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7. 07:00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일류입니다. 학부모들이 날밤을 지새워가며 좋은 학군에 자식들을 보내려 노력하는 진풍경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내 자식은 벗어나게 하려고' 입니다. 현장의 교사나 정부를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열정은 부모님들 못지않게 대단합니다. 국민 모두가 '일류대학'을 목표로 시간과 돈,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를 향한 교육열'. 이 말만큼 한국 교육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열기 속에 우리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20년 가까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오는 동안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상과 관련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단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들어왔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공부 못하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좋은 대학 못 나오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는 말입니다.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가 요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들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어떤 세상과 마주치더라도 진정 살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주어진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 기능적인 사람이 되라며,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서열화 기준을 그대로 내면화하여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향하여 매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배울 기회를 놓칩니다. '자아 발견' 내지 '자아 재발견'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수가 높아 사회적으로 성과를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순간 우리는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역시 나는 위대해!'하고 자위하며 '가짜 자아'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내면은 공허해집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나 가족, 회사가 원하는 모습이지 결코 진정으로 내면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면이 말하는 대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율적이며 책임성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모두를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 명예나 권력이라는 외적 잣대는 그야말로 부차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기준을 잣대로 하는 차별은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개성과 소질들이 더불어 존재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 출발점은 '자아 발견'일 것입니다.




학교 현장의 교육 평가방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현재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의 평가를 도입하더라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고, 사교육 문제와 교육 양극화 현상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입시지옥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에서 언급한 '주체적인 삶을 사는 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교육평가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곧 학교 전체의 문제이고, 교육 현장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그 뿌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교육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선발의 기능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 평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려면,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선발의 기능만이 강조되어 온갖 교육문제의 폐단이 생긴 것이라면, 선발의 기능을 제거 혹은 감소시키면 됩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대학평준화'를 주장합니다.




초중
고를 막론하고 중등교육에서 대부분의 시험 문제는 점수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 점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점을 맞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몇 등을 했느냐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장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깨우칠 아이들의 미래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은 어두울 것입니다. 제대로 된 독서 한 번 하지 못한 채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것에서는 교육적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내신 등급과 수능 등급, 사교육 문제, 석차 서열화, 명문대 입학 등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너무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높은 성적, 높은 석차에 대한 강박이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습니다.하지만 현재의 대학서열체제 하에서 교육평가는 서열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 해결 방법은 대학서열체제를 엎어버리는 것뿐입니다.




학벌체제는 대학교육에서도 파행을 낳습니다.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기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이미 자신은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자괴감에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최근 대학가에 뜨거운 학구열이 불고 있지만, 그것은 학문 탐구의 장이 아닌 취업 학원으로서의 대학의 모습입니다. 향학열은 찾아보기 힘들고, '공부'가 아닌 '학점 관리'를 하며, '영어'가 아닌 '토익'을 공부합니다. 학문 경쟁력이 없는 국가에서 국가 경쟁력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몇 년 전 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이후의 인생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가 난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평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너무 심해서 ‘평준화’ 하면 다들 하향평준화를 이야기하고 평준화가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양 이야기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는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류 대학과 삼류 대학이라는 구분이 겉으로는 교육에만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부조리와 경쟁력 저하의 원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분야에서 특화될 수 있도록 하려면 서열화를 없애야만 합니다.




대학서열화, 고교등급제, 본고사부활, 기여입학제 등을 주장하는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시장에서 나오는 결과란 다양성이 아닌 독점이었습니다. 교육기회의 독점이고, 사교육의 독점이고, 학벌의 독점이고, 그것이 곧 부의 독점이 되며 신분의 독점이 되어왔습니다. 경쟁이란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서열화되어 있지만,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쟁을 통해서 교육의 효율성을 창출한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쟁이 아닌, 획일적인 시험 경쟁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평준화는 현실성 없는 공허한 외침이 아닙니다. 고교 평준화 체제처럼 대학 평준화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유럽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최부국 중 하나인 핀란드도,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프랑스도 대학 평준화 체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고교등급제와 비평준화체제(정확한 표현은 고교서열화 체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신봉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일부 명문대를 제외하면 평준화 체제에 가까운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 재생산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교육 불평등이 곧 계급 불평등으로 심화되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학 평준화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줄세우기를 위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의 중등교육에서는 현행 국영수와 같은 도구교과 대신 문학, 역사, 철학을 가르치는 인문소양 교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는 것에 더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6. 08:30
엄마를부탁해(교보문고30주년기념특별도서양장본+친필사인)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신경숙 (창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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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평 : ★★★☆☆
한줄평 : 엄마 말고 그녀


오늘 제가 소개드릴 책은.. 너무 유명하죠? 그래서 사실 쓸까말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소설이라면 오만상을 찌푸리는 동생녀석이 읽어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이렇게 오늘의 주인공으로 모시게 되었답니다. '엄마를 부탁해'란 제목부터 사실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뭔가 가슴찡한 이야기는 웬만하면 좀 피하고 싶어하거든요. 그래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며칠 전 아마존 닷컴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문학, 픽션 부문 베스트10에 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경숙 작가님도 무지 좋아해서.. 결국 책장을 펼쳤습니다. (그 전에 신경숙 님의 이야기를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살짝!)


올해 봄, 한 미국의 교수가 미국 라디오 방송에 나와 '엄마를 부탁해'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죠. '김치냄새 나는 크리넥스 소설'이라며 엄마가 불행한 이유가 남편이나 자식들 탓이란 것은 미국 문화와 맞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비평보다는 비난에 가까워 저조차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요. 그 교수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눈물과 희생 속에 세워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나봅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이 더더욱 필요했던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으흐흐. 여러분께도 추천! 우리 모두 효도합시다! (급마무리ㅋ)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란 의미심장한 첫 구절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지하철 역에서 실종된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진짜 엄마의 삶과 욕망,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가족들의 여정을 그립니다.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의 이름 '박소녀'가 아닌 '엄마'로만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책은 무척이나 일관성있게, 꾸준하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감싸안는 엄마 말고 꿈도 있고 두근거리는 사랑도 있던 한 인간의 삶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나는 엄마처럼 못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언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엄마를 부탁해' 262p)


아이들 챙기느라 꽃단장 한번 제대로 못 해보신 엄마도 예전에는 깔끔떨던 소녀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삶을 조금씩 삼켜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삶의 조각들을 자양분 삼아 성장해가는 것은 아닌지.. 사실, 무조건적으로 삶을 내어주고 희생을 불사하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요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신세대 어머니들도 많으시니 '엄마는 부탁해'에 공감하는 세대는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점에서 더더욱 기억해야할 그분들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탔던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네 나이와 같다는 것을 너는 아프게 깨달았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 275p)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하지만 '한 세계 그 자체'였던 '엄마. 당신을 태초부터 품었던 그녀의 자궁, 그 동그란 세계에서 태어나 그녀의 삶을 딛고 성장한 우리의 삶. 이 소설의 의미 있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한 줄 몰랐던 '엄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유의미하고 고마운 책이었어요.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엄마를 부탁해' 작가의 말 중에서)


어떤 구절보다도 긴 여운을 남기는 '작가의 말'이죠? 단순히 어머니의 정을 이야기하고 우리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