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5. 08:30










일주일간 잘 지내셨나요? 수요일마다(가끔 목요일에도..ㅠㅠ) 찾아뵈옵고 있는 유수입니다.

이제 바람에서 겨울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감기 걸린 분들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몸은 건강한데 마음 속이 복잡하군요!

'진작에 이것저것 배워놓을 걸..'하는 생각도 많이 들구요.







왜 인문계열 졸업생은 많이 안뽑는거야 왜왜왜왜왜왜 하하하하하흐핳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제가 취업 시즌을 맞아 이리저리 자리를 알아보는 건 다 생존을 위한 일이겠지요?^^;

대학 4년 큰 돈 들여서 졸업하려는데 막상 저를 받아주겠단 곳은 얼마 없으니 제가 참 잔혹한 시대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정이 이렇고 하니... 오늘은 20세기 100년의 세월 중 가장 잔혹했던 시절을 살아간 어느 가장의 눈물겨운 생존기를 담은 작품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만화는 미국의 전위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의 '쥐' 입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쥐> 1,2권의 표지입니다.
미국에선 1986년에 1권이 발표되었구요.
퓰리처 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1권 표지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에도 번역판이 나와 있습니다.
교육적인 내용 덕분에 대학 도서관에도 있을 확률이 큽니다.

만화 포스팅 올릴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요..
만화책도 사서 봐주세요. 아니 만화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요.
책을 사서 보면 어려운 출판사들을 도울 수 있을뿐더러
특히 만화책을 사서 볼 경우 '에이 만화책 같은 거 뭐하러 돈 주고 사서 봐'라고 생각하는 절대 다수의 범인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없어도 그만인 장점)
 
서점에도 많이 있습니다. 7500원이네요. 인터넷으로 사면 더 싸구요.
커피 두 잔 정도 안마시면 살 수 있는 가격입니다.
어차피 요새 대여점도 다 망해서 못 빌려볼걸요.
다운받으면 된다고? 이런 ㅆ...







 




작가인 아트 슈피겔만의 사진입니다.
작품 속에 작가의 아버지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라덱 슈피겔만의 사진이 한 장 나오는데요.
그 사진을 보고 나서 이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생김새가 참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김새는 비슷한 부자지간이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라 컴퓨터 게임과 만화 속에 파묻혀 산 아들과
20세기 초반 유럽 사회에서 인생의 전반기를 보낸 아버지 사이의 사고방식 차이에서 기인한 감정의 골이 깊었다고 하네요.
만화가인 아들이 그린 아버지의 생존 이야기인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자체가 두 사람이 화해해 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작품의 주인공인 블라덱 슈피겔만은 작가인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입니다. 1906년에 폴란드의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나 직물을 사고 파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던 청년이었죠. 벌이도 괜찮고 (블라덱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외모도 괜찮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촌누이의 소개로 유태인 재벌의 딸인 아냐 질버베르그와 결혼하여 첫 아들 리슈를 낳고 살던 중,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말로 다 못할 고생을 겪게 됩니다.

그 고생이 단순히 그가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에 겪게 된 것이 아닐 거라는 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라면 이미 눈치채셨겠죠?  유태인인 블라덱과 그 가족들은 흔히 홀로코스트라 불리는(쇼아Shoah라 지칭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하네요.)나치의 유태인 박해의 피해자였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 대부분은 모두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죽거나 그 전에 이런저런 일로 목숨을 잃었어요. 그의 아버지, 누나, 남동생, 장인장모.. 끝내는 첫 아들인 리슈까지두요. 작품의 1권은 블라덱과 그의 아내 아냐가 수용소행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숨죽여 도망다니는 이야기를, 2권은 끝내 게슈타포에 사로잡혀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블라덱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기록'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작가가 그의 아버지의 증언을 그대로 녹음하여, 이를 8년에 걸친 작업을 통해 시각화한 것이 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에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니 이건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하고 있는 짓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 그지 없어요. 일단 이 포스팅에선 이 얘기는 잠깐 빼놓고 가기로 해요.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라덱 슈피겔만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수용소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수용소 유니폼을 갖춰놓고 기념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이 있어 거기서 찍은 거라고 하네요.
어휴 저같으면 저 줄무늬 옷 꼴도 보기 싫을텐데.. 기념 사진을 찍다니 예사 사람이 아닙니다 참...










수용소에서 신체검사를 받던 일을 재연하고 있는 블라덱.
이 만화에서 유대인은 쥐의 모습으로, 독일인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적절한 비유지요?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도 인정하듯,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운이 대단히 잘 따라준 이유도 크지만, 그가 위기의 순간마다 대담하고도 약삭빠르게 그것을 피해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서두에 나오는 블라덱의 연애사에서나, 게토에서의 삶을 보면 그가 대단히 꼼꼼하고 두뇌가 유연한 사람임을 알 수 있고, 때로는 너무 계산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어 속물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렇게 살아남은 블라덱은 종전 이후 '살아 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 블라덱 슈피겔만의 성격과 그가 겪은 고생들.. 그리고 놀라운 수완으로 위기를 벗어난 순간들을 그림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냉철한 사업가에서 수전노로- 블라덱 슈피겔만은 어떤 사람인가요?




블라덱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위 장면은 블라덱이 처음으로 약혼녀 아냐의 집에 초대받은 날, 아냐의 벽장 속에서 약을 발견하고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장면입니다.
작품 전반에서 블라덱은 놀랍도록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요, 그의 그런 성격은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위의 장면처럼 약혼녀의 모든 것을 철저히 알아내려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사실 그에게는 아냐를 만나기 전부터 교제하고 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지참금을 가져올 수 없자 냉정하게 차버린 것도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죠.








또한 블라덱은 뛰어난 장사 수완을 타고 난 인물이기도 합니다. 위 장면은 종전 후 스웨덴에 잠깐 머물렀을 때 무작정 유태인 소유의 백화점에 찾아가 거래를 튼 블라덱이 그려진 장면인데요, 젊었을 때 직물 거래로 먹고 산 이력이 있어서인지 아무도 팔지 못한 물건이라도 손쉽게 팔아치워버리는 솜씨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장사 솜씨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데에도 큰 보탬이 되지요.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무엇이든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던 수용소 생활의 여파 때문인지 샛노란 구두쇠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위의 대화에서 아버지의 그러한 성격을 작가가 얼마나 지긋지긋해 하는지 알 수 있죠ㅋㅋ









블라덱은 아냐가 갱년기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폴란드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말라라는 여성과 재혼 합니다. 하지만 블라덱의 지나친 결벽과 인색함 때문에 불화가 끊이지 않죠. 생활비로 한달에 50달러라니..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50달러면 지금 돈으론 얼마인가요? 아무리 높게 잡아봐야 한달 살림엔 턱없이 모자라겠네요...






이렇듯 나이가 들어선 남들과 함께 살기 불편한 성격이 되고 말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명석함은 그와 아내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제 수용소 안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살아 남았는지 살펴볼까요?





 












"뭐든 할 줄 아는 게 좋은 거란다" - 블라덱 슈피겔만의 파란만장 생존기






 

 

 

 













제 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후부터 블라덱 슈피겔만의 고생길이 훤히 열리기 시작됩니다. 폴란드군으로 참전한 그는 교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포로로 잡힌 그는 춥고 배고픈 포로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야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머리 회전 빠른 블라덱답게 가만이 앉아서 구더기가 자기 살을 파먹는 것을 보고만 있진 않았어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집안 친구를 친척으로 위장시켜, 다른 포로들보다 손쉽게 귀향 티켓을 얻어냅니다. 폴란드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독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인으로 위장하기도 하죠. 만화에선 쥐인 블라덱이 돼지(폴란드인을 돼지로 치환했네요)가면을 쓴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게토를 하나하나 소개시켜 그 안에 갇혀살던 이들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하자, 블라덱은 집 지하실에 교묘한 비밀 벙커를 만들기도 합니다. 또 벙커에서 지내다 독일 경비병과 접촉한 이들이 그들과 계약을 맺어 돈을 주고 게토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는 솔깃한 소식을 들어도 쉽게 믿지 않습니다. 결국 끝까지 독일 경비병을 믿지 않았던 블라덱이 옳았죠. 이렇게 그는 자신의 신중함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뭐든 할 줄 아는 게 좋은거야" 이번 포스팅의 제목은 이 페이지의 대사에서 따왔습니다. 게토의 작업장에서 신발 수선법을 배워둔 블라덱은 아우슈비츠에서 그 기술을 긴요하게 써먹게 됩니다. 어릴 때 잠깐 배웠던 함석 제련 기술로 함석장이 일을 하던 블라덱은 신발 수선 역시 배워둔 덕에 위험한 작업장을 떠나 자신만의 수선실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에 아냐에게 몰래 건내줄 빵 따위를 모을 수도 있게 되죠.  





 



 


블라덱의 고난은 오히려 수용소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어요.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나치는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을 모두 독일 본토로 데려와 전부 죽여 자신들이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던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고 하죠. 그들은 꼭 본토까지 데려가서 죽일 생각은 없었던지 유대인들을 가축 수송용 열차에 빽빽히 태워 독일까지 데려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저절로 죽어가길 기다린 듯합니다. 열차 한 칸에 200명씩 들어찬 생지옥에서 블라덱은 담요를 갖고있던 덕에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어요. 














영어를 배워두었던 것도 포로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궁리를 해 체력을 유지했지만 블라덱은 곧 티푸스와 당뇨를 한꺼번에 앓으며 한동안 사경을 헤메게 됩니다. 결국 병이 낫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 아냐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죄의식의 대물림-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다 떠나고...결국 남은 건 사진 뿐이란다."




지금까지 블라덱의 수난기를 살펴보았는데요, 부디 이 글을 읽고 제가 블라덱과 같이 재주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을 힐난하고 있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절대로! 그건 제가 이 포스팅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 또 이 작품의 작가 또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거예요. 왜냐하면 작가인 아트 슈피겔만이 이 만화를 발표한 것은, 과거의 희생자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자로서의 자신의 죄의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작품은 쇼아의 생존자이자 동시에 그 피해자인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이 생존자로서의 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진짜 생존자'인 자신의 아들, 작가에게 대물림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블라덱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 특별히 선해서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민족을 위한 어떤 사명을 띄고 살아남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저 그는 운이 억세게 좋았고, 살기위해 거짓말을 하고 뇌물을 바치고, 같은 동포의 비명을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려나가며 살아왔기 때문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거라고, 블라덱은 생각했을 거예요.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동포들이 왜 그런 죽음을 맞아야 했는가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그의 아들인 작가에게 넘겨지고, 작가 역시 그 대답을 알지 못했을 것이구요. 작중에서 역시 쇼아의 생존자로 등장하는 그의 정신과 의사가 말하듯, '그저 깊은 슬픔을 느낄 뿐'이었겠지요.


그래서 이 만화는 블라덱의 과거사를 다룬 내용과 현재 그와 그의 아들의 불편한 관계를 묘사한 내용이 솜씨좋게 엮여나가는 구조의 플롯을 가지고 있어요. 이 작품이 발표와 동시에 엄청한 찬사를 들은 이유는 수용소의 희생자에 대한 내용을 재현할 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밀도있게 그려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날카롭게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차마 말로 다 못할 학살이 일어난지 반세기가 지난 20세기 말, 그 상처를 안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행동을 보여줘야 할까요?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던진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조금은 허무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모든 말은 침묵과 무위에 묻은 불필요한 얼룩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5. 08:20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수요일 아침을 여는 사과모히토 입니다. 턱관절 장애와 만성피로 등등으로 고생고생 한 일주일이었어요. 오늘은 여고괴담 뉴버전을 꿈으로 꾸는 바람에 잠을 설쳤습니다. 흐엥 지금 정말 괴롭군요. 그래서 미뤄둔 포스팅을 꼭두새벽에 하고 있습니다. 그닥 센치한 시간대는 아니지만, 오늘 소개할 사람은 '시인'입니다. 당연히 소개드릴 책도 '시집'이 되겠죠?


오오, 훈남 스멜! 그의 이름은 심보선! 등단하신지 17년 되셨네요! 2008년 등단 14년 만에 묶어 낸 첫 시집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동경하기도 하구요. 심보선 시인의 시들은 '생각할 거리', '느낄 거리'를 건네줍니다. '늘 긍정적인 자세로 삶에 임하라!'식의 훈계나 계몽이 아니라 '이런 삶이, 생각이, 느낌이 있었다'라고 말을 겁니다.

종종 자기계발서적이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결정지어진 의미를 그대로 흡수한다면, 소위 말하는 '밥을 입에 떠넣어 주는 식'에 그치고 말겠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순수문학이 자기성찰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보선 시인의 시집은 2권입니다. 모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왔어요. 시를 좋아하시지 않으셔도 문학과 지성사 시집의 표지는 대부분 익숙해하시더군요. 2008년 출간된 첫 시집의 제목은 '슬픔이 없는 십오초'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감상하세요!

슬픔이없는십오초:심보선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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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집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시였습니다. (제가 카모마일 티를 워낙 좋아해서 마치 시 속 '여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고요 히히) 어려운 어휘가 따로 없지만 다소 난해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감상은 여러분의 몫!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이어집니다.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복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고딩때 시를 끼적이던 저에게 가장 좋은 주제는 '청춘'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재고 꾸며 시쳇말로 '허세'로 쓰여진 망작(ㅋㅋㅋ)이 대부분이죠. 심보선의 '청춘'은 어쩌면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의 단편들, 현재의 삶들을 꺼내게 해주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읽고 펑펑 운 독자 1人! 찌질한 청춘의 대명사인 독자 1人!

눈앞에없는사람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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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 8월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 '눈앞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기쁨과 슬픔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만들겠노라고 말하며 '사랑'을 안고 돌아왔어요. 사랑이 가지는 일종의 역설성,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직접 만나보실래요?

나무로 된 고요함

나는 나무로 된 고요함 위에 손을 얹는다
그 부드러운 결을 따라
보고 듣고 말한다
그대 기쁨, 영원한 기쁨의 지저귐이
사물들의 원소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황금 심장을 가슴 속에 품고 계신다
아, 거기서 떨어지는 황금 부스러기를
그 하나하나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지워질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쓸모를 모르는 완구(玩具)처럼
하늘의 언저리를 굴러가는 태양 아래
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
아, 우리가 불안을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그것을 하느님이
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나는 양손을 가슴팍 위로 거두어 모은다
망각이 그 부드러운 결을
한층 더 부드럽게 지워가며
나무로 된 고요함 아래 죽음을 눕힌다
그때 기쁨, 죽음으로부터
우연히 건너온 기쁨 하나를 움켜잡으려
나는 다시금 그 위에 손을 얹는다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이란 말에서 숨이 탁 막혔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손'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살짝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면 더 풍요로운 감상이 되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나의 약점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한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내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후략-

'사랑'이 어딨어?'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 이번 시집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 한 편('사랑은 나의 약점')까지 덧붙였어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게 되는 절절한 연시 계열이 아니죠? 일종의 성찰로 이어지는 전개가 자못 흥미롭습니다. 사실 시는 사시사철 다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짧은 가을이 겨울옷을 입기 전에 시집 한 권 들고 산책하시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쓰신다면 저도 꼭 읽게 해주세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