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0. 11:09

K고등학교의 지난해 학생회장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습니다. 기호 1번과 기호2번의 지지율이 거의 똑같았거든요. 방송반에서 한 반을 골라 여론조사를 해봤는데, 표차이가 한 표밖에 차이가 안 났을 정도니까요.


그전까지 당연히 당선될 거라 믿었던 기호1번은 다급해졌어요. 게다가 후보토론회를 무지막지하게 망쳤거든요.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함에 기호1번은 절친한 사이인 현 학생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현 학생회장은 기호2번이 죽도록 싫었기에, 기호1번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놓고 조작하기엔 학생들이 예전만큼 멍청하지 않기에, 학교 홈페이지에 익명의 비난글을 올리기로 했어요.

악플놀이가 절정에 달했던 투표 3일전, 학교 앞 pc방에서 악플을 달던 현 학생회 임원은 기호2번의 친구에게 현장을 들키고 말았어요. 학생회 임원은 퇴학을 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pc방 문을 모두 걸어잠갔어요. 기호2번쪽 학생들이 pc방 문을 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어요.

pc방 문은 학생회 임원이 스스로 닫았는데, 기호1번 쪽에서는 기호2번이 학생회 임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설상가상으로 학교신문까지 기호1번의 주장을 대서 특필하며 기호2번측을 비판했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학생자치법정이 열렸어요. 자치법정 위원들은 학생회 임원의 악플 작성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컴퓨터를 확인하려 했죠. 근데 아뿔싸. 갑자기 선생님들이 나서서 조사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선생님들의 방해에 아무 것도 조사하지 못한 학생회장 선거 전날, 야자 2교시에 갑자기 전체조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강당에 모인 전교생에게 발표를 했습니다. 기호 1번측에서는 악플을 단 적이 없다고요.

그렇게 투표 당일이 되었고, 개표결과 기호1번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기호1번은 1년을 함께 살아갈 학생회 임원들을 여럿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게 웬걸. 임명된 학생들의 이력이 아주 화려하네요. 상습적인 지각이나 교내 흡연은 오히려 애교였어요. 금품갈취에 집단폭행에 성폭력 가해자까지 있었어요.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죠.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올해 6월,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양심고백을 한 것이죠. 기호1번이 악플을 달았지만, 사건을 덮기로 했다고요. 알고보니 기호1번은 19년 동안 학교를 쥐락펴락 했던 옛 교장선생님의 손자였고, 그분의 제자들과 친인척들이 학교 선생님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거였어요.

K고등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난리가 나고 뒤집어졌다고요? 천만에요.

1등급 맞는 애들은 그래도 생각이 있는 건지 운동장에 모여 데모를 했어요. 2등급 맞는 애들은 할까말까 눈치를 보는 중이예요.

나머지는 뭐하냐고요? 학교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애랑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애랑 사귄다는 소문에 들떠서 학생회장 부정선거에는 관심도 없어요. 우리가 데모한다고 뭐가 바뀌겠어? 라고 말하며 기말고사 공부나 열심히 하겠대요.

이 학교, 정상인가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5. 1. 16:01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다.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이런 날이 다가올 때면 괜히 마음이 찡하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싸우다 간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의 소중한 부모이고 자식이었을 테지만, 더 큰 가치를 위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사람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씩 발전해온 것이 아닐까. 나처럼 제 한 몸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 가장 큰 가치인 범인들만 있었다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절, 노동절에 면사무소가 쉬지 않냐고 직원에게 물어봤다가 보기 좋게 비웃음을 샀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근로자의 날에는 근로자가 쉬는 거 아니냐고. 공무원이 무슨 근로자의 날에 쉬겠냐고.

'근로자'는 매우 좋지 못한 어휘다. 일제 치하였던 1923년, 한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5월 1일에 조선노동총연맹에 의해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가 치러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강했기에 당시 위정자들의 입맛과는 맞지 않았고, 분단 이후에는 북한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게 되자 의식적으로 사용을 배제하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군사정권에서 '노동'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이 되었고, 이후 '노동자'를 대체하는 말로 '근로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말이지만, '근로자의 날'은 '노동절'과는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 19세기부터 5월 1일을 기념했던 노동절과는 달리, 애초 근로자의 날은 3월 10일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과 기념일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날짜를 바꾸었고, 자신이 총재를 지냈던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날짜를 5월 1일로 되돌리긴 했지만, 명칭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로 남아있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의미 또한 많이 퇴색되었다.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했던 본래의 의미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현재 '근로자의 날'은 사용자들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포상데이, 합법적인 휴무일(그조차도 비정규직은 출근하지만) 정도로 변해버렸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라는 말은 못 배운 자, 사회적 약자, 피착취자의 의미를 상당 부분 내포한다. 단어의 범주 또한 민간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그것도 블루칼라의 노동자에게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친절한 네이버 백과사전은 <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노동력을 판매하여 얻은 임금을 가지고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직업의 종류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라면 누구나 노동자다. 공무원도 노동자요, 교사도 노동자이며, 군인도 노동자다. 그러나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고귀한 '선생님'을 노동자 취급한다며, '공직사회'를 격하시키는 행동이라며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노동자'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다. 비인간적인 금력과 권력으로 타인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불로소득을 얻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성실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야 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가.





노동절의 역사가 12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무노조 경영'을 '일류경영'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노조 경영 원칙은 그 회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동종업체보다 월등히 좋을 경우에만 한시적으로 가능(불만 잠재우기의 가능)한 것이다. 삼성은 언제까지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노조 결성을 시도하는 직원에게 위치추적기를 붙이고 무노조 경영 외에는 별다른 경영철학이 없어보이는 회장님이지만, 그 회장님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이 비루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선지도 한참이 지난 2013년 현재, 127년 전의 외침인 줄 알았던 '8시간 노동 쟁취! 노조 인정!'과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구조적 실업이 만연하며 일자리를 얻고자 싸우는 사람들이 한 편에 있고, 일자리는 얻었으나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다른 편에 있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노동의 확산, 구조적 빈곤은 이제 국가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단기 이윤만을 쫓아 모든 삶터를 파괴하는 자본의 야만과 탐욕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귀결되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일방적으로 임금단체협상을 부정하는 부당노동행위를 일삼고 있으며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전근대적 노무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노사 자율로 충분히 합의 가능한 노조 전임자 임금을 정부가 직접 간섭해 노조 활동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절을 노사 화합의 장 정도로 생각하는 정부와 고매한 어르신들도 문제다. 당신네들께서 스스로 만들어주시고 쌓아두신 노동 관련 악법과 현안이 몇 개인데,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편히 쉬라며 어깨 토닥이는 꼴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근로자라는 이름보다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한 사람 한 사람이 흘리는 피와 땀이 자체의 의미로서 존중될 수 있는, 오늘만큼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일 수 있는 그러한 날이 되길. 잠시 고개를 숙이며. 묵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