지는 게 옳은 결정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특별히 많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혹 다음에 이별하게 된대도 이 이별처럼 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별을 경험하고 나니 지금까지 경험했던 이별과 이번에 경험한 이별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것은 일반적인 차원의 얘기는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 느끼고 생각했던 것에 해당하는 내용이에요. 보통 이런 것을 자세히 생각하는 사람은 제 주변에 많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사용하려면 이런 저런 감정들을 캐 물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 때 너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이니, 이런 것이니 저런 것이니?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니?'라고 묻는 것은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런 걸 물을만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는 오래된 친구들은 그나마 '일반적인' 연애 패턴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_- 제가 제일 일반적이에요. 아마 개성 강한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이렇게 됐나봐요...(아, 아니 막상 친구들은 생각이 다를지도?!)

 
아, 사설이 너무 길었어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이별이 아픈 이유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과 쌓은 우정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이별의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지난 사랑의 시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누구나 공감하기 쉬우시리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꽤 포괄적인 상황을 의미할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그 중에 가장 힘든 경우는 사랑이 남았으나 지속할 수 없는 경우 같습니다. 그것은 한 쪽의 사랑이 끝났기 때문일수도 있고 양 쪽의 사랑이 다 남아있으나 도저히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여기에 자신이 잘못한 일이 눈에 들어오는 시기가 더해지면 더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워 지는 것 같아요. 혹은 타인이 잘못한 일이 들어와서 원망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겠네요. 그리고 사랑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받는 것을 더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도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은 사랑은 쌍방이 다 하였으나 사랑하던 감정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에서 느끼는 아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모든 상황을 통칭하여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실연의 아픔에 해당하는 요소들이지요. 

 사실 사랑이 끝났다는 것에 의아해 하실 분은 잘 없겠지만, 남자친구와의 ‘우정’에 의아해 하시는 분들 있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연애를 할 때, 남자친구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일상을 함께하는 연애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구속하는 유형은 결코 아닙니다만) 그게 아니라도, 남자친구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여도 솔직하게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금방(다른 ‘친구’들에 비해) 마음을 열고 믿게 된다는 뜻인데요, 그렇게 형성된 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요하거나 소소한 순간들에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별을 맞았을 때 저는 사랑이 끝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정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기를 무수히 시도하곤 했는데, 그건 참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더군요.

 

                   상기의 이유 때문입니다. 젤 친한 친구였잖아요 ㅠ_ㅠ 마음이 정리되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요? 


 어쨌든 몇 번의 연애 끝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슬프지만 견딜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면 그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잃어버린다는 것 자체는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 그 아픔은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 그것이 끝난다고 하면, 한결 견디기 쉬운 법이니까요. 게다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훨씬 회복하기가 쉽고요.

 

 그리고 이제 좀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내용이 많이 길어지니 이건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 설명할께요. :)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6. 08:30


 제목에서부터 벌써 감을 잡으신 분들 있으실 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블로그 하나 추천하려고 합니다. 이 블로그는 우연히 트위터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한 번 빠지게 되면 일상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그야말로 '농약같은' 매력을 가진 포스팅들이 그득합니다. 이 블로그는 "망한 연애담"을 제보받아서 블로그 주인께서 포스팅해주시는 방식의 블로그인데요, 아주 인기가 많아서 이제 책도 곧 나오게 된다고 하네요. 이 블로그가 생긴지 꽤 초반부터 (포스팅 갯수가 얼마 많지 않았을 때부터) 쭉 이 블로그의 발전을 지켜본 저는 이 블로그를 통해 그야말로 '성공의 과정'을 보았습니다.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 (노령 싱글인을 위한 자기주도 연애 학습의 전당)
 http://www.holicatyou.com/category/%5B황망한소개팅%5D%5B황망한연애담%5D


 사실 이 블로그는 아주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나영이'가 추구하는 것과는 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아주 재미있는데,(아 물론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아닌데 ㅠ_ㅠ..그게 최우선은 못 되고 있는 현실?!) 그건 블로그 주인장님인 홀리캣슈님의 감과 편집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할 것이고, 또 여러 사람의 '경험담'이기 때문에 그 만큼 또 생생한 디테일들이 무궁무진하게 등장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망한' 연애담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웃기기도 하면서 위로도 받게 되는 따뜻한 곳이지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혹은 '아, 나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구나!' 라면서요. 

 그리고 나영이가 20대 중후반의 시각 - 연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어느 정도의 의구심을 아직 가지고 있는 - 의 성격에 가깝다면 여기는 '꼬꼬마는 자제부탁'의 분위기로 기본 30대를 넘긴 분들이 주를 이루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연애관이나 원칙도 분명히 서 계신 편이고 또 더 많은 인생경험으로 더 농도짙은 *-_-*(어머) 이야기도 가능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간혹 20대의 사연도 소개 됩니다만은) 말하자면 오빠 형 언니 누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마음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들을 수 있는 곳이랄까요.


 그런데 사실, 이번에 이 블로그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한 포스팅 때문인데요, "흥한 연애담은 배알꼴려서 올리기 싫어요"라고 일갈하시며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을 보여주던 블로그가, 참여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슬슬 여러 입장의 사연들이 올라오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한 사연에서 '도대체 그 사람 뭐야? ㅠ_ㅠ'라고 여겼던 입장이 되보신 분들이 '사실 그건 이래서에요 ㅠ_ㅠ' 라고 "웃을 수 만은 없었던" 감상평을 제보하시곤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사연, "집착의 수렁" http://www.holicatyou.com/608 이었습니다.

 사연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 제보하신 분이 단지 그런 행동을 했던 부분을 제외하면 실은 아주 멀쩡하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될 거에요. 보통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만났네'라고 끝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그러는 데도 원인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비단 '이상한'범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연애의 많은 부분에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나한테 있는 걸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해도 '괴물같은 행동'은 나쁘죠. 그건 분명 괴물이고, 나쁜 거니까 그 상태대로 계속 있으면 안돼요. 그의 '괴물같은 행동'에 상처받는 우리도 물론 가여워요, 무시할 수 없는 피해에요. 하지만 그런 나쁜 행동을 하는 그 본인도 가엽습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하게끔 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또 무서운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면 누구라도, 그런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그 나쁜 행동은 미워하되, 그 연약한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하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사실 분노하는 마음은 젊은이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저도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에 분노하는 자가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사회문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계층엔 언제나 '학생'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때로, 그 분노가 향해야하는 대상을 정확히 인지할 만큼 젊은이들이 노련한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들어왔을 때는 더욱, 그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나하는 우려도 가지게 되고요.

 그러니 참.
 알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수록 인간사는 측은지심으로 귀결해야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쉽지도 않고, 자칫하면 결국 내 상처는 치유할 바가 없어진다는 위험도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저 언제나처럼, 지향점은 거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사랑"하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