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7. 08:30

 여러분 혹시 영화 <러브레터>(1995)를 기억하십니까?

 질문을 던질 때만 해도, '기억 못하실리가!' 라는 생각으로 한 말인데 벌써 17년 전 영화군요? 모르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기억하는 분이 틀림없이 더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혹 영
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 영화의 '오겡끼데스까'의 장면만은 알고 계실 거에요. 그 장면은 영화보더 더 유명하고 인기를 끈 장면이면서, 영화 내에서는 한 명의 히로인인 히로코의 감정 클라이막스 장면이기도 한 중요한 씬입니다만,  사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연정'의 주인공은 또 다른 히로인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아닌가 합니다. 


                                                             봐요, 히로코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서 보여주는 "매우 뜸들이는 연정"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지막 씬에 도달하기 전까지 여자 이츠키 그녀는 남자 이츠키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알지 못합니다. 주변의 추궁에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일관하죠. 중학생 때 반 아이들의 짖궂은 놀림에 그녀가 울자 그가 클라스메이트를 때렸을 때부터 우리는 다 알겠든데... 

 그렇지만 그녀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감정을 그녀보단 분명히 알고는 있었던 그도 도대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요즘의 우리들이라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어!'라고 말할만한 행동들 뿐이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새학기 첫날,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성과 이름이 같은 두 어린 남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쉽게 잊을 수는 없죠. 이때부터 필연적으로 둘은 서로를 의식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쓰기 때문에 혈연이 아닌 남녀가 이름이 같다면 놀림당하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저 때는 가장 철없다는 중학생 시절 아니겠습니까?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두 남녀는 결국 아이들의 장난으로 도서위원일을 함께 맡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거의 일을 하지 않기 일쑤. 그리고 이상한 장난을 치곤 합니다.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히로코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건 우리도 미처 몰랐겠다! 싶은 강도의 어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가 그녀를 충분히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였을까요? 놀랍게도 아닙니다. 왜냐면 그녀와 닮은 히로코를 본 순간, 여자에게 쑥맥인 그가 첫눈에 반했다,며 고백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는 환상이 가진 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진실하고 강력한 감정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거죠.

 그러나 계속 그 정도 범위에서 그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에게 약간은 심술을 부리지만, 뭘 더 어쩌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신경을 쓰고 있을 뿐, 뭔가 잘해준다거나 사귀자고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죠. 감정이 표현될 때 해소되는 것이라면, 이 감정은 끝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연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그가 그녀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자, 그는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전하지만, 그녀는 그게 러브레터인지 알지 못한 채 또 수 년이 흐르고 맙니다. 그 러브레터란 것도 걸작인 것이 그녀의 이름을 적은 독서카드 뒤에 그린 그녀의 초상화이거든요. 우회와 지연을 더하고 더한 엄청난 지연이죠.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뜸을 들인 그 마음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수신인에게 도착합니다. 온 러닝타임동안,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이후부터 그는 죽고 그녀만 남아 살아가고 있을 때까지의 시간 동안, 뜸들이며 무르익은 그 감정은, 어린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척이나 큰 감흥으로 터지게 됩니다.

 만약 그 마음이 더 일찍 그녀에게 전해졌다면? 
 그녀가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발견을 했거나, 혹은 아예 그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고백했다면?
 과연 영화는 지금 같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그 "뜸들임"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그 영화가 담고 있는 그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무척 매료되면서도 꽤나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만으로 족했던, 뭔가를 더 바라지도 않거나, 감히 바라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만 담아둔 마음을 오래오래 유지했던 '순정어린' 때는 언제가 마지막이였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만약 이게 현재의 우리들에게 들려진 얘기라면  아마 그가 친구를 때린 그 포인트에서 이미 '요거는 사랑이구만'이라며 잽싸게 그 포인트를 찍어내서 그 감정들을 모두 해부해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너 나 좋아하니?'라고 도발적으로 말한다던가, 키스부터 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는 나랑 사귀자, 느니 하면서 말이죠. 

 우리가 더 이상 그런 순정어린 사랑을 하지 않게 된 건 우리가 더 이상 중학생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17년 전과 지금의 사회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라진 탓이 있지 않을까요? 빨리 빨리, 어서 결론을 내자, 라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혹은 이제는 무언가를 진득하니 안고 가기보다는 욕망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어 빨리빨리 해소해 버려야 하는 문화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뭔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해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원인을 찾자면 이것저것이 될 수 있겠지만 요는 문화 자체가 즉각적이고 빠른 방향으로 변화했고 연애 문화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중학생도 저런 순정어린 사랑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 변화를 두고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순정어린 사랑이 반드시 더 좋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조건 회귀하자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생각일 수 있죠.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야하는 합당하고 현명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천천히, 은은히, 뜸들이는' 사랑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위상 혹은 유의미한 지점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소개팅이나 선처럼 애초에 어떤 목적을 가진(조건이 맞으면 함께 한다는 식의) 만남을 주로 하고 있는 요즈음이라 그런지, 조금은 저 순수한 사랑이 그립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족했던, 오래오래 그 감정을 가슴 속에서 숙성시켰던 그런 때가. 그래서 쉽게 변하지 않았던 마음이라는 것이. 사랑이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연모의 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감정도 비교적 빨리 타오르고 빨리 식는 지금의 문화에서
오랜 시간 뜸을 들였을 때 감정이 더 깊어진다는 것은 예전의 사랑이 주는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진득하게 사랑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은 욕망을 절제해 가면서 말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by 토끼고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명제 뿐이라고 생각. 태클 환영. 댓글 환영.



P.S.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15. 17:43

안녕하세요 :) '학교를 안 갔어' 코너를 맡고 있는 스릉입니다. 먼저 포스팅이 늦어진 데 대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ㅠㅠ 오늘이 일요일인줄 몰랐어요....... 요즘 방학하고 잉여롭게 살다보니 날짜 감각이 없어요 헝헝. 오늘은 학교에서는 조금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재미없어도 재미나게 봐주시면 캄사하겠습니다!





남자들끼리 대화를 하다 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값)싸 보이는 여자', '꼬리치는 여자'에 관한 것인데요, 흔히 남성들은 '여자가 먼저 유혹해서 벌어지는 불륜이나 성행위, 만남은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다' 라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합니다. 


"그 년이 딴 새끼한테 꼬리쳐서 바람피웠다."

"야한 옷 입은 거 자체가 자기 꼬셔달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어.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기 때문에, 잠시만 혼자 놔둬도 바람 피워"
"지가 원해서 매춘하는데, 왜 남자들만 성매매 하면 죽일 놈 취급하지?"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음담패설은 단골메뉴이고, 그 음담패설이 대부분 여성의 바람끼(밝힘증이라고도 표현한다)나, 여성에 대한 은유로 채워져 있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을 살펴보면 곧 물음표가 생깁니다. 나이 들어서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원조교제를 하고, 술집에서 어린 여자들을 찾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여자가 성욕을 표시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면서 유혹하면 누구보다 환영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가요? 남자들이 여러 여자들을 사귀거나 같이 잠자리를 하면 '능력 있다' 라는 평을 듣는데, 왜 여자들이 그러면 '걸레' 라는 모욕적인 욕이 나올까요?


한국과 같이 보수적인 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의 야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섹스와 성에 있어서 여성들은 불리한 위치에 존재합니다. 아담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한 죄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평생 노동을 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성경의 내용, 그리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인류는 죄악에 노출되었다는 신화의 내용, 또 트로이 전쟁도 헬레네를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치정극이 아니었던가요. 여기서 문제되는 점은 남성들의 양가감정입니다. 


여성의 미에 현혹되고, 여성들이 한없이 아름답기만을 바라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들을 온갖 신화와 회화, 담론을 통해 저급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쾌락은 즐기되 책임은 회피하려는 저열함에 기인합니다. 


아리스토렐레스 같은 위대한 학자도, 신화 속의 영웅들도 모두 여성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남성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 저급한 여성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미를 취하면서도 그것을 깍아내리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요부가 유혹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는 남성들의 초라한 자기위안이야말로 팜므파탈로 상징되는 왜곡된 여성성의 진실이고, 팜므파탈이라는 코드를 만들고, 유포하며 즐기는 동시에 비판하는 양가성의 원인입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과에 아주 예쁜 여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남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꿀을 얻으려는 벌떼들과 같이 많은 선배·동기들이 그 여학생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술에 취해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학생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얌전히 공부만 했습니다. 1년이 흘렀습니다. 더러 몇몇은 그 여학생에게 직접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고, 몇몇 동기는 연정을 삭힌 채 군대에 갔습니다. 그리고 고백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이도 남아 있었습니다. 술 취한 동기의 넋두리를 들어주며 흥미롭게 그 사태(?)를 관찰했습니다. 결과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그 치사한 경쟁의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1년 동안 그 여학생이 자신도 모르게 '팜므파탈'로 둔갑해 있었다는 사실이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지요. 학교 남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돈 많은 유부남과 사귀기 때문이다, 방학 때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더라, 여름에 야하게 입고 화장한 것을 봤는데 영락없는 '나가요 걸' 이더라, 은근히 남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남자 여럿 잡아먹을 여자다.......(술 취해서 그 여학생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인간들이 나중에 소문이 퍼지자 서로 일치 단결하여 그 여학생을 성토하는 것을 보고 느낀 황당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백했다 실패한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퍼뜨린 것인지, 한을 품고 군대에 간 누군가가 퍼뜨린 것인지, 아니면 그 소문 중 몇 개는 사실인지,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평범한 한 여학생이 순식간에 팜므파탈로 변신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신화나 고전 회화, 그리고 역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의 존재와 내용에 대해서 저항을 갖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뱀을 두른 클레오파트라나 이브의 그림을 보고, 상자를 여는 판도라를 보고, 나폴레옹을 매혹시킨 조세핀의 일화와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그들을 요부로 각인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뿌리깊게 박히고, 여성들은 자신은 그들과 같은 요부가 아님을 다행으로 알면서 안도합니다. 


성매매 여성이 미군에게 찔러서 죽은 사건은 무심코 넘어가면서, 여중생이 죽으면 수십만명이 촛불을 들고 정의로운 자가 되는 현상도, 성매매 여성들은 요부들이고 값싼 여자들이라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은 지금-여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팜므파탈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비교하면서 안심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일탈과 맹목적인 몰두를 변명하기 위해서.


넬슨 제독의 애인 해밀턴 부인과 19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레카미에 부인에 대한 일화를 보면 04년에 출간된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정이현)이 떠오릅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돋보이는 학벌도 부유함도 소유하지 못한 평범한 여성. 그렇다고 온갖 아부와 먹이사슬이 횡행하는 학문에 몰두할 뜻도 없으나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기는 싫은 소비세대 여성. 그 여성이 택한 것은 남자를 통한 성공이었습니다. 만나되 잠을 자지는 않으며, 좋다고 말하되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그러다가 안정적인 남자를 만나서 순결을 바치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은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그 논쟁도 팜므파탈을 보는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체적인 사회인식을 포기하고 낭만을 허울 삼아 벌이는 색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느냐라는 반문부터 문체나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쟁까지. 하지만 이 소설에 관한 논쟁 중에서 현저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 평범한 여성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렇게 탐색하다가 안정을 발견하면 몸을 던지는 조신(?)하고 깨끗한(?) 여성들을 갈구하는 남자들, 그리고 욕을 하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조신한 이미지로 부와 명예를 갖춘 남자를 만나길 바라는 여자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런 여성들은 수없이 생겨날 것이고, 이 현실적이지만 수준미달인 소설에 대한 논쟁도 계속될 것입니다.


'람보'의 강인한 근육과 엄청난 능력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 환타지를 이용해 자신들이 벌인 더러운 전쟁의 패배를 영상으로 복수하는 것은 문제적입니다. 여성의 미를 원하면서 그 미를 순식간에 더러움과 요설로 격하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양분되어 있지 않으며, 한 인간에게 그 특징들이 혼재합니다. 


모든 구분들은 이해관계의 산물이 아닐까요. 성경이라는 경전과 신화의 견고한 이미지를 통해 남성들은 변명과 위안을 얻었고, 여성들은 자신들은 정숙하다는 면죄부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동의와 비열한 계산은 '구분'을 양산하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곁에 잔존합니다. 일상의 대화로, 영상 이미지와 소비의 형태로, 그리고 예술로.



팜므파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만들어질 뿐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