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5. 08:20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수요일 아침을 여는 사과모히토 입니다. 턱관절 장애와 만성피로 등등으로 고생고생 한 일주일이었어요. 오늘은 여고괴담 뉴버전을 꿈으로 꾸는 바람에 잠을 설쳤습니다. 흐엥 지금 정말 괴롭군요. 그래서 미뤄둔 포스팅을 꼭두새벽에 하고 있습니다. 그닥 센치한 시간대는 아니지만, 오늘 소개할 사람은 '시인'입니다. 당연히 소개드릴 책도 '시집'이 되겠죠?


오오, 훈남 스멜! 그의 이름은 심보선! 등단하신지 17년 되셨네요! 2008년 등단 14년 만에 묶어 낸 첫 시집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동경하기도 하구요. 심보선 시인의 시들은 '생각할 거리', '느낄 거리'를 건네줍니다. '늘 긍정적인 자세로 삶에 임하라!'식의 훈계나 계몽이 아니라 '이런 삶이, 생각이, 느낌이 있었다'라고 말을 겁니다.

종종 자기계발서적이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결정지어진 의미를 그대로 흡수한다면, 소위 말하는 '밥을 입에 떠넣어 주는 식'에 그치고 말겠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순수문학이 자기성찰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보선 시인의 시집은 2권입니다. 모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왔어요. 시를 좋아하시지 않으셔도 문학과 지성사 시집의 표지는 대부분 익숙해하시더군요. 2008년 출간된 첫 시집의 제목은 '슬픔이 없는 십오초'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감상하세요!

슬픔이없는십오초:심보선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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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집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시였습니다. (제가 카모마일 티를 워낙 좋아해서 마치 시 속 '여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고요 히히) 어려운 어휘가 따로 없지만 다소 난해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감상은 여러분의 몫!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이어집니다.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복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고딩때 시를 끼적이던 저에게 가장 좋은 주제는 '청춘'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재고 꾸며 시쳇말로 '허세'로 쓰여진 망작(ㅋㅋㅋ)이 대부분이죠. 심보선의 '청춘'은 어쩌면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의 단편들, 현재의 삶들을 꺼내게 해주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읽고 펑펑 운 독자 1人! 찌질한 청춘의 대명사인 독자 1人!

눈앞에없는사람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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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 8월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 '눈앞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기쁨과 슬픔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만들겠노라고 말하며 '사랑'을 안고 돌아왔어요. 사랑이 가지는 일종의 역설성,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직접 만나보실래요?

나무로 된 고요함

나는 나무로 된 고요함 위에 손을 얹는다
그 부드러운 결을 따라
보고 듣고 말한다
그대 기쁨, 영원한 기쁨의 지저귐이
사물들의 원소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황금 심장을 가슴 속에 품고 계신다
아, 거기서 떨어지는 황금 부스러기를
그 하나하나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지워질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쓸모를 모르는 완구(玩具)처럼
하늘의 언저리를 굴러가는 태양 아래
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
아, 우리가 불안을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그것을 하느님이
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나는 양손을 가슴팍 위로 거두어 모은다
망각이 그 부드러운 결을
한층 더 부드럽게 지워가며
나무로 된 고요함 아래 죽음을 눕힌다
그때 기쁨, 죽음으로부터
우연히 건너온 기쁨 하나를 움켜잡으려
나는 다시금 그 위에 손을 얹는다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이란 말에서 숨이 탁 막혔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손'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살짝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면 더 풍요로운 감상이 되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나의 약점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한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내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후략-

'사랑'이 어딨어?'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 이번 시집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 한 편('사랑은 나의 약점')까지 덧붙였어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게 되는 절절한 연시 계열이 아니죠? 일종의 성찰로 이어지는 전개가 자못 흥미롭습니다. 사실 시는 사시사철 다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짧은 가을이 겨울옷을 입기 전에 시집 한 권 들고 산책하시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쓰신다면 저도 꼭 읽게 해주세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