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1. 23:36


홍상수의 자유로운 붓질, 북촌을 그려내다.

북촌방향
감독 홍상수 (2011 / 한국)
출연 유준상,김상중,송선미,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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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 미술학도를 꿈꾸던 내게 커다란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수채화였다. 4B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정갈하게 스케치를 하고 빛의 방향을 파악해서 명암을 넣는 과정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문제는 채색단계,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을 덧칠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은 엉망이 되어버리곤 했다. 너덜너덜해진 스케치북과 온갖 색깔로 뒤범벅이 된 팔레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학원 선생님께 “물 조절을 잘 못해서 그런가 봐요. 라면도 그래서 잘 못 끓이거든요, 하하.”라며 어색한 변명을 던졌다. 그 해 나는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북촌방향’은 내게 잘 그린 수채화 같은 영화다. 무겁지 않은 샷들이 겹겹이 쌓이고 교차하고 여백을 만들며 어느 한 공간을 채워나간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무엇부터 색칠했는지는 알 수 없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인 덩어리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불확실성과 우연성으로 점철된 홍상수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북촌방향’이란 수채화는 아마 추상화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화감독이었던 성준(유준상)은 친한 형인 영호(김상중)를 만날 겸 서울 북촌으로 온다. 한정식 집과 술집을 오가며 성준과 영호가 어울리는 자리에는 성준의 첫 영화 주인공을 맡았던 인연이 있는 중원(김의성), 영호의 후배 보람(송선미) 등이 동석한다. 성준은 옛 여자 친구 경진과 꼭 닮은 술집주인 예전(김보경)에게 끌려 하룻밤을 보낸다. 간단한 서사지만 각 에피소드가 연결되고 축적되기 보다는 토막토막 난 시간의 재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색다르게 느껴진다.


성준은 홍상수의 남자답게 적당히 찌질한 속물이다. 불안함과 예민함을 고루 갖추고 우유부단한 면모도 보이는 그는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이자 1인칭 서술자이다. 그래서 ‘북촌방향’ 속을 흐르는 시간은 그의 기억과 상상과 착각과 회상이 뒤엉켜 있다. 흑백영화란 영화적 장치도 정확한 시간의 분절보다는 밤낮의 반복으로 시간을 변주한다. 또한 ‘북촌’이란 공간적 배경 또한 명확한 경계가 없으며, 김보경의 1인 2역 또한 불분명한 캐릭터란 점에서 영화의 흐름과 상통한다. 시간, 공간, 인물 등 흔히 명확성이 요구되는 요소들에게서 경계를 지워냄으로써 ‘북촌방향’은 일종의 자유로운 에너지, 즉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홍상수의 자유로운 붓질이 그려낸 투명하되, 불투명한 수채화인 것이다.


‘북촌방향’ 속 이야기가 일종의 비연속적 반복이었다고 보면, 그 대상을 확장하여 홍상수의 전작들과도 일종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나 ‘하하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다 멈추고 끊겼다가 이어지는 방향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차별성을 지닌다. 북촌으로 향하는, 짧다면 짧은 79분의 러닝타임 속에서 영화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가끔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그 이야기들 속에 우리는 팝콘을 안주로 편하게 즐기는 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느낀다. 당황스럽지만 즐거운 사유의 기쁨을 만끽하며, 오늘은 북촌으로 가고 싶다. ‘소설’에 들러 술 한 잔 걸치면 딱 좋을, 바람이 쌀쌀해진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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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