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부터 수시모집 원서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요일에 접수가 마감된 학교도 있고, 아직 접수 중인 학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학교도 평소보다 분위기가 다소 뒤숭숭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 같고, 그동안 SNS 세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학생들도 지난 주만큼은 잠수를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살기 참 힘들지요. 고2 겨울방학도 힘들고, 3월부터는 더 힘들고, 6월 모평과 9월 모평을 거치며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다가 9월 모평마저 끝난 이 시기는 수험생들의 마음이 들뜨기도, 해이해지기도, 포기를 하기에도 좋은 시기입니다.
원서를 쓰고 나면 마음이 참 거시기합니다. 이미 절반쯤은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붙은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기고, 괜히 돈만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듭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던 일주일이었을 겁니다.
지난 몇 달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왔는데, 자기소개서를 쓰고 추천서를 받다보면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수험생활이 끝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감상에 젖기도 할 테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온 자신이 대견스러워 가슴이 뭉클하기도 할 겁니다.
근 일 년 가량을 정해진 계획에 딱딱 맞추어 공부해왔는데, 요 며칠 간은 자소서를 쓰느라 생활리듬도 바뀌었을테고, 그 때문에 공부패턴에도 변화가 왔을 겁니다. 어영부영하다보니 일주일이 슝 날아가버린 기분일 테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가 쉽지도 않을 겁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우리나라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가장 밀집하여 사는 곳이 서울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신림동 고시촌(서울특별시 관악구 대학동)입니다. 사시, 행시, 외시는 물론이고 공인회계사, 감정평가사, 변리사 등 다양한 전문직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PC방이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학동'이라는 단일 동에만 300개가 넘는 PC방이 있다고 하니, 더이상 할 말이 없지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시험날짜가 가까워올수록 PC방에는 점점 더 손님이 꽉꽉 찬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잊기 위해,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올해는 안 될 것 같으니 내년을 기약하자는 자기합리화를 거쳐, PC방 자리는 점점 부족해집니다.
고3 수험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9월, 10월, 11월이 될수록 다들 점점 더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지만, 아예 놓아버리는 친구들도 상당히 많이 생깁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안 오른다며, 이젠 정말 지친다며, 책과 연필을 놓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납니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수험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42.195km의 마라톤 중, 41km 지점을 달리고 있습니다. 1km만 더 가면 트랙이 놓인 운동장이 있고, 수많은 관중들이 환호를 보내는 운동장 안에서의 195미터는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가장 힘든 시기가 앞으로 남은 1km이며, 시간으로 따지면 한달 반 가량입니다.
고3 여러분.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막바지 힘을 다해주세요. 수시는 로또 긁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정시는 월급 타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동요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시모집을 대해주세요. 수시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입학사정관제가 생기고 논술을 보고 면접을 보고 다른 그 무엇이 더 생기더라도, 90% 이상의 전형에서 최종 관문은 수능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수시가 70%이고 정시가 30%라지만, 대부분의 수시모집에는 최저등급이 있습니다. 대학 정원의 70%를 차지하는 수시에서 다시 70%를 차지하는 것이 논술전형이며, 논술전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논술이 아니라 수능성적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논술전형에서도 또다시 70%가 우선선발이며, 우선선발에서 수능성적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내신성적이 페넌트레이스라면, 수능성적은 한국시리즈 7차전과도 같습니다. 차곡차곡 쌓아오고 준비해온 내신성적은 사라지지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생활기록부 보존 연한이 졸업 후 70년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세상을 떠날지, 생기부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는 대충 감이 올 겁니다.
하지만 수능은 다릅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그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모의고사 성적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도 없이 단 한 번의 한국시리즈 7차전으로 우승팀을 가리는 겁니다. 어찌 보면 잔인한 제도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아주 매력적인 제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곳곳에 불합리가 산재해있으며, 때로는 부조리가 정의와 원칙을 이기기도 합니다. 대학 입시 또한 평등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재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학생의 성적이 상당 부분 좌우됩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누구는 처음부터 출발하고, 누구는 20m 지점에서 출발하며, 어떤 누구는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불평등한 세계 안에 있는 여러 경쟁 중 가장 공정한 경쟁이 수능시험입니다. 전국의 모든 동년배들과 한날 한시에 같은 기준으로 동시에 경쟁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적이 앞으로의 인생 중 많은 부분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경쟁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꿈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여러분은 그 꿈과 이상에 어울리게 노력해왔으며, 그것을 꿈꿀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들뜨지 말고, 늘 하던 그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잘 마무리해주세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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