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5. 08:46

오늘은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가 있는 날이다. 전국의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들은 잠시 후 같은 시험을 보게 된다. 3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성적이 발표되고, 전국의 모든 학교가 성적순으로 서열화된다. 시험을 보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학교를 줄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학교 성적이 공개되다 보니 일선 학교에서는 이 일제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모의고사까지 보고 있다. 그래프로 반별 개인별 월별 성적을 표기하고, 가르치는 반이 부진한 교사에게는 경고문을 발송하기도 한다. 심지어 성적이 뛰어난 학급을 담당하는 교사에게는 금전적인 인센티브까지 제공하는 학교까지 있었다. 어떤 교육청은 고위 관계자가 수시로 일제고사 대비상태를 순찰하며, 몇 년 전에는 성적이 나아진 학교에 상품권을 지급해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실적(?)이 뛰어난 교사에게는 해외연수의 특전을 베풀며, 성과급에도 반영한다.

마치 기업체 영업부서에서나 가능할 듯한 반 교육적 행태가 전국 곳곳의 학교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교과부가 학부모와 전교조는 물론 보수적 교원단체인 교총까지 반대하는 일제고사를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역은 물론 학교와 학급, 개인별 서열을 매겨 한 줄로 세우겠다는 것이 일제고사의 운영방침이다. 이러한 방침 때문에 기상천외한 일들이 전국 곳곳의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다. 올해에는 사라졌지만 작년까지는 초등학교 6학년도 일제고사를 봤는데, 이 때문에 초등학생들에게 0교시 수업과 강제적 야간 자율학습까지 시키는 학교가 있었는가 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에 학생들을 등교시켜 일제고사 대비 문제풀이를 하는 학교도 있었다. 초등학생용 A4용지 4000쪽 분량의 문제집이 등장했는가 하면, 운동장에서 노는 것을 금지시키고 쉬는 시간을 5분으로 단축하는 학교도 있었다. 

일제고사 점수를 올리기 위해 음악, 미술, 체육 시간에 수업을 안 하고 일제고사 평가 대비 문제집을 풀게 하면 예체능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있겠는가? 학교에 따라서는 ‘학업성취도 평가 마무리 캠프’나 ‘학업성취도 평가 출정식’을 치르는 웃지 못할 일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하위권 학생들을 한 반에 몰아넣거나 성적이 떨어지는 아동을 특수학급(장애 학급)에 배치할 것을 강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체 교과부는 무엇을 위하여 학교를 편법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아동을 학대하며, 즐거워야 할 공부를 목숨 걸고 하게 하는 일제고사에 집착하는 것인가? 입만 열면 교육과정 정상화를 노래처럼 부르는 교과부인데, 국어 수학 영어 세 과목만 일제고사를 치면 나머지 과목은 교육과정대로 정상적인 수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과부는 일제고사의 목적이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돕기 위한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일제고사가 도입된 이후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절반 가량 줄었다고 선전한다. 물론 일제고사가 학습부진 학생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장과 교육청의 책임성을 높인다는 것을 빌미로 각 학교, 지역별로 성적을 낱낱이 공개하고, 각 시·도 교육청 평가 기준과 학교별 성과급의 기준으로 넣을 것을 고집하며, 학생과 학부모의 응시 선택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부진학생지원이 목적이라면서 왜 시험 결과는 공개해 학교별 순위를 매기는가? 성적을 공개하면 일선 학교에서 평판 때문에 부진아를 감추거나 줄이려고 시도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가? 시험 결과를 통해 우수한 실적을 낸 학교장과 교육청에 금전적 인센티브를 더 많이 준다는 방침은 학습 부진 학교를 지원하겠다는 시행 취지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결국 일제고사의 취지는 부진아 지원이 아니라 학교와 학생을 시장에 내놓고 무한 경쟁을 부추기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기득권을 교육을 통해 합법적으로 재생산하려는 의도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가?

교과부가 진정으로 학습부진 학생을 지원하고자 한다면, 일제고사를 통해 열패감만을 부추기고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학습부진의 원인이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해 종합적 진단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학습부진아들은 대부분 불가피한 요인으로 인해 오랜 기간 학습결손이 누적된 학생들이며, 대체로 가정환경이 좋지 못하고 집중력 부족을 겪는 등 복합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학생들이다. 이들을 위한 교육 복지망을 구축하고, 학급당 인원수를 감축하여 교사에게 보다 세심한 배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순리다.

획일화된 평가인 일제고사는 산업화 시대의 주입식 지식 테스트에 불과한 낡은 패러다임이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방대한 지식과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문제풀이 중심의 암기식, 반복식 수업은 학습에 대한 흥미를 말살시킬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섯 개의 문항 가운데 ‘정답’을 골라내는 단편적인 사고에 갇히게 한다. 입만 열면 창의성, 창조성, 창의지성을 외치는 교과부가 오히려 창의성의 싹을 잘라 버리는 반교육을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셈이다. 획일화된 문제를 풀기 위한 획일화된 교육은 제각각인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배려하지 못함은 물론, 다양한 소질과 적성을 펼칠 기회를 박탈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더불어 사는 능력이 OECD 국가 중 꼴찌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OECD가 아니라 UN이었으면 순위가 크게 올라갔을까? 즐거워야 할 학창시절부터 무한경쟁을 경험하는 아이들인데, 인성이 피폐하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일 것이다. GDP의 3%를 사교육비에 지출하는 세계 최고의 사교육 공화국임에도, 왜 우리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고, 왜 우리 교육은 경쟁력이 없는 것일까. 

정말 화가 난다. 역겨운 상황에 화가 나고, 아무 것도 행동하지 못하는 내 비겁함에 더욱 화가 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