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 17:27
자기만의방(세계문학전집13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그냥 나누고픈 이야기라 급 포스팅을 합니다.
당황스러우셨더라도 즐거이 반겨주세요.


바로 이 분의 목소리를 전해드리려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내 숙모님 메리 비턴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려고 말 타러 나갔다가 낙마하여 죽었습니다. 내가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당시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한 변호사의 편지가 우편함에 떨어졌으며 그것을 열어보고 내게 매년 500파운드가 지급되도록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둘 - 투표권과 돈 - 중에서 돈이 더 무한히 중요해 보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지요. 그전까지 나는 신문사에 잡다한 일자리를 구걸하고 여기에다 원숭이 쇼를 기고하고 저기에다 결혼식 취재 기사를 쓰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쳐줌으로써 몇 파운드를 벌었지요. 그러한 일이 1918년 이전의 여성들에게 개방된 주된 일거리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알 테니 그 일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돈을 벌어 그 돈에만 의존해서 사는 어려움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애를 써보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지금도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 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항상 부득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고 또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 - 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 - 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숙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10실링짜리 지폐를 바꿀 때마다 그 녹과 부식된 부분들은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두려움과 쓰라림도 사라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 자유와 평등, 해방 등의 패러다임을 가로지르는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있는 주장이었지요. 당시 여성들은 제한된 경험, 인습, 통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으니 말그대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백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간에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실 - 그것이 사실이므로 - 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칠 것입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선구자들이었던 무명 시인들의 삶에서 자기 생명을 이끌어내며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작업 없이, 우리 편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녀가 다시 태어날 때 그녀가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겠다는 결단 없이, 그녀가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위해 일한다면 그녀가 출현하리라는 것과, 비록 가난한 무명인의 처지에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자기만의 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참고로 본문 중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울프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로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으나 기회가 없었던 '여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난 스릉님의 포스팅에서도, 또 제가 얼마 전에 소개드렸던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비슷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단지 이름과 얼굴만 다를 뿐이죠.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들에게 울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의 감상도 궁금하네요.

제게 큰 가르침과 용기를 주었던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큰 울림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30. 08:30
유홍준의국보순례
카테고리 역사/문화 > 문화일반
지은이 유홍준 (눌와, 2011년)
상세보기

별점평 : ★★★★★
한줄평 : 설명집이 아니라 이야기 같아 좋아요!

여러분, 제가 부득이하게 휴재를 했었죠? 죄송해요! 정말 빡세게 열심히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잘 보듬어주시와요! 무튼 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번 주의 책, 바로 '유홍준의 국보순례'입니다. 유홍준이란 이름, 모두 친근하시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중고딩의 필독서인데다가 얼마 전에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셔서 대단한 입담을 자랑하셨지요.

 

그가 왔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께서 '여러분'에 등장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문화재에 대해서 습자지만큼이나 얄팍한 지식을 갖고 있어요. 유물 관련 국사 문제는 여지없이 틀려버리곤 했죠. '우와, 아름답다!'라거나 '이렇게 정교하다니, 대박!'이라며 입을 헤-벌리고 감상은 잘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설명이나 부담스런 참고사항이 아니라 조금 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문화재 그 자체'를 바라보는 '유홍준의 국보순례'가 술술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칼럼들을 엮어낸 책이라 조선일보 사이트에서 검사하시면 바로 접하실 수 있어요. 제 기억에 남는 많은 유물들 중에 '백자 넥타이 술병'이 있는데, 조선일보에서 발췌한 부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이다. 제주병(祭酒甁)은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순백자를 사용했지만 연회용 술병에는 술맛을 돋우기 위해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그림이 단연 많다. 그러나 아마도 사대부들이 사용했을 술병에는 매화나 난초가 품위 있게 그려져 있고, 청초한 가을 풀꽃(秋草紋)을 아주 운치 있게 그려 넣은 멋쟁이도 있다. 그림 대신 목숨 수(壽)자나 복 복(福)자를 써 넣기도 했는데 거두절미하고 술 주(酒)자 하나만 쓴 것도 있다.

그런 중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백자 끈 무늬 병'(보물 1060호)이 있다. 이는 옛날엔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무늬로 표현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에 있는 15세기 백자 가마터에서는 술잔 받침에 이태백의 '술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네'(待酒不至)라는 오언절구가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술병에 푸른 끈 동여매고/ 술 사러 가서는 왜 이리 늦기만 하나/ 산꽃이 나를 향해 피어 있으니/ 참으로 술 한 잔 들이켜기 좋은 때로다."

이 술잔 받침과 쌍을 이루면 딱 알맞을 술병이다. 특히 무늬를 갈색의 철화(鐵畵) 안료로 그려서 마치 노끈이 달린 것처럼 실감이 난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한국인 특유의 멋과 유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남대 교수 시절, 시험문제로 "한국미를 대표하는 도자기 한 점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라고 출제했더니 인문대생은 달항아리를, 미대생은 이 끈무늬 병을 많이 골랐다. 그 중 한 학생은 유물명칭은 잘 모르겠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샘(선생님), 저는 백자 넥타이 병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맞았다! 이 끈무늬가 갖는 조형효과는 바로 넥타이와 같은 것이다.

이 병은 안목 높은 수장가였던 고(故) 서재식 전 한국플라스틱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소장품 중 이 한 점만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신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유홍준 국보순례 칼럼' http://j.mp/vBy8kS )

 
굉장히 멋진 문화재죠! 사실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갓 쓰고 글 짓는 선비님들의 모습을 떠올리기 쉬운데, 멋과 낭만 그리고 위트를 아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도 보여주니까요- 그래서 무척이나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유홍준 교수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곁들여져서 더더욱 재미지게 읽었던 것 같아요.

저처럼 문화재 감상은 잘하지만 딱딱한 교양서엔 체하시는 분들, 스토리 텔링이 곁들여진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은 분들, 혹은 유홍준 교수님의 무릎팍 도사를 감명깊게 보신 분들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