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5. 15:05

 

 

 

로맨스 영화의 미덕은 '공감'에 있다.

 

'건축학개론'처럼 아련한 첫 사랑의 기억이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헷갈리는 관계든,
'세렌디피티'처럼 운명적인 만남이든
'연애의 온도'처럼 이별과 만남의 반복이든.

 

사내커플이 주인공인 익숙한 사랑 이야기든,
뱀파이어와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든


모든 로맨스는 결국 설레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상대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이 짓는 표정, 한 마디의 대사,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면 한 컷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쉽게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영화가 지닌 프레임을 지워버리고
그 안으로 내가 포섭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영화를 밝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로맨스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5. 11:10



나는 초보 교사다. 사범대를 나오지도 않았으며, 경력은 이제 갓 3년을 넘었다. 수업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고, 학교 행정도 잘 모른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매순간이 시행착오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기에, 나의 ‘교직’은 매일이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 여기저기 참고서를 보고 자료를 모아 수업시간에 나누어주는 것, 그런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조리와 불합리는 도처에 있다. 잘못된 정책과 제도는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나를 곤란하게 한다. 이때 선생 노릇을 똑바로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불의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자라게 키운다면 그 아이들은 훌륭한 인물, 행복한 민주시민으로 자랄까?


타 교과에 비해 국어교사가 좋은 점은 ‘딴 소리의 자율성’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다루다 노동을 이야기하고, 저항시인의 시를 다루다 친일잔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국어교사가 가진 특권이다. 일반적으로 이 특권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때로는 어깨를 무겁게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노동자가 될 청소년들이 무노조 경영을 지지하고, 그것이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켄타우로스는 교실 곳곳에 엎드려 망상의 늪을 허우적댄다.


존재를 배반하는 현실에서 <고장난 거대기업(양철북)>은 의의를 지닌다. 12개의 장은 현대자동차, 나이키, 스타벅스, 코카콜라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상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이며, 늘 가까운 곳에서 선망했던 기업들이기에 책을 여는 손놀림은 가볍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무거워진 손놀림과 몸을 떠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거대기업이 저지른 과오와 횡포,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처는 분노를 가지기에 충분하다. 진실을 모른 채 속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격과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기존의 기대와 질서를 배반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자주적인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실이 실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때,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존재에 대해 회의할 것이며,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도 이 책이 지닌 커다란 장점이다. 현실이 척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거세당한 채 자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굴복한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훈계한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좀 더 현명한 어른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아이들을 설득한다. ‘현실이 잘못된 것은 맞지만, 지금 이렇게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높은 위치에 올라간 뒤 바꾸면 되는 거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하청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느 존귀한 어르신의 결단 덕분은 아니었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를 착취의 대명사로 만들어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낸 것도, 오만한 스타벅스로부터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높은 위치에 올라가 룰을 바꾼 개인의 역량은 아니었다.


나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지만, 힘을 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의미 있다는 것. 무한경쟁사회에서 연대가 왜 필요한지를 체득하게 하는 것. 그것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고픈 이들에게, 연대과 공존의 사유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장난 거대기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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