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곳에 출퇴근을 하고, 교무실에 제 책상이 생기고, ‘선생님’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들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경험도 실력도 없는 초보 교사 주제에 나름대로 개똥철학은 어찌나 고루한지, 누가 옆에서 뭐라 하든 말든 아직까지는 마이 웨이를 걷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교사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니, 올해 제 나이를 감안하면 저는 반평생 동안 이 일을 희망한 셈입니다. 하지만 2년쯤 뒹굴어 보니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제가 그리던 이상과 학교 현장의 괴리 또한 생각보다 컸습니다. 수업을 잘 하고, 아이들과 공감대를 나누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 이상으로 찾아오는 업무 외적 스트레스도 많았고, 학교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선배 교사와의 갈등에, 학부모와의 관계에, 경직된 조직 사회에서 느끼는 답답함 등등. 아직 저는 사회화가 덜 되었음을, 아직 치기 어린 낭만에 젖어있는 철부지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2년이었습니다.
지난 두 해 동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때로는 따뜻한 부모처럼, 때로는 장난끼 많은 친구처럼, 때로는 엄한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자세를 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귀가 얇은 편이 아닌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조언 저 충고에 고민하다보니 정작 제가 꿈꿔오고, 제가 그려왔던 저만의 학급 경영 계획은 하나도 시도해 보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의 편에 설 것인가, 학생들을 제압하고 카리스마 있게 통제하길 원하는 학교 관리자들의 구미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2년이 지나갔고, 이제 2011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3월은 초임 교사였던 제게 수많은 선배 선생님들께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달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들이 많았지만, 일관되고 공통된 요지는 ‘애들을 잡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사가 카리스마가 있어야 애들한테 말이 먹히고, 수업도 듣는다는 것이 요지였고, 3월에 고생을 하면 일 년이 편하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월에 애들을 잡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많이 때리고, 많이 혼내고, 많이 벌 줘서, 무서운 이미지를 심어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네네, 하면서 예스맨처럼 굴었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사실 매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표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학생이 느끼기에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어디 사랑일 수가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성폭력 가해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귀여워서 그랬다.’
한국 교육, 특히 중등교육, 또 특히 남고, 다시 한 번 특히 지방 사립고에는 군사문화와 체벌과 같은 육체훈육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쥐20’씩이나 개최하고, 스마트폰 수출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사회 구성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몽둥이찜질을 널리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어느 계급사회든 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훈육의 장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만큼 간단명료하면서도 효과만점인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이런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일본, 대만, 중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매’라는 약까지 강제로 투여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삐딱거린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약간이라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고개를 15도 숙이는 대신 5도 정도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는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기억에 새기게 됩니다. 불복종은 당장 큰 통증을 몰고 온다는 등식을 몸으로 잘 기억할 수 있게 말입니다.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가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 것일까요. 곤장을 치게 하여 ‘문제 있는’ 이를 반주검으로 만들고 이 장면을 보는 이들을 다 겁에 떨게 만드는 전근대적 행위가 수업 때에 하도 재미없어 잡담하거나 딴 일을 하는 아이에게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것이 정말 교육적인 행위란 말인가요.
실컷 두들겨 맞은 뒤에는 따뜻한 것처럼 보이는 서슬 퍼런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수야, 너는 이러다가 좋은 대학 못가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단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너의 부모의 희망을 다 꺾고 말야. 정말 그러고 싶니? 정신 차려! 이렇게 이야기하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영수의 신분상승 심리를 자극시킵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철수가 아무리 국영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된다고 해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말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이제 길어야 10년~15년 사이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구꼴통 세력이 정권을 잡고 지금의 정책이 반복ㆍ심화된다면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빈민촌과 할렘가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엔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너는 그래도 너의 부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하고 싶지 않니? 마약밀수갱에 들어가서 총 맞아 죽을 마음 없지? 그러니 공부나 좀 해!
교실에서의 체벌 관행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을 꺾고 저항하려는 용기를 말살시키는 것이 1단계, 겁이 나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2단계, 그리고 이를 통해 말 잘 듣고 반항하지 않는 황국 신민을 길러내는 것이 3단계, 이와 같은 단계가 당시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친일파 출신의 교육 관료와 함께, 이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이 전부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례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유지’를 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 (따귀 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할,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할 것입니다. 학교-군대-직장으로 이어지는 조직 사회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체벌문화가 사회를 좀먹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메커니즘의 선봉장이 되어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모름지리 교사라면, 무엇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실력도 없고, 경험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풋내기 선생에 불과하지만,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저는 두 개의 별명으로 불립니다. 첫째는 ‘마구마구’이며, 둘째는 ‘호구’입니다. ‘마구마구’라는 별명은 제가 즐겨하는 야구 게임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호구’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호구입니다. 학생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벌도 주지 않고, 매도 들지 않으니, 호구는 분명 호구입니다.
물론 저는 저 별명이 싫습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학생들에게 저런 류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교사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제가 옳다고 믿는 교사상을 바꿀 생각은 그보다 더욱 없습니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교사, 무서워하는 교사, 말 잘 듣는 교사, 수업 열심히 듣는 교사, 그런 교사가 되는 법은 간단합니다. 학생을 괴롭히면 됩니다. 벌을 주고, 때리면 됩니다.
선배 선생님들은 호구인 제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한 놈만 잡아서 제대로 조져버리라고요. 그럼 소문이 나서 애들이 함부로 못 대한다고요.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적절한’ 체벌을 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화가 나서 때리는 감정적인 체벌은 허용할 수 없지만,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어린 시절 잘못된 길로 접어들거나 방황을 할 때 엄한 매로 정신을 차린 추억을 되새기면서 스승의 고마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체벌은 정당한 것일까요?
저는 체벌에 반대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화를 참기가 힘듭니다. 사람들 사이에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단은 들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비판을 할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도 체벌 찬성론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체벌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폭력사회로 만든 가장 큰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맞고 자랐습니다. 지금 성인이 된 사회의 구성원 중에 자라면서 선생님에게 한 대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전 국민이 맞으면서 자라는 사회가 폭력적이지 않은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유럽이나 일본, 미국의 학생들은 체벌 없는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 청소년들은 매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유럽 각국과 일본에서 체벌은 불법입니다. 미국 대다수의 주에서 체벌은 불법이며, 일부 허용되는 주에서도 체벌을 하려면 부모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도록 하는 곳이 많습니다. 심지어 학생이 체벌을 거부할 경우 정학 등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곳도 있습니다. 최근 많은 부모들이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면서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내지만 외국에서 맞으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우수하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뒤처진다고 볼 근거는 더욱 없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아이들보다 못하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지도 못하면서 매를 들어야 하나요. 일제강점기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조선 놈들은 맞아야 말을 들어” 하면서 매질을 했다는 아픈 기억을 꺼내지 않더라도, 체벌을 앞세우는 교육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때리면서 교육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교사가 체벌을 할 때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순전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를 든다고 가정해봅시다. 체벌의 수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적절한 정도라고 해봅시다. 선생님들은 개인적 편차 없이 일정한 경우에만 매를 때려서, 학생들도 어떤 짓을 하면 맞게 되는지 예상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세상에는 맞을 만한 짓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동료가 맞는 것을 보면서, ‘저 녀석은 그런 짓을 했으니까 맞는 게 당연해’라고 방관하게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나서게 되지 않을까요. 만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더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맞을 짓을 한 놈은 때려도 된다’는 생각만큼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생각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매에 내성이 생기는 만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요. ‘잘못했으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준 어른들의 잘못을 비판한다면 잘못 짚은 것일까요.
체벌의 큰 문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사가 몸소 남을 때려도 된다는 것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권위의 발현'입니다. 교사의 권위로서 학생을 때리는 이 '생생한' 행위는 학생들에게 몸소 '권위'와 '권력'에 대한 시범 장면이 됩니다. 즉, 권력이 있다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무려 12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빵셔틀'이라는 용어는 새롭지만, 과거에도 '시다바리' '꼬붕' 등의 명칭으로 강자에게 굴복당하는 약자는 체벌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이는 마치 교사-일진-평민-빵셔틀의 피라미드 구조와도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행위'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을 너무나 쉽게 무시하는 곳이 그 동안의 학교였습니다. 그런 선생들을 보고 애들이 '아 나도 힘이 있으면 나보다 약한 사람들 때려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리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요? 통계적으로도 가정폭력이 있는 집의 학생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학생들의 폭력성은 불안한 가정사 외에도 부모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남을 때리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큽니다.
체벌 찬성 측의 주요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벌 금지가 교권의 축소 혹은 침해를 야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체벌이 문제 학생을 계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학급 통제가 학생 인권에 우선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위의 논리를 소급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릅니다. 체벌에 의해 유지되는 교사의 권위는 정당한가요? 체벌에 의한 교화가 교육적이라 할 수 있나요?
분명 체벌은 학생을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신체적ㆍ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의 청소년에게 체벌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체벌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학생은 자신의 행동을 시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한 물리적 제재를 가할수록 학생이 받는 신체적, 정신적 상흔은 커지며, 체벌과 폭력의 구분 또한 모호해집니다.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어떤 사유를 가지든, 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체벌에 있어 보편타당한 규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폭력에 가까운 체벌을 상습적으로 동원하는 교사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은 소수의 범법자로부터 다수의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체벌 금지 법안 역시 체벌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학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체벌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성의 문제를 잠정적으로 드러냅니다. 진짜 핵심은 학생을 때려야 하는가, 때리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교사로 하여금 체벌을 가능하게 하는, 체벌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 사회에서 가해지는 폭력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학교에서의 체벌을 당연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고, 이 때 형성된 인식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폭력적 자극에 대한 사회 전반의 역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가해지는 체벌은 체벌의 대상이 되는 학생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그 외의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복합적인 파급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폭력적 순환 구조의 재생산 과정에서 학생은 집단 내에서 상급자를 상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때문에 체벌(권위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이 익숙한 문화에서 성장한 인간은 사회의 또 다른 억압기제를 수용하고 내면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그렇듯 현실이 당위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체벌에 의해서만 계도되는 학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는 무력합니다. 폭력이 당연한 사회에서 체벌 금지가 현실적이지 못한 조치라는 비난에 앞서, 학교 교육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금지는 공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됩니다.
체벌은 교사의 ‘폭력적 권위’를 내세울 뿐, 지금 교육현장에 절실한 ‘도덕적 권위’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는 일종의 허구입니다. 교사가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체벌을 행사할 때, 요즘 학생들은 더 이상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체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따른 응당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교사의 심기를 잘못 건드린 대가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체벌은 교육적 목표 외에도 '교권의 확립'이라는 추가적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체벌이 허용되어 왔던 것은 '교육적 선도' 와 '교권 확립'이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즉, 교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교사가 학생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무기가 없다면, 교육적 선도가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휘자(commander)로서의 교사가 아닌, 친구이자 동료(company)로서의 교사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월등하게 교육적 선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입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아동들에게 어느 쪽이 더 그들의 잠재성을 북돋워줄 지는 명백합니다.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말로 타일러 가르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만약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더 우월하다고 입증된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기관은 상당히 살벌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군대는 즉각 '가혹행위'를 부활시킬 것이고, 초중고 학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교육에 체벌을 도입할 것입니다. 하지만 체벌을 통한 교육효과가 그리도 우월한가요? 성장기 아이들에게, 체벌을 통한 효과가 그것으로 인한 역효과를 무시할 정도로 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둔갑한 폭력, 그것은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탄의 매입니다. 몸에 새겨진 폭력성은 절대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랑의 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께 깊이 감사하고 지금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라면서 맞은 매 중에서 한 번이라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매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모든 매는 예외 없이 감정이 섞인 매였습니다.
세상에 '맞을 짓'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한 폭력의 정당화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차라리 저는 평생을 호구로 남기를 자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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