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9. 08:30



















0. 이 리뷰엔 영화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스포일러가 왕창듬뿍 들어있습니다. 경고 했어요.ㅋㅋ






1. 일단 감독의 전작인 '게드전기'보단 재밌게 보았습니다.






2.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묘한 인연으로 서로를 알아가게 되는 열여섯 소녀 우미와 그녀의 1년 선배인 슌의 사랑이야기, 또다른 하나는 그들이 재학중인 고등학교의 오래된 동아리 건물, '까르티에 라탱'의 철거를 막으려는 학생들의 노력이지요. 두 이야기 모두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 혹은 영화로 무뎌진 우리나라 관객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엔 참으로 미지근하고 무난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작품 속 슌의 대사를 통해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미와 슌 사이의 핵심적인 갈등 요소인(갈등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게.. 얘네는 이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아요.) '알고보니 남매' 떡밥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에서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은 소재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런 낡은 떡밥이 들어있는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제작한 것은, 지나치게 20대 취향에만 맞춰져 있는 최근의 일본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는 원작에는 없는 까르티에 라탱의 이야기를 집어넣어 '과거의 낭만을 되찾자'라는 메세지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분위기와 남매 떡밥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일 것입니다. 흑흑 우리가 남매였다니, 그럴 리가 없어!!












자신들이 형제일지도 모른다는 슌의 이야기에 놀란 우미.
생김새도 참 많이 닮은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3. 우미와 슌의 사랑 이야기는 결국 그들의 부모 세대 사람들의 관계를 되짚어 자신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는 '뿌리찾기'와 같습니다. 까르티에 라탱 보존운동도 결국 학교문화 기저에 깔려있는 인문학적 뿌리를 지키려는 움직임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구조는 일본사회 전체의 사상적 회복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일본에는 분명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서구 과학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받아들였다는 자부심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제국주의의 광풍이 전국을 뒤덮어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간 경험이 있으니, 19-20세기의 일본에서 꽃피었던 인본주의적 분위기를 회복하고 자국의 자존심을 다시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열망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60년대 초반에는 순수한 정신문화 부흥의 의지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나, 우경화 일로를 걷고 있는 최근의 일본에서 이러한 작품이 다시 나왔다는 것은 작품에 그것 외의 의도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이 작품이 올해 3월에 발생했던 동일본 대지진으로 흐트러진 이른바 '일본정신'을 재건하고 일본인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일본정신'이라는 것이 건강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는 뻔히 알고 있습니다.








4. 이 영화를 마냥 르네상스에 대한 동경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미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일 것입니다. 외할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 일을 거들며 학교에 다니고 있는 우미는, 매일 아침마다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안전한 항해를 기원합니다'라는 메세지가 담긴 깃발을 올립니다. 항해 어쩌고 하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우미의 아버지는 선원이었어요. 우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터였던 한국으로 가는 물자수송선에 탔다가 그 배가 기뢰를 맞아 침몰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우미 아버지 세대의 옛 이야기를 보았을 때 우미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해군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나 작품에서 묘사되는 그는 그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또 다른 전쟁에서 희생된 피해자일 뿐이지요.
   작품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은 얄팍하디 얄팍합니다. 우미 아버지의 죽음은 주인공의 안타까운 처지와 그들 사이의 사랑에 약간의 미스터리를 제공하는 밑밥일 뿐, 그 자체가 이야기에 중요한 축이 되진 않아요. 재밌는 것은 이러한 얄팍함 덕분에(?) 이 작품을 우파적 메세지를 담은 작품이 아닌, 일본의 우파 정부를 비판하는 메세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야자키 고로는 그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과거'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을 둘러싼 여러 정치적 해석과 그에 따른 갈등에서부터 적당히 발을 빼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깊이 없음'은 의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5.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솔직히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아요. 다만 확실한 것은 '코쿠리코 언덕에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일본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공동체 정신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 인본주의적 가치인지.. 전체주의로의 회귀인지는 일부러 깊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감독으로서의 첫 작품을 시원스레 말아먹었던 미야자키 고로의 입장에서는 관객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겠지요. 비록 이 조심성 때문에 얄팍한 작품이 나왔지만 말입니다. 








감독인 미야자키 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입니다.
왠지 기운 없어 보이는 미소네요. 아버지 등쌀 때문에









6. 이 영화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다가 누군가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중에는 왠지 노동하는 미성년자가 등장하는 경우 많은 것 같다고 지적한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아예 1년간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하는 임무를 띤 꼬마마녀가 주인공이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영문도 모른채 고된 목욕탕 일을 해야 했죠. 이 작품의 주인공인 우미 역시 하숙집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혼자 도맡아 합니다. 아직 열여섯밖에 안된 학생인데 식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요..우미가 부엌일을 도맡아하는 설정 덕분에 아기자기한 그릇들을 구경하고 음식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 이건 제 개인적인 감상인데.. 저는 지브리 작품에 나오는 계란 후라이가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가 없어요ㅋㅋ 노른자가 반짝반짝 탱탱한 게..인물들이 그걸 한 젓가락에 집어서 후르륵 삼키죠. 아유 어쩜 그렇게 맛나게 먹을까요? 응?ㅋㅋㅋ








저 각 잡힌 상차림을 보라. 여기가 하숙집이야 군대야
아아 저 계란 후라이 아아








   
7. 아무튼 별 생각없이 우미와 슌의 풋풋하다 못해 밍숭밍숭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은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 어느정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홍보 팜플렛에는 이 작품이 '스튜디오 지브리가 선사하는 첫번째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데, 사실 첫번째는 아니지 않나요? 그 전부터 이 정도 수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는 조금씩 선보여왔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거듭할 때마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강조해나간다면, 언젠가는 '폭풍의 언덕' 같은 격정적인 치정극을 내놓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지브리와 치정극이라.. 정말 안어울리는 두 단어네요.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